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삼각산

鶴山 徐 仁 2006. 1. 15. 17:19





삼각산은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의 경계에 위치한다. 서울 기점에서 불과 10㎞ 지점에 있다. 삼각산 중 핵심을 이루는 백운봉의 지리적 위치는 북위 37°30′57″, 동경 126°13′03″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 1-1번지에 속한다.

서울시 강북구, 도봉구, 은평구, 종로구, 성북구, 고양시, 양주시 등에 걸쳐 발달하고 있는 북한산은 1983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은 거대한 화강암 체로서 많은 봉우리들로 형성되어 있으며, 백운봉를 정점으로 하여 인수봉, 만경봉, 노적봉, 보현봉, 비봉, 원효봉 등의 봉우리가 이어져 있다.

최고봉인 백운봉 (836.5m)를 비롯하여 인수봉(810.5m), 만경봉(799.5m)를 일컬어 삼각산이라고 한다. 삼각산은 북한산을 멀리서 볼 때 세 개의 높은 암봉(岩峯)이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는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 선인들은 삼각산을 천하의 명승으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고려시대 오순 이란 자는‘공중에 높이 솟은 세 송이의 푸른 연꽃’ 과 같은 곳으로 찬미했고, 이존오란 이는 ‘세 송이의 기이한 봉우리가 멀리 하늘에 닿았고’ 라고 표현하였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색은 ‘세 봉우리 깎아 내민 것이 아득한 태고적부터...’ 라고 적고 있으며,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끌려가면서 남긴 김상헌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는 유명한 싯귀가 되었다.

조선후기 문인 홍세태는 ‘우뚝 솟은 기이한 형상 몇만 겹인고, 구름 속에 솟아 나온 연꽃 같구나’ 라고 적고 있다. 강원도 백두대간으로부터 갈라져 서남 방향으로 굽이쳐 흐르는 한북정맥이 경기도 양주시 남쪽에 도봉산을 솟구친 후 잠시 우이령에서 숨을 죽였다가 서울 북방에 이르러 마지막 힘을 다하여 세차게 솟구친 산이 삼각산이다.

서울시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은평구와 경기도 일대 고양시 경계에 있는 높이 836.5m의 산으로 수도 서울의 진산(鎭山)이며종산(宗山)으로 알려져 있다. 삼각산은 일명 부아악 (負兒岳), 화산(華山), 중악(中岳), 귀봉으로도 불린다.

화강암으로 된 삼각산은 최고봉인 백운봉를 비롯해 인수봉, 만경대(일명 국망봉)의 세 봉우리가 양주땅을 바라보며 마치 세뿔처럼솟아있다 하여 삼각산이라고 하였다. 부아악이란 인수봉의 모습이 어린아이를 없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부른 이름이라고 한다.

북한산이란 한성,한강의 북쪽을 뜻하는 이름이며, 중악이라 한 것은 조선초기의 학자 양성지(梁誠之)가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 지리산을 남악, 장백산을 북악, 그리고 삼각산을중악으로 삼자는 진언을 했기 때문이다. 화산은 대개 도읍지의 진산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며, 귀봉이란, 백운봉와 인수봉이 우이동에서 바라보면 소의 귀처럼 생겼기 때문에 부르게된 이름이다.

삼각산의 국망봉은 무학대사가 한양의 도읍지를 살폈다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 오르면 세상의 온갖 경치를 구경할 수 있으므로 만경대라 불렀다. 삼각산에는 불교식 이름이붙은 보현봉, 문수봉, 원효봉이 있으며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비봉, 노적가리의 전설을 지닌노적봉 등 빼어난 봉우리들이 제각각 기세를 올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삼각산과 연관되는 가장 최초의 기록인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18년경에 고구려 시조인동명성왕의 아들 온조와 비류가 남쪽에 새나라(백제)를 건국코자 내려와 지금의 한강 이북지역을 도읍으로 물색코자 부아악(북한산)에 올랐다고 하며, 백제의 개루왕이 서기 132년 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후, 고구려 장수왕 때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게 되고 백제 26대 성왕이신라 진흥왕과 손을 잡고 잃어버렸던 한강유역과 북한산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지만 다시 2년뒤 신라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만다.

삼국시대에는 전략요충지인 북한산을 서로 차지하려는구경싸움이 끊이질 않아 서기 555년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巡狩碑)를 비봉에 세우고, 557년 한강 이북 지역에 행정구역인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신라시대의 명승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북한산에 들어와 수도를 하여 원효봉과 의상봉이라는 지명을 남겼으며, 원효대사가 상운사와 삼천사를 창건하였다. 이어 승가사와 도선사가 창건되었다.

북한산에 출입한 가장 오래된 사람은 원효로 보인다. 북한산에는 원효가 참선 수도했다는 덕암사와 원효암이 있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불교공부하고 돌아온 의상을 불러 의상봉에 있는 석굴에 안내하고 원효는 원효봉에서 의상은 의상봉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참선했다고 한다. 원효는 이외에도 북한산성안에 있는 상운사와 삼천계곡의 삼천사도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이 중흥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고려 8대 현종(顯宗)이 북한산에서 승려생활을 할 때, 진관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로 봉하고 1011년 진관사를 건하였으며, 거란족이 침입하였을 때 북한산성 계곡 중흥동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고려 예종 1109년 탄연(坦然)이 문수사를 세웠다. 고려 말 우왕 1388년 최영장군은 중흥성 (북한산성의 전신)을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킨 바 있으며,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가 중흥사를 중건하고 그 옆에 태고암을 지었다. 이태조는 조선 왕조를 이룩한 후 한양을 노래하면서 삼각산을 빼놓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뚝 은 높은 뫼는 하늘까지 솟았네.

