"싸우지들 말게나 정치도 詩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토사구팽···30년 우정의 내 마음, YS는 알텐데”
국회 상공위원장 시절 창간···세계 기능인대회 대표들 솜씨는 장인급인데 생계 위해 마지못해 일해
"그들에게 자긍심 심어주자" 궁리 끝에 '샘터' 만들게 돼
"진솔한 삶의 이야기 쓰자" 어렵고 유식한 얘기 쓰면 대학 교수들 원고도 '퇴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소월의 시 '초혼(招魂)'을 외는 노(老)정객의 음성이 물기에 젖어 떨렸다. 나라 잃은 설움을 깨닫기 시작했던 중학시절 애송하고 또 애송했던 시란다. 50년 정치 인생, 그 영욕의 세월을 마감한 뒤에도 약주 한잔 들어가면 나지막이 소월을 읊는다고 했다. '그 사람이여'를 '내 조국이여'로 바꿔서….
김재순(金在淳·85). 사람들은 그를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정치인으로 기억한다.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이 주도한 정치권 물갈이 과정에서 13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7선 의원 김재순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인용한 말이 '토끼사냥이 끝나자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의 '토사구팽'이다.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인 자신을 퇴출시킨 데 대한 원망을 담은 이 사자성어는, 비정한 정치세계 혹은 염량세태를 풍자하는 말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정계를 떠나 초야에 묻혀 살던 그가 최근 '경사'를 맞았다. 자신이 1970년 4월에 창간한 '월간 샘터'가 이달로 지령 500호를 맞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로 출발해 한때 50만 부를 자랑하는 대중지로 사랑받은 샘터는 문인과 화가, 건축가 등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자 아지트였다. '정치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임을 온몸으로 보여준 베테랑 정치인 김재순의 방대한 문화예술계 인맥의 뿌리가 바로 '샘터'다.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김수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울 동숭동 '샘터' 사옥에서 김재순 고문을 만났다. 세상을 호령할 듯 부리부리했던 눈매는 '노인'의 어진 미소로 가득했다. 샘터 41년 역사와 함께, 유년시절 평양 대동강변에서 만난 조만식 선생으로 인해 첫 싹을 틔운 그의 정치인생 50년을 들었다. 치열하고도 험난했던 근현대사와 동고동락한 세월이었다.
- ▲ 담쟁이넝쿨 아름다운 빨간 벽돌집‘샘터’의 옥상에서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활짝 웃었다.“ 인생이 행복하셨습니까?”묻자,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더없이 행복했지 요. 아들 위해 헌신한 어머님이 계셨고, 정신적 안식처인 아내가 있고, 변변치 않지만 제 앞가림하고 사는 자식들이 있고요. 뭣보다 손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행복하지요.” 호랑이상으로 유명했던 정계의 거물은 세월과 함께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법정스님과 생쥐
―2002년 대장암 수술을 받으셨는데도 건강해 보이십니다.
"(내 모습이) 아직 연애할 만해요?(웃음) 하루 4~5㎞씩 걸어요. 아주 좋아요."
―샘터의 오랜 생명력은 어디에서 비롯됐다고 보십니까.
"샘터를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독자들과 필자들이겠지요. 우리가 필자로 고른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였어요. 글 잘 쓰는 사람,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어른, 마지막이 무명이지만 삶의 현장에서 땀 흘리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대학교수들도 샘터로부터 원고 '빠꾸'를 여러 번 맞았지요.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건데 어렵고 유식한 얘기들만 쓰니 퇴짜를 놨어요. 그런 자존심이 샘터의 오늘을 만들어준 게 아닌가 싶어요."
―1970년 4월 '샘터'를 창간하신 때가 공화당 의원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국회 상공위원장을 맡으면서 경제계, 산업현장을 가까이서 살폈어요. 그러다 세계기능인올림픽대회를 알게 됐고, 거기에 대표로 나갈 사람들을 뽑기 위해 국내 대회를 열었지요. 대패 하는 사람, 창호 하는 사람, TV 고치는 사람, 양복 만드는 사람 해서 20개 종목에서 금메달이 나왔지요. 그들을 하나하나 인터뷰했는데, 솜씨는 장인급이면서 하나같이 자기 일을 생계를 위해 마지못해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부모 잘못 만난 것, 집이 가난한 것, 학교 가지 못한 것들을 불평해요. 나라 경제를 발전시켜야 할 마당에 자기 하는 일에 신바람이 나야 경제고 뭐고 되는 것인데 큰일이다 싶데요. 그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 나온 게 샘터예요."
