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회화과 졸업
개인전 11회
제19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전(상.파울루,브라질)
레알리떼.서울전(아르.코스모 화랑)
한국현대미술전(멕시코 현대미술관)
'90새로운 정신전(금호미술관)
"New Image,New Age"전(미건화랑)
"한국 현대 미술의 단면"전(표화랑)
"바라보기"전(인데코화랑)
숨겨진 고요한 독백의 공간에서....
글.박신의/미술평론가
1-간결하고 정연하게 나뉘어진 사각의 면들은 평면성가 깊이의 공간감을 동시에 품고있는 하나의 모순이다. 지극히 절제되어 있는 표현 또한 재현돼야 할 대상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있는 미완의 상태이다. 미완의 상태는 구체적인 형상에게는 아련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고, 기억할 수 있을 것같은 과거에게는 탈색된 망각의 공백을 제공하면서 흔들리는 세월의 자취를 남겨줄 뿐이다. 희뿌연 빛과 야트막한 어둠의 상충은 한낱 기억의 그림자와 망각의 어처구니 없는 단절 사이를 오가는 두리들 사유공간의 조건이다. 화면 자체를 철저한 물질적 조건으로 밀어붙이는 화가의 의도는 역으로 정신의 상태를 다시 만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 화면에서 우리는 정신과 물질의 분리를 읽어낼 수 없다. 고도로 정체된 감수성은 화가의 인식작용과 화면 위에 드러난 물질적 조건이 일치하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색채 역시 단일하지 않으며,그것은 다양한 물질적 조건에 놓여짐에 따라 무수한 감각의 지평을 활발하게 열어놓는다. 화가가 사용하는 여러 기법은 어떤 기억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유발하게 만드는 긴장의 물질적 표현이다. 문득 낯선 공간에서 에기치 않게 마주치게 되는 사물들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 연상되는 기억의 잔재들이다. 그것은 연상작용에 의해 자율적으로 의미와 형상을 재생산하게 되는 자연의 논리를 닮아 있다. 화가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추적해 간다. 그러나 물고기과 새,꽃문양,사각틀,고대풍의 단지,허수아비와 여우의 변형된 형상들은 특정한 의미를 담는 대상 이거나, 구태여 의미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과 정신의 상호모순과 긴장관계에 개입해있는 매개물일 뿐이다.
2-인물이 화면안에 들어서면서 또다시 시간과 공간은 물질로 환원되고 만다. 화면은 또한번의 정지된 정적의 소리에 감응한다 . 내면을 응시하는 듯한 눈빛은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그대로 화석화시켜 버리고 만다. 마치 갇힌 밤과도 같이,리고 먼 옛날의 슬픈 기억처럼 나직하고 단속적으로 독백의 웅얼거림이 화면 전면으로 번져간다. 그리하여 화면 가득한 긴장감과 괴괴함, 적막감은 하나의 정신의 의미를 슬그머니 드러내려는 풍경으로 우리들 눈앞에 펼쳐놓게 한다 .인물은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인양 말이 없다. 인물과 병행된 다른 형상들도 이전에 비해 구체적인 자신의 꼴을 드러내지만, 그 표정은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오히려 그러한 표정들은 침묵의 깊이를 더욱 파고들려는 의도로 받아 들여진다 . 그리하여 보다 더 절실하게 침묵의 의미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 철저하게 차단된 공허의 공간을 접하고자 할 때,비로소 하나의 기억과 재회하게 되리라는 예감을 기대하는 듯하다 . 혹은 대화의 언저리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고자 하는 마음 깊은 애잔함을 언뜻 비추고자 하는 뜻일 것같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형상의 함몰과 출현은 일정하게 단절과 연속의 모순법칙에 의존해 있다. 형상을 지우는 작업은 사물에 부여된 통념과 인위적 규정을 벗어나려는 몸짓이었고, 또 세계에 대한 일체의 주관적 정서를 배제하면서 화면의 물질성에 밀착해 가기위한 하나의 사유방식이었다. '이름없는 그림'으로 설정된 면분할과 사각틀은 그러한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반면 서서히 형상이 드러나는 최근의 작업은 증발된 형상에서 화가 자신의 또다른 구속을 느끼게 되는 아이러니에 대한 일종의 회화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형상의 재현은 다른 차원에서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려는 과정에서 비롯한 것이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단절과 연속의 법칙이 주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