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비교. 통계자료

한국의 향수가 세계를 사로잡다

鶴山 徐 仁 2005. 11. 26. 14:32
롤리타 렘피카를 아시나요
태평양의 롤리타 렘피카, 돌풍 일으키며 ‘향수 종주국’ 프랑스에서 점유율 3, 4위
한국기업 이미지는 숨기고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세계 명품브랜드 반열에 올라
박영철 주간조선 기자 ycpark@chosun.com
입력 : 2005.11.26 13:21 24' / 수정 : 2005.11.26 13:25 50'

향수시장에 일대 이변(異變)이 진행 중이다. 1997년 세계 향수시장에 ‘롤리타 렘피카(LOLITA LEMPICKA)’라는 이름의 향수가 혜성같이 나타났다. 롤리타 렘피카라는 패션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른바 ‘디자이너 향수’다. 당연히 이 향수는 처음에는 샤넬, 크리스찬 디오르 같은 일류 브랜드가 아니었다. 그러나 출시 10년도 안돼서 세계적인 명품 향수의 반열에 올랐다. 세계 최고의 향수 시장인 프랑스에서 시장점유율 3~4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프랑스 파리의 한 화장품 전문점에서 고객들이 롤리타 렘피카 향수의 향기를 맡아보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향수는 한국인이 만든 것이다. 한국 1위의 화장품업체 태평양의 프랑스 현지법인이 이 제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태평양은 자본을 대고 개발·생산·판매 등 나머지는 프랑스 법인의 현지인이 만든다. 현지화를 철저히 실천한 덕분에 ‘이 향수가 한국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소비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태평양의 경영진이 ‘롤리타 렘피카를 성공시켜야겠다’고 마음먹은 사연을 알려면 시계바퀴를 몇 년 전으로 거꾸로 돌려야 한다.


▲ ▲ <2004년>
<자료:SECODIP(시장조사 전문기관)>
위로부터 제품명, 브랜드명, 법인명 순.
“프랑스 여행 중 매장 한쪽 귀퉁이에서 먼지 쌓인 태평양 제품을 보고 회사 명예를 걸고서라도 세계적인 유명 화장품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2001년 12월 5일 태평양 서경배 사장은 조선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이날은 서 사장이 미국, 유럽 등 세계에 판매할 글로벌 브랜드 ‘아모레퍼시픽(AMOREPACIFIC)’ 런칭계획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글로벌 브랜드로 세계시장 공략을 선언하는 경사스런 날에 어울리지 않게 서 사장이 비장한 느낌을 주는 뒷이야기를 밝힌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한국 1위의 화장품 업체인 태평양은 1988년 프랑스 시장에 기초 화장품을 내놓았으나 참담한 실패를 맛봐야 했다. 태평양은 1945년 창립 이후 국내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켜왔지만 세계 최고의 화장품 시장인 프랑스를 공략하기에는 계란으로 바위 때리기 격이었다. CEO(최고경영자)가 되기 전이던 서 사장은 이 무렵 프랑스를 방문했다가 암담한 현실을 보고 몹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그 기자회견을 했을 때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 요즘 태평양에는 ‘해외시장에서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어낸 한국 기업’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태평양이 투자한 롤리타 렘피카 향수가 명품 브랜드 반열에 합류한 덕분이다. 한국에도 물론 삼성, 현대 등 세계적인 브랜드가 있다. 그러나 삼성, 현대 등이 내수시장에서 시작해 해외로 나간 것과는 달리, 롤리타 렘피카는 출발부터 해외였다는 점이 다르다.

