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치 라이벌과 시정 주거니 받거니
다산이 쓴 발문을 보면, 다산이 전남 강진에 유배 중이던 1814년(순조 14년) 만들었고, 본래는 12편씩 주고 받아 모두 24편이었다. 4편이 사라져 20편만 전하는 것이다. 시첩의 글씨는 모두 다산의 친필이다. 이 시집은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내 장서각(관장 정순우.얼굴사진) 수장고에 묻혀 있었다. 장서각이 20여년 전 서지학자 고 안춘근 선생으로부터 구입한 자료의 일부다. 이후 잊혀졌던 것을 정 관장이 찾아내 연구원 학술지 '장서각'14호에 공개했다. 정 관장은 "다산의 친필임은 몇 차례 고증을 통해 확인했다. 다산의 발문은 상당 부분 훼손돼 해독이 어렵지만 다행히 고 안춘근 선생이 소장할 때 옮겨 적은 글이 붙어 있어 이해에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 당파 싸움 속 '관용의 교류'=다산과 문산 두 사람은 당파 싸움이 심한 시절을 살았다. 다산은 남인 계열이고 문산은 노론에 속한다. 집권 세력이던 노론은 주자학의 정통을 고수하려 했고, 남인 세력은 주자학의 한계를 비판했다. '맹자'에 나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해석을 놓고 양인이 벌인 논쟁은 유명하다. 자구 하나의 해석을 두고도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이 시첩은 이데올로기를 달리하는 학문적.정치적 라이벌의 공동 작품집인 셈이다. 당시 문산은 전남 영암에 와 있었다. 영암 군수로 임명된 아들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강진의 다산 거처를 방문해 학술 논쟁을 벌이는 동시에 시정을 주고 받았던 것이다. 정 관장은 "당파간 대립이 극심했던 시절 타인의 세계를 상호 존중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실현했다"고 풀이했다. 이데올로기가 다른 두 학자이자 정치인이 갈등을 겪으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관용의 교류'라고 할 수 있겠다. ◆ 시정 이중주=시첩에 나오는 20편 모두 오언시(五言詩)다. 두 사람은 모두 둘째 구와 넷째 구의 끝 글자를 같은 한자를 써서 시를 지었다. 시의 내용은 소나무.연꽃.물고기.샘물.꽃.등나무.돛단배.매화나무.돌절구.대나무 등이다. 다산의 거처 주위에 있는 사물과 경치를 읊으면서 정신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같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는 '시정 이중주'인 셈이다. 다산은 소나무 옆 하얀 돌 위에 앉아 거문고를 타거나 사색을 하며 유배 생활의 설움을 달랬는가 보다. 다산은 "소나무 단에 하얀 돌 평상은/바로 나의 거문고 타는 곳/산객이 거문고는 걸어두고 가버렸지만/바람이 불면 절로 소리를 내네"라고 노래했다. 그러자 문산이 "외로운 소나무가 절개를 안 고치니/은둔자가 이리 저리 노니는 곳 되었지/그 곁에는 작은 단이 하나 있으니/이 맘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랴"라고 화답한다. 문산의 시에서 은둔자는 다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홀로 우는 거문고를 이야기 하자 문산이 마음 전할 이 없는 은둔자의 고통을 달래는 듯 하다. 정 관장은 "이번 시편들에선 다산이 많이 썼던 울분에 찬 사회시나 농민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깊이있고 고아하며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했다. 다산의 둘째 아들 학포(學圃.1786~1855)가 그린 접화도(蝶花圖.나비와 꽃 그림)가 시첩에 함께 실려 있다. 시첩 표지엔 '상심낙사첩(賞心樂事帖)'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안춘근 선생이 시첩을 입수해 장정할 때 지은 것 같다"고 추정했다. 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
2006.01.04 07:28 입력 / 2006.01.04 07:33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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