한양의 지세는 하늘을 열어 이룩한 땅

굳건한 큰 대륙은 삼각산을 떠받쳤고

넓은 바다 긴긴 강물은 오대산에서 흐르네

 

조선 건국 초에 무학대사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삼기 위해 삼각산을 답사하였으며,수양대군(세조)이 천문관측을 위해 보현봉에 올랐고 많은 신하와 선비, 승려들이 풍수지리,학문정진,수도를 위해 삼각산에 출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도 한양이 점령당하고 왕이 멀리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된 이후 북한산성 축조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에 대한 오랜 찬반양론 끝에 숙종이 1711년 전란시 피난처 및 방어지로 삼기 위해 단 6개월만에 7,620보(步), 약8.5 ㎞에 이르는 오늘의 북한산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북한산성의 외성으로 1713년 탕춘대성을 축조하기 시작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의견이 많아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숙종 이후 북한산성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이 약화되어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방치와 전란시의 화재, 자연재해 등으로 성곽을 비롯한 주요시설, 사찰들이 크게 훼손되었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이들 가운데 젊고 총명한 사람들을 다시 추려서 승가사, 진관사등지에 보내 계속 글을 읽게 하고 학사들이 깊은 산사에서 마음놓고 공부에 정진할 수 있도록 철 따라 식찬까지 몸소 챙겼다고 전해진다. 조선7대조 임금인 세조도 삼각산을 좋아하여 특히 보현봉에 즐겨 올랐다 한다.

삼각산에는 무학대사와 도선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 무학에게 새로운 도읍지를찾아보도록 했다. 그는 우선 백운봉에 올라 지세를 살핀 후 지금의 비봉 능선으로 들어섰다.

한 바위 봉우리에 문득 비석하나가 있어 읽어보니 ‘무학오심도차 (無學誤尋到)’... 즉 무학이 맥을 잘못짚어 여기에 온다 라는 뜻이 새겨져 있었다. 도선이 세운 것이었다. 깜짝 놀라 돌아서서 보현봉에서 정남쪽 형제봉 능선을 타고 결국 북악산에 이르게 된다. 그 다음에 궁궐터를 잡는데 또 도선에게 수모를 당한다.

무학이 궁궐터를 잡기 위해 오늘날의 왕십리 부근에 이르러 지세를 살피고 있는데 한 농부가 밭을 갈며 소에게 꾸짖는다. “원, 너 미련하기가 마치 무학 같구나 어째서 바른 곳을 버리고 굽은 쪽으로만 가느냐” 이 말을 듣고 무학이 농부에게 도읍 할 곳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여기서 십리만 더 가 보시오”그곳에서 십리를 더 가니 과연 궁궐터로 아주 적절한 명당자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지금의 경복궁 자리이다. 무학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그 농부를 찾아가니 농부는 온데 간데 없고 절을 하나 발견하는데 법당 안의 초상화가 자기에게 ‘왕. 십리 하라’ 고 가르쳐준 그 농부였다. 주지에게 누구냐고 물어보니 신라말기에 도선 대사라는 것이었다. 숙종 때의 성호 이익은 산성이 축조되기 4년 전 1박2일 코스로 삼각산에 올라 “유삼각산기”를 남겼다.

북한산성 축조는 숙종 37년 4월에 착공하여 10월에 끝냈다. 추사 김정희는 순조 17년 비봉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를 처음으로 판독했다.

그전에는 그저 오래된 비석 하나가 산봉우리에 전해오고 있거니 했을 뿐이었다. 인수봉에 처음 인간이 올라선 것은 1926년 경성주재 영국 총영사관의 부영사 C.H 아처와 일본인 하야시가 자일 등 근대적 등반장비를 갖추고 등반했다.

오늘날 서울의 시민들이 편안하게 오르고 있는 백운봉 쇠난간은 1927년 3월에 설치됐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헌병대가 주둔하여, 의병과 독립군이 삼각산을 거점으로 삼을 것을 우려하여 북한산성내 대부분의 시설과 사찰을 불태웠다고 하며, 1927년 백운봉에 쇠난간을 설치하고 철심을 박아 민족정기를 훼손하려 했다.

철심은 1980년대에 모두 철거되었다. 북한산 백운봉 정상에는 독립운동 정신이 각인 되어 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백운봉 최정상 바닥 암반에 3.1독립운동의 정신, 민족의 얼이 69자로 새겨져 있다. 『독립선언서는 기미년 2월10일에 육당 최남선이 썼고 3월1일 탑골공원의 독립선언만세는 정재용이 도창했다.』는 내용이다.

네 귀퉁이에는 경천애인, 즉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네 글?美? 좀더 큰 글씨로 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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