롤리타 렘피카는 지난해 프랑스 향수시장에서 시장점유율 2.8%를 기록, 유명한 향수들을 제치고 당당히 4위를 차지했다. 태평양 김형길 홍보팀장은 “올해 프랑스 법인의 현지 매출이 지난해보다 1.4% 늘어난 3600만유로(11월 18일 기준 약 437억원)를 기록할 전망”이라며 “올 들어서는 월별 3~4위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롤리타 렘피카는 세계 70여개국에서 판매 중이다. 웬만한 나라의 면세점이나 백화점에서 롤리타 렘피카를 보는 것은 이제 뉴스 축에도 못 낀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성과가 브랜드 출범 후 10년도 안 돼서 나타났다는 점이다. 롤리타 렘피카는 1997년에 출시된 신생 브랜드이다. 숙명여대 경영학부 김주헌 교수는 “세계의 수많은 향수가 각축을 벌이는 프랑스 시장에서 신생 브랜드가 이런 성과를 올린 것은 대단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태평양은 어떻게 해서 ‘향수 종주국’ 프랑스에서 이런 성과를 올릴 수 있었을까? 우선 태평양은 프랑스 시장 진출의 패인 분석을 철저히 했다. 태평양이 1980년대 말 프랑스 시장에 진출했다가 실패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진단이 내려졌다. 우선 ‘원산지 효과’가 문제였다. 세계 최고의 화장품 선진국 프랑스에 ‘화장품의 후진국’ 이미지가 강한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를 달고 시장에 ‘순(SOON)’이라는 이름의 제품을 내놨으니 될 리가 없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태평양 경영진은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안 되면 ‘메이드 인 프랑스(Made in France)’로 하면 될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 현지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 ‘리리코스(Lirikos)’라는 이름으로 ‘메이드 인 프랑스’ 제품을 내놨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실패로 끝났다. 생산만 현지에서 했을 뿐, 현지법인을 한국식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다. 진단 결과 ▲ 최고경영진을 한국인이 독차지하고 프랑스인은 하위직만 맡긴 점 ▲ 한국에서 파견된 한국인 경영진은 프랑스 문화와 시장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부족했다는 점 ▲ 권력이 집중된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해 분권화된 조직문화에 익숙했던 프랑스인의 원성을 샀던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됐다. 장세진 고려대 교수는 “프랑스 현지공장의 경영을 한국인이 한다는 것을 안 프랑스인들이 리리코스 제품을 한국과 연관시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현지인이 리리코스를 기피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진출을 위한 제품선정에도 문제점이 발견됐다. 태평양은 스킨케어류의 기초 화장품을 먼저 내놓았다. 그러나 프랑스 시장은 한국, 일본 등과 달리 기초화장품보다 향수나 색조 화장품의 비중이 훨씬 높다.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접근한 것이 패착이었다.

원인을 알면 처방을 찾는 건 쉬운 일이다, 실천에 옮기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태평양은 일본 화장품업체 시세이도가 채택해서 성공한 전략을 벤치마킹하기로 결정했다. 시세이도는 외형만 놓고 보면 세계 4위, 일본 1위의 대형업체이고 브랜드가 많을 때는 80개가 넘었지만 모두 국내용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래서는 해외진출은커녕 일본에 진출한 외국 수입화장품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러모로 1990년 전후의 태평양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시세이도는 1990년 프랑스에 향수사업만 전문으로 하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2명과 손잡고 1992년에 향수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1993년에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를 선보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전략의 유효함은 이미 도요타 자동차가 미국 고급자동차 시장에 진출하면서 도요타라는 브랜드를 버리고 ‘렉서스’라는 전혀 새로운 현지 브랜드를 만들어내 크게 성공한 사례에서 입증된 바 있다. 도요타 측은 ‘일본차는 싸구려’라는 이미지가 강한 탓에 도요타라는 일제 브랜드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 미국에서 렉서스를 출시하면서 출두철미하게 도요타를 숨기는 전략으로 나갔다.