―시인 김지하씨가 초대 편집장이 될 뻔했다고 들었습니다.
"후보에 오른 세 사람 중 하나가 김지하, 그때 이름은 김영일이었지요. 내 생각에도 김지하가 제일 괜찮은데 하필 폐병 3기였어요. 어느 날은 자정이 넘은 시각에 파출소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김영일이란 사람이 만취해서 파출소를 다 때려부쉈대요. 내가 다 보상하겠으니 풀어달라고 했지요. 그것 때문은 아니고, 건강 탓에 초대 편집장으로 영입하질 못했어요."
―생전의 피천득 시인과 첫눈이 오면 서로 전화를 걸어주던 40년 우정이 유명합니다.
"피천득 선생은 첫눈을 하늘이 전해오는 메시지라고 했어요. 무슨 약속을 한 건 아니었고, 어느 날 눈이 오니까 선생님이 가장 먼저 생각나서 전화를 드렸지요. 세상만사 어지러울 때 첫눈, 그 숭고한 스펙터클이 주는 환희의 맛을 즐겼지요."
―법정스님을 빼고 '샘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님이 30대였을 때 처음 만났지요. 이 말 저 말 중에 개 이야기가 나왔어요. 소학교 다닐 때 개한테 크게 물려서 내가 개를 무서워했거든요. 그러자 법정이 이런 말을 해요. 자기가 수도를 할 때면 밤낮 옆에 와 있는 쥐새끼 한 마리가 있다는 거예요. 수행이 다 끝날 때까지 지키듯 앉아 있다는 거지. 그래서 어느 날 '넌 왜 이렇게 못나게 생겼냐. 다시 살아나올 때는 예쁜 아기로 태어나라' 그랬대요. 며칠 뒤 그 자리에 갔더니 그 쥐가 죽어 있더래요. 그러면서 법정이 나더러 하는 말이 '개하고 얘기를 해보세요, 알아들을 겁니다' 해요. 그 말 들은 순간부터 개에 대한 무서움이 다 없어졌어요. 정말이야. 우리 집에 개 두 마리를 키우니 말 다했지요.(웃음)"
◆"인간 성철을 만나러 왔다"
―샘터 사옥은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입니다.
"김수근이가 건축가협회 회장 할 때 나한테 상을 주더라고요. 건축가도, 시공자도 아닌데 왜 상을 주느냐고 하니까 건축가로서 이런 사주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래요. 내가 일절 잔소리를 안 하거든요.(웃음) 수근이를 따라가려니까 우리가 손해가 많긴 했지요. 1층 스페이스를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통로로 내주었으니."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축도 주도하셨다 들었습니다.
"공화당 원내총무 할 때 건축위원회도 책임졌는데 당시 국회의장이던 이효상 영감과 논쟁이 있었어요. 내가 전문가한테 맡겨서 받아온 설계도면을 보더니 그 양반이 의사당 지붕은 무조건 돔 형태로 올려야 한대요. 그 무렵 유신이 터져 나는 정계를 떠났고, 나중 완공된 의사당을 보니 원안에 없던 돔이 생겼지요. 그 어른 생각엔 만족스러울지 모르나, 내가 아는 사람들은 '상여' 같다 그래요. 한 국가의 상징물은 국제공모는 못할지언정 전문가들 손에서 태어나야 해요."
―성철스님과도 인연이 있으시지요?
"유신 직후 뇌질환으로 쓰러졌다 겨우 살아났을 때, 죽기 전 남들이 존경하는 명사들이나 만나보자 하는 생각에 마누라를 지팡이 삼아 해인사에 갔더랬죠. 스님 계신 백련암은 또 한참 산길로 올라가야 하는데 쉬엄쉬엄 두 시간 반 만에 당도했더니 '누가 나를 찾아왔다고?' 하면서 꽥꽥 소리를 질러요. 그러더니 삼천배를 하라는군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나는 성철스님이 아니라 인간 이성철을 만나러 왔다'고."
