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워털루 전투

鶴山 徐 仁 2006. 6. 18. 20:56
[1815년] 나폴레옹,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도주하는 나폴레옹 군대.

1814년 3월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유럽 연합군에 패해 엘바섬으로 유배됐된 나폴레옹이 1815년 3월 엘바섬을 탈출하고 황제에 즉위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연합군과 나폴레옹이 벨기에의 워털루에 진을 쳤다. 영국군 9만 5천명과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 12만 명 등 모두 20여만명이 넘는 연합군을 영국의 웰링턴이 지휘했다. 이에 맞선 나폴레옹군도 12만 5천명에 달했다.
워털루에 집결하기 전 웰링턴은 북쪽으로부터 진군해 왔고, 프로이센 군대를 지휘하는 블뤼허는 측면을 보조하며 웰링턴과의 합세를 시도했다. 라인강에는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첸베르크가 그리고 러시아 연대들이 예비군대로서 독일영토를 가로질러 프랑스로 진군해 왔다. 이들이 모두 집결하기 전 이들을 분열시켜야 했던 나폴레옹은 서둘러 벨기에 국경을 넘었다. 6월 16일 프로이센 군대의 일부를 격퇴시킨 나폴레옹은 17일 워털루로 진군했다.
6월 18일 나폴레옹은 휘하의 평범한 그루쉬 장군에게 프로이센 군대를 추격하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워털루에서 기다리고 있던 웰링턴을 공격했다. 1만명의 희생자를 내며 네 번이나 공격했으나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루쉬가 쫒았던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대는 그루쉬를 따돌리고 워털루로 무사히 집결, 웰링턴과 합류하고 나폴레옹을 기다렸다. 프로이센 군대가 다가온 것도 모른 채 내려진 나폴레옹의 공격 명령으로 결국 나폴레옹군은 전투에서 패했다.
나폴레옹은 항복해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됐고 그곳에서 죽었다. 워털루 전투는 유럽 역사의 한 분수령이었다. 나폴레옹의 패배로 유럽에는 이른바 빈체제가 성립했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체제는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군주제를 옹호하는 완고한 복고체제를 유럽 전역에 다시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鶴山 ;

중학생 시절,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었을 때, 나도 무엇이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정했다면 철저한 계획을 세운 후 도전을 한다면 반드시 성취 할 수가 있다는 자신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당시 프랑스의 정통 보수세력의 귀족신분과는 거리가 먼 콜시카에서 출생하였으며, 외모도 작달막한 키에 별로 볼 품도 없었지만, 오직 강한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꿈을 향해 과감하게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도전을 멈추지 않은 결과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까지 올랐던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