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국 정치평론가, 정치학박사
"5~10년이면 세상을 싹 바꿀 수 있다." 박원순의 원래 발언은 "서울시정은 굉장히 방대하고 복잡하지만 일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손을 대지 않아도 되기에 충분히 조정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활용하면 5~10년이면 세상을 싹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그러나 그의 진의가 무엇이었든 이 발언은 박원순이 갖고 있는 진보적 이미지를 강화해 보수층의 반발과 중간층의 이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시민운동가로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이런 발언이 선거를 치를 정치인에게는 매우 부담 많은 발언이 된다는 데 정치의 어려움이 있다. 정치는 승부고, 승부는 바로 이 같은 실낱같은 허점에서 결정되는 법이다.초토화된 곳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당안철수·박원순 돌풍을 보면서 박근혜 대세론을 다시 생각한다. 안철수 돌풍은 거셌지만 박근혜 대세론은 그보다 더 견고했다. 안철수 돌풍은 민주당과 야권을 휩쓸었지만 박근혜 지지자들을 흔들지는 못했다. 안철수 돌풍은 안철수의 폭발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박근혜 대세의 강력함도 보여 주었다. 야권이 안철수 이후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안철수 돌풍으로 초토화된 곳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에는 돌풍을 막아낼 박근혜와 같은 강력한 리더십이 없었다. 안철수 돌풍은 민주당을 초토화시켰지만 문재인은 비껴갔다. 아직 문재인이 정치 시장에 정식 출시되지 않았던 때문이다.안철수 돌풍은 런칭을 앞둔 문재인에게 약이 될 수도 있다. 안철수는 문재인의 선의의 라이벌이 될 수도 있고, 좋은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안철수가 총선, 대선으로 이어지는 숨가쁜 오르막 정국에서 움직이지 않을 때 문재인은 그 공백을 메울 유일대안으로 급부상할 수도 있다. 문재인이 행보에 점차 속도를 붙여가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일리 있고 의미 있다.'87년 체제라 불리는 지금의 정치체제가 생명을 다했음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안철수 돌풍은 이미 생명을 다한 낡은 정치 질서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던 타성에 젖은 정치권에 보내는 '피니쉬 블로'다. 안철수 돌풍의 충격파가 큰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충격파가 커도 '피니쉬 블로'는 피니쉬 블로일 뿐 새로운 시작을 여는 출발점은 아니다. 새 정치, 새 질서를 만들어 가는 문제는 차원을 달리해 접근해야 한다.박근혜 대세가 안철수 돌풍을 버텨낸 것은 박근혜가 보수의 재구조화를 통해 새로운 보수정치, 보수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박근혜 지지자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박근혜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군중으로 매도해선 안된다. 이들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것은 그들 나름의 합리적 근거와 가치지향적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지지자, 안철수 지지자들이 그렇듯이.민주당에서 새 정치, 새 질서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손학규와 민주당이 안철수 돌풍에 힘없이 쓰러진 것은 야권의 지지자들이 손학규와 민주당에서 새 정치, 새 질서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주당과 손학규를 외면한 야권 지지자들을 비난해서도 안된다. 그들 또한 자신들이 희망하는 새로운 가치를 찾아 행동하고 있는 것이므로.안철수는 새 질서의 청사진과 새 정치를 실현할 의지와 힘을 갖고 있는가. 안철수가 서울시장 선거를 접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것은 이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을 준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안철수의 양보로 안철수와 2인3각의 파트너십을 구축한 박원순이 지금 국민들과 서울시민들에게 응답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안철수·박원순은 새 정치, 새 질서의 비전을 갖고 있는가? 10·26 선거를 통해 이에 대한 해답을 듣게 되기를 기대한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