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은 자유당의 장기독재로 민중의 불만이 폭발되어 야기된 정치혁명이었다.
1960년 3월 15일 자유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1) 40%
사전투표 2) 야당 참관인 축출 3) 대리투표 4)
투표함 바꿔치기 5) 대통령, 부통령 득표수 조작발표 등으로 부정선거를 획책하였는데 이는 자유당과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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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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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가 진행되는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발생하여 7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학생의 시체가 떠올랐다. 학생은 마산상고에 입학시험을 치르러 남원에서 온
김주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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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거와 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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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의 처참한 시체가 발견되자 마산시민들의 성난 데모가 연일 계속되었고 경찰서는 화염에 쌓였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구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 후 학교로 돌아가던 중 종로 4가에서 이정재, 임화수의 조직깡패와 반공청년단으로부터 쇠망치 등
둔기로 습격당하여 1명이 사망하고 4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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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 고대생 습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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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4월 19일 서울의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1인 독재 물러가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를 시작으로 서울 중심가에서는 총소리와 함께 피를 흘리는 학생, 시민이 늘어갔고 1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전국적으로 사망 186명, 부상자 6,000여명이나 되었다.
자유당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성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는 계속되었고 드디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하야를 발표하고 부통령 당선자인 이기붕 일가는 자살하고 말았다.
자유당의 독재정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양이 총에 맞아 죽기 4시간 전에 어머니에게 쓴 유서같은 편지>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 지금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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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당시 수송국민학교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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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의 글>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면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 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 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그리고 25일고 26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