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유학 시절에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생들로 그의 영향을 받았던 조선인 유학생들 중에 몇몇이 모여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하였다. 1927년 1월이었다. 그들은 매주 모임을 가지고 성서를 함께 공부하며 조국 조선의 희망을 성서 속에서 찾으려 하였다. 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일본을 성서위에’ 세우는 운동에 인생을 걸었듯이 그들은 조선의 미래를 성서의 진리 안에서 열어 나가고자 성서조선 운동을 펼치기로 다짐하였다. 그래서 그 해 7월부터‘성서조선’이란 제호로 동인지를 출간하기 시작하였다. 그 모임의 좌장격이었던 김교신(金敎臣) 선생이 창간호에 창간사(創刊辭)를 섰다. 그 글에서 김교신 선생은 다음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의 조선에 줄 바 가장 귀한 선물은 신기하지도 않은 ‘구약성서’ ‘신약성서’ 1권이 있는 줄 알 뿐이다. 그러므로 걱정을 같이하고 한 곳에 소망을 두는 어리석은 5, 6인이 동경 시외에 있는 스기나미 촌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지고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였다. 매주 때를 기하여 조선을 생각하고 ‘성서’를 공부하면서 지내온 지 반년 남짓하여, 누군가가 동의하여 그간의 소원이던 연구의 일단을 세상에 공개코자 하여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고 하게 되었다.” 이 글을 쓰던 때의 그의 나이 불과 26세 되던 때였다. 1901년 3월에 태어난 김교신은 18세였던 1919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음 해에 노방전도를 받아 크리스천이 되어 세례를 받은 후로 7년간 우찌무라 간조가 이끄는 성서공부반에서 청강하였다. 1927년 동경사범학교 지리과를 졸업하던 해에 함석헌, 송두용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발간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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