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희
개인전
공화랑
2005.3.9(수)▶2005.3.15(화)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23-2 |
전화: 02-735-9938
■ 그려질 수 없어 그린 그림
■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교수)
기억 속에 간직된 그림 하나를 우연히
마주했다. 어디서였더라. 전시장에서였을 것이다. 아니면 도록에서 보았을까? 아침시간에 작업실 바닥에 펼쳐진 제법 커다란 그림과 작은 종이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장지에 천연색과 먹 등으로 그려진 성경희의 그림은 이른바 목저론적 그리기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 그것이 첫인상이다. 무성을
그리고자 하는 의도를 찾을 수 없는 그림, 그렇다고 모든 표현을 억제하고 지워나간 것만은 아닌 그런 모순적이며 당혹스러운 그림이다. 그린 듯
그리지 않은 듯, 그리려는 욕망을 무의식중에 드러내다가 돌연 감춰버린 듯, 혹은 침묵과 표현의 자기부정 속에서 밖에는 그려질 수 없는 것,
그러니까 말할 수 없고 말로 드러낼 수 없지만 그 말을 빌리자 않고는 도저히 건네질 수 없는 말 같은 것이 연상되는 그림이다. 그것은 모든
표현의 불구성에 대한 자조아 희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무심하게죽죽 그어놓은 붓질, 그러니까
무작위적인 붓질과 그렇게 형성된 선이 차곡차곡 쌓여있고 흐르고 있다. 마치 마당을 빗질하듯이, 대지에 풀들이 자라듯이 맑은 유리창을 닦듯이
붓질들이 지나간 위로 아주 가볍고 소박한 몸놀림이, 소풍 오듯 왔다 간 흔적들이 그대로 그림이 되어 있다. 매화꽃, 화분, 풀, 비, 구름가
작은 나무, 집가 자동차 같은 형상들이 슬쩍 슬쩍 내려앉은 화면에 작가가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고 그것들의 본질로 겨냥되어 추려낸 기호들로
다가온다. 그 기호나 부호 같은 것들이 화면 이곳 저곳에 비처럼 내려앉아 멈춰있다.
짤막한 사선과 원형으로뭉개놓은 자취,
숫자와 사인, 물감이 튕켜진 자국 등이 어눌하고소박하며 천진난만한 마음의 희롱을 그리면서 유유자적하는 풍경을 즐겁게 연상시킨다. 이런
붓놀림만으로도 그림은 풍성하고 매력적이다. 동양화뿐만 아니라 한국 작가들 대부분의 작업은 이 서체적 필치나 붓질에 매료되어 있다.
바탕은 중성적인 색채들로 바다를
이루었다. 감물이나 오리열매로 칠해지거나 흐릿한 블루 톤으로 적셔진 화면은 그 자체로 무심하며 담백해 청정한 풍경을 하늘처럼 선사한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같고 깨끗한 수면을 내려다보는 것도 같다. 수 없는 붓질의 궤적이 층층이 쌓여 흐르고 그렇게 붓이
겹치고 지나간 길들이 모여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잘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있는 수없는 많은 시간과 길의 노고가 침잠되어 있다.
미묘한 얼룩, 감각적인 뉘앙스를
머금고 마치 선화처럼 어떤 정신의 경지를 순간 창백하게 비추는 듯한 그림 앞에서 시선들은 자꾸 길을 잃는다. 다리를 헛디딘다. 꽃인가 하면
나뭇가지들이나 줄기가 흔들리고어떤 풍경이 연상되다가 아내 그저새발자국 마냥 쿡쿡 찍어놓은 붓 자국과 물감이 잠시 머물고 응고된 자취만이 눈에
들어온다. 무엇인가를 기대했다가 여지없이 낙담한다. 실마리를 찾을까 해서 제목을 보면 무명이라 적혀있다. 이름이 없다기보다는 이름 지울 수없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의 그림을 어떻게 보고 무엇을 읽을까?
그림 안에서 무엇을 보고자 하는
고나자의 욕망, 의미나 주제를 심고자하는 화가의 욕망, 거창한 이론이나 의미부여를 해내고 싶은 평자의 욕망 등을 일순 무력하게 만드는 이 그림은
그림에서 힘을 빼고 사물과 세상을 보는 눈을 청정하게 만들고 모든 의미부여의 권력을 덧없게 만드는 듯 하다. 다분히 동양화를 지탱하는 사유의
축인 무의자연이나 도가적인 분위기 혹으 ㄴ선종의 형식적 제스처 또한 연상된다. 이런 유형이 그림들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그런 그림들이
보여주는 유형화된 틀이나 반복되는 조형어법의 빈곤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과제일 것이다.
성경희의 그림은 동양화의 유장한
전통에 젖줄을대면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현실 속 자신의 삶의 체험과단상에서 그림을 추려 내고 있다. 여전히 작가는 자신이 바라보고 느끼고 이해한
모든 것들의본질로 육박해 들어가 그 무심하고 허정한 상을 그려낸다. 아니 추출하고자 한다. 작가의 그림은 일견 모순적이다. 모든 표현을 덧없게
만들면서도 그 덧없음을 표시하기 위해, 자기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부득이 몇 가지 기호나 장치에 의존하면서 그 표현을 하고 있다. 벗어날 수
없다. 그 두개의 경계는 선명하지 않다.
작가의그림은 매일 자신의 마음을
비추고 그 마음읨 여정을 드러내는 독백 같다. 그것은 정신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수행과도 일치한다. 그런 과정으로서의 그리기가 작가의 그림이고 이
작가에게 있어 그림의 본질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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