시세이도의 성공에 자극 받은 태평양은 과거와는 철저하게 정반대의 방식으로 프랑스 시장을 공략해나갔다. 우선 프랑스 시장 공략의 첨병으로 향수를 선택했다. 태평양 국제부문 이상우 부사장은 “향수는 기능성보다 이미지의 비중이 높아 감성과 이미지만 잘 구축하면 시장진입이 기초화장품보다 용이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태평양은 또 시세이도가 패션디자이너 브랜드 향수를 출시해 프랑스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것도 참작했다.

태평양은 향수 중에서도 디자이너 향수를 런칭하기로 택했다. 태평양 김봉환 국제사업팀장은 “유명 향수들을 보면 대체로 샤넬, 크리스찬 디오르, 아르마니, 캘빈 클라인 등 유명 패션디자이너들이 내놓은 것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향수가 소비자들이 구입할 때 이미지를 중시하는 ‘이미지 상품’이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98년 유럽최고 여성향수상

태평양은 우선 여성용 향수를 출시하기로 하고 패션디자이너의 물색에 나섰다. 태평양은 초기 과정에서부터 철두철미하게 현지화 전략을 폈다. 우선 1995년 마케팅 전문가 카트린 도팡을 현지법인에 영입해 디자이너 선정 및 신제품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맡겼다. 스카우트 당시 크리스찬 디오르의 국제마케팅 담당 이사로 재직 중이던 그녀는 이브생 로랑, 이브 로셰, 크리스찬 디오르 등에서 화장품 전문가로 명성을 쌓은 인물이다. 도팡이 발굴한 디자이너가 롤리타 렘피카다. 당시 한국업체인 태평양이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향수 라이선스 계약을 맺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태평양은 잠재력있는 신예 디자이너를 발굴해 동반 성장하는 전략을 택했는데 결과적으로 적중했다. 도팡을 비롯한 현지 스태프의 안목과, 권한위임을 하고 현지의 판단을 존중한 본사 경영진의 의지가 맞물려 최상의 시너지 효과를 낳은 것이다.

롤리타 렘피카는 당시 남성 디자이너가 주도하던 프랑스 패션업계에서 몇 안되는 여성 디자이너 중의 하나였지만, 그때만 해도 인지도는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롤리타 렘피카는 개성파 작가로서는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유니섹스 모드가 풍미했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여성적 아름다움, 특히 현대적 여성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세상 이치가 대개 그렇듯이, 유니섹스 모드도 처음 등장했을 때는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게 대세가 되면 사람들은 슬슬 지겨워하면서 뭐 다른 것 없나 하고 찾게 마련이다. 도팡은 이 틈새를 노렸고 베팅은 적중했다.

태평양은 현지 조직도 정비해 나갔다. 1996년 롤리타 렘피카의 마케팅을 담당할 별도의 현지법인 PLL(Parfums Lolita Lempicka)을 설립했다. 또 프랑스 및 유럽 사업을 총괄할 지주회사 PES(Pacific Europe S.A.)를 설립했다. 한국 본사는 프랑스 현지법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했다. 제품 개발, 생산, 판매, 광고 등 모든 것을 현지법인에 일임했고 한국에서는 관리자 1~2명만 파견했다. 프랑스 현지법인은 프랑스인 직원과 한국인 직원 사이의 융화를 위해 모든 회사 행사에 한국인과 프랑스인이 공동으로 참여토록 하고 프랑스인만의 공식행사를 모두 금지시켜 조직융화에 힘썼다. 도팡 사장은 “태평양의 CEO(최고경영자)가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우리에게 자율권을 주고 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태평양은 프랑스에서 현지화 전략의 성과가 좋은 것으로 나타나자, 그 후 중국 상하이(上海)법인의 책임자를 현지인으로 교체하는 등 이 전략을 확대하고 있다.

디자이너 롤리타 렘피카는 자신의 창의성을 알아준 태평양에 적극 협조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이름만 빌려주고 큰 관여를 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에 비해 롤리타 렘피카는 향, 용기, 광고 디자인 등에서 PLL 측과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협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라이선스 로열티 비율도 비교적 낮게 받았다.

도팡은 디