―고수가 고수를 만났군요.
"두 시간여 인생 사는 이야기 나눴지요. 그 인연으로 샘터를 보내드렸더니 꼬박꼬박 책값을 올려보냅디다.(웃음)"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샘터의 뒤표지에 원고지 넉 장 안팎의 칼럼을 싣고 계십니다. 영문학자 장영희는 '앞표지보다 뒤표지가 더 중요한 책이 딱 한권 있는데 그게 바로 샘터'라고 했을 만큼 의장님 글을 애독했다 들었습니다. 시대를 읽는 탁월한 안목에 팬들이 많습니다.
"내가 정치를 하니까 정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중에서도 국제정세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 중국, 미국이 어떻게 움직여 나가는지, 그 속에서 한국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가 최고의 관심사였어요. 타임, 뉴스위크, 아사히신문, 일본경제신문, 요미우리 신문을 구독해 읽은 지가 벌써 40년 세월이에요."
―독서의 폭과 양이 중국 고전부터 젊은 작가들의 소설까지 상당하시더군요.
"독서라는 게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아요. 몇천년 전의 사람들, 동양친구이기도 하고 서양친구이기도 하고. 오늘은 누굴 만날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꺼내들지요. 500호에도 썼지만, 시시한 책 백권 읽는 것보다 좋은 책 1권을 100번 읽는 게 낫다는 게 내 지론이에요."
―'토사구팽'이란 말도 그 독서력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억울함을 토로하다 보니 2000여년 전 한신(韓信)이 한 말이 자동으로 나온 것뿐이에요.(웃음)"
- ▲ 좌우(左右)를 넘어 인맥의 폭이 넓었던 김재순은 의원 최다득표로 제13대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1988년 제13대 국회 개원 축하연 에서 건배하는 모습. 왼쪽부터 윤길중 당시 민정당 대표, 김대중 평 민당 총재, 김재순 국회의장,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 조선일보DB
김재순은 장면 총리의 민주당 시절 5대 국회의원으로 30대에 금배지를 달았다. 5·16 군사혁명으로 10개월간 옥살이를 하지만 김종필 등 청년 장교클럽과 극적으로 의기투합하면서 공화당에 입당, 원내총무까지 지낼 만큼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의 정치인생이 최대 고비를 맞은 건 유신 직후다. 유신에 반대한 이유로 16년간의 낭인시대로 접어들고 건강마저 악화된다. 그를 다시 국회로 불러들인 건 노태우 대통령이다.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은 물론 국회의장으로도 선출돼 화려하게 재기하지만, 3당 합당 이후 김영삼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것을 끝으로 정치생활을 마감한다. 공교롭게도, 당시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글에서 김재순은 토사구팽의 그 사기(史記)를 인용했다. "유방(劉邦)은 정략·권모술수에 있어 장량(張良)보다 못하였고, 용병작전에 있어 한신(韓信)에 뒤졌으며, 행정수완처리에 있어 소하(蕭何)보다 못했지만 장량·한신·소하를 다 쓸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유방이었다…."
―토사구팽의 진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은퇴 후 만나는 사람마다 역사에 남을 명언을 만들었다고, 영삼이 따라다녀 봐야 뭐하겠느냐고 인사를 해요. 듣기 좋으라고 그랬겠지만, 내 심정을 진정으로 알지는 못했을 거예요. 함께 정치운동 할 때 영삼이는 늘 자기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어요. 나는 고향이 이북이니 조국 통일에 한몫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 했지요. 그 포부는 (김)대중이도 잘 알아요. 나로서는 대통령 되겠다는 30년 우정의 영삼이를 충성으로 돕고 싶었어요. 그걸 알 텐데…, 그런 것들이 아쉬울 뿐이지요."
―고위공직자 재산공개가 원인이었습니다. 부정축재를 하신 것도 아닌데 항변하시지, 왜 바로 정계은퇴를 선언하셨습니까.
"청와대 심부름하던 주돈식(당시 공보수석)이 전날 밤 내 집에 왔어요. 덜덜덜 떨면서 말을 못하길래 '공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으니 편안하게 얘기하라'고 했지요. 다 듣고 나서 '내가 정계를 떠나겠으니 영삼이에게 전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주돈식에게 물었지요. 나와 영삼이 중 누가 더 청렴하고 정직하게 살아왔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않으냐, 그렇다면 너의 판단이 있을 줄로 안다. 그만 가라."
―은퇴 후 김영삼 대통령과 다시 마주할 자리가 있었을 텐데요.
"화도 가라앉힐 겸 하와이로 나가 있는데 서울대 총동창회장으로 내가 선출됐다는 소식이 전해와요. 회장 하는 일이 모교의 예산을 정부로부터 많이 따주는 것인데, 국회의장을 지낸 내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서울로 돌아왔고, 그 일을 하려면 동문인 대통령을 만나야 하니 청와대로 갔지요. 내 얘길 다 듣지도 않고 무조건 '그래 하자 하자, 해줄게' 하는 거예요. 속으로 그랬지요. '이 사람아, 나를 선거구 사람들 속여먹듯 하려느냐?'(웃음)"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보다 정계에서는 선배이십니다. 대권을 꿈꾸진 않으셨습니까.
"욕심이 아주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국회의원 선거에 이래저래 두 번 떨어지고 일곱 번, 그것도 힘겹게 힘겹게 당선되면서 그런 생각 아예 접었지요. 남한토박이도 아니었고, 또 선거구에 자주 내려가 돌볼 겨를이 없었어요. 서울에서 할 일이 많았거든요. 외교 분야, 재경 분야 일도 열심히 하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는 대통령이 되기 힘들어요. 오로지 대권 잡을 생각만 하고 그쪽으로만 머리를 써야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지요."
◆정치는 운명이다
―장면 총리 이후 가까이서 함께 한 역대 대통령 중 누구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주시겠습니까.
"(5·16 혁명 후 내가 공화당으로 갈아탔으니) 장면 박사한테는 할 말이 없죠. 그 어른의 경륜과 포부로 봐서 훌륭한 총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내각책임제의 운명이란 게 국회의원들 자질에 달려 있단 말이죠. 한데 민주당이 신·구파로 나뉘어 싸우는 바람에 장 총리가 좋은 일을 못했어요. 그 또한 리더십의 문제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애증이 교차할 듯합니다.
"혁명 나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데 혁명주체세력 중 하나인 홍종철이가 한밤중에 육군형무소를 찾아왔어요. '나가자!' 하더니 지프에 태워서는 장충동으로 갔지요. 그 자리에 박정희 소장이 있어요. 일단 '감옥에서 나오게 해줬으니 감사합니다만, 노모를 모시고 있는 몸이라 먼저 인사를 드리고 다시 오겠다' 했지요."
―그로부터 2년 뒤 공화당 창당 발기모임에 참여하고, 박 대통령의 삼선개헌을 성사시키는 데 일조합니다.
"삼선개헌 당시 내가 공화당 대변인이었어요. 공화당 안에서도 찬성패, 반대패로 갈려 시끄러웠죠. 어느 저녁에 대통령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어요. 좋은 술안주가 있으니 오라고 해요. 서로 술을 어지간히 먹었는데 대통령이 내게 말합니다. '내 한 번만 더 하고 종필이한테 물려줄 테니 봐 주십시오.' 그래서 '참말로 한 번밖에 안 하겠습니까?' 했더니 '다시 하면 성을 갈겠습니다' 그래요. 그 다짐을 받으니 큰 짐을 내려놓은 듯했지요. 이튿날부터 개헌 작업에 들어갔어요. 언론을 설득하고, 반대하는 분들과 성의껏 대담도 하면서 큰소리 없이 삼선개헌을 이뤄냈어요."
―그런데 유신을 단행했습니다. 그로 인해 김재순의 정치인생도 나락의 길로 떨어졌지요.
"내가 덜렁덜렁한 정치인도 아니고, 매사에 시리어스(serious)하게 사는 사람인데, 우리한테는 한마디도 없이 유신을 한 거예요. 마지막 당무회의장에서 내가 벼락을 쳤지요. 박정희 그릇이 고것밖에 안 되나 소리소리 질렀지요. 평안도 놈 기질이 나온 거예요.(웃음)"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날 새벽 네시쯤 미국에 있던 우리 큰 놈이 국제전화를 걸어서는, '박정희가 죽었어요?' 하고 물어요. '이놈아 술 먹었냐, 전화 끊으라우!' 했지요. 그런데 10분, 20분 지나니까 각 신문사 기자들한테 전화가 걸려와요. '대통령 유고입니다' 하면서. 난들 몸을 가눌 수가 있겠어요? 유신 직후 쓰러져서 담배도 모두 끊고 살았는데, 마누라한테 담배 남아 있는 것 좀 찾아달라 했지요. 어디서 시가(cigar) 한 박스가 나와요. 그때부터 이걸 피우게 된 거예요."
◆김종필의 회혼
―박 대통령의 지도자적 자질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나랏일을 자기 일처럼 성실하고 책임있게,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가야 할 길에 전력투구한 양반이에요. 거기에 대해선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어요."
―'영원한 이인자'로 불리는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의 우정이 각별하셨다던데요.
"5·16혁명 직후 생업을 위해 영화를 두 편 제작했다 어그러진 적이 있는데, 그때 김종필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 인연으로 가끔 만나 밤을 새워가며 정치와 역사에 대한 토론을 했지요. 실은 삼선개헌 때도 청와대 들어가기 전 JP를 찾아갔어요. 내게도 반대하는 마음이 있어서 JP가 단연코 개헌을 반대하면 그 뜻을 따르려고 했어요. 그런데 JP가 예스다, 노다 대답을 안 했어요.… 지난번 김종필 내외가 회혼을 맞았다고 신문에 났길래 좋은 꽃 하나 사서 청구동에 갔어요.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어 보였지만 손이 굳어 있어요. 안쓰러워서 그 손을 만져주는데 마음이 참…."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이른바 진보세력의 집권시기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극히 유감이지요. 김영삼 때 무너진 경제를 김대중이 다시 일으켜주길 기대했어요. 영삼이와 달라 경제에 대한 생각이나 지식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찌 된 게 나라 사정은 더욱 기울어만 가고, 개인 인기를 위해 이북과 작당하고 적잖은 돈을 보내는 걸 보고 실망했지요. 노무현은 말할 가치도 없어요. 민주주의 선거의 제일 약점을 타고 대통령이 된 사람이에요."
―이명박 정부가 집권 말기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정치에서 제일 중요한 게 사람을 쓰는 겁니다. 이명박씨가 대견하지만, 자라난 바탕이 정치가 아니라 누가 누군지 몰라요. 뭐가 막힌다 싶으면 그건 사람을 잘못 써서 그런 거예요. 실업계에서만 살아서, 장사꾼의 한계인 거지. 그러니까 협잡꾼, 사기꾼들에 휘둘려요. 안타깝지요."
―정가의 원로이시니 최근 불어닥친 '안철수 돌풍'에 대한 단상이 있으실 줄로 압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니 뭐라 말할 순 없지만, 기성 정치인, 기성 정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말해주는 반사적 현상인 것은 분명하지요. 지금의 우리 정치력이 아귀다툼의 세계사적 물결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을 뒤받쳐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울 뿐입니다."
◆시인을 사랑한 정치인
―작가 한운사는 생전에 친구 김재순에 대해 '골프를 치면서도 명시 명구를 줄줄 외우는 로맨티스트'라고 했습니다.
"로맨틱하다는 말을 내가 부인하지 않아요.(웃음) 그게 젊음의 활기니까요."
―소월의 '초혼'을 왜 그리 좋아하십니까.
"일제시대 한국 젊은이들끼리 모이면 내 18번이 그거였어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줄줄 외웠더랬지요."
―시를 왜 좋아하십니까.
"현실을 떠나 자기가 염원하는 이상(理想)으로 갈 수 있으니까. 세탁될 대로 세탁된 그 깨끗한 언어들이 좋아요. 영문학자였던 피천득 선생이 황진이의 시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보다 낫다고 칭송했어요. 그 어른 가장 좋아하신 시가 이거예요.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밑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운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행복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자기가 하는 일에 있지요."
―청년실업에 갇힌 젊은이들에겐 행복을 만끽할 '일'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었던 세대가 있었나요? 한국 사람 치고 젊거나 늙었거나 고생 안 하고 살아온 사람이 있을까요? 오히려 고통 없이 지나온 사람이 있다면 좀 모자란 인생들이죠. 시련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일이 젊은이들이 할 일이에요."
―피천득 선생과의 좌담을 채록한 '대화'라는 책에 보니 '정치는 운명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셨더군요.
"내 덕이 부족함을 새삼 느낍니다. 당의 시인 백거이가 말했지요. 달팽이뿔 위처럼 작은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가. 부싯돌 불꽃 같은 인생에 이 몸 맡겼을 뿐인데, 부(富)하면 부한 대로 빈(貧)하면 빈한 대로 인생을 즐기는 것이리라. 입 열어 크게 웃지 못하는 자는 정녕 어리석나니."
―구십을 바라보는 연세입니다.
"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겠지요. 숨을 못 쉬면 죽었다 하겠지요. 하지만 죽은 자도 형태를 달리해서 살아 있는 것 아닐까요. 죽었다고 죄지은 사람의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사랑했던 연인과의 추억이 소멸하는 게 아니니까. … 그런데, 난, 더 살고 싶어요. 조금만 더 살아서 우리 저 명민하고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모습 꼭 보고 싶어요. "
"조만식·장면·장리욱·피천득… 내 운명을 만든 사람들"
"결국은 사람입니다." 김재순은 "사람과의 만남이 곧 운명"이라고 말했다. 그 자신의 정치인생 또한 그렇게 운명지어졌다.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토성리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세상을 향해 큰 꿈을 갖게 된 건 조만식 선생을 만나면서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 아들 교육을 위해 어머니가 평양 비단공장에 취직해 이사를 왔는데 그 바로 옆집이 조만식 선생 집이었어요. 그 집 아들과 친구여서 자주 놀러 갔는데,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조만식 선생이 내 머릴 쓰다듬으면서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세계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거라,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어요."
집안 형편으로 평양고보 대신 평양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한 김재순은 같은 학교 5학년에 다니던 황장엽을 만난다. "전교생이 모란봉을 견학하고 왔는데 교장이 내 이름을 부르며 박물관 견학 소감을 말하래요. 그래서 '아, 슬프도다, 흥했던 고구려는 황폐해지고, 남은 것은 기왓장과 화살뿐이구나' 했더니 교장이 달려와 발길질을 해요. 며칠 뒤 황장엽이 지나가다 나를 알은체하며 '재순아, 공부 잘하거라' 하며 용기를 주더군요."
- ▲ 문학을 사랑했던 김재순은 당대의 문필들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왼쪽부터 법정스님, 시인 피천득, 김재순 전 국회의장, 소설가 최인호. 2003년 봄, 샘터가 지령 400호를 발간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 샘터 제공
그의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열어준 장면·조병옥·백낙준 등을 만난 건,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흥사단에 입단하면서다. 시인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주요한과는 국제문제연구소를 열어 주요신문에 사설 쓰는 일을 했다. 그가 평생의 스승으로 여기는 장리욱 전 서울대 총장도 흥사단에서 만났다. "지혜로운 사람은 한 눈 뜨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뜬 눈으로는 현실을 보고, 감은 눈으로는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 되라 하셨지요."
70년 월간 '샘터'를 창간하면서는 젊은 문인들과 교류했다. "김승옥, 최인호, 염무웅, 강은교, 오증자 같은 이들, 문학지망생들이 들끓었지요. 성철스님 인터뷰했던 정채봉은 한번 사표를 냈길래 '나 죽으면 내 관의 한쪽 귀퉁이를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통을 쳤었죠. 그러더니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가장 사랑한 문화인은 길옥윤(본명 최치정)이었다. 소학교 친구였던 길옥윤의 장례식에서 그가 조사를 낭독했다. "학예회는 치정이 판이었어요. 하모니카 두 개를 가지고 아래위로 부는데 대단했지요. 나중에 경성치전(서울대 치대의 전신)에 갔길래 '너 왜 치과대학을 갔니?' 하니까 거기 브라스밴드가 있어서 갔대요." 김재순은 재즈의 매력을 길옥윤 덕분에 터득했다고 추억한다. "치정이가 재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길래 '잡놈들 음악 아니냐' 했더니 '좋은 그림 들여다보듯 재즈를 자꾸 들어보라고, 그러면 참 맛을 알게 되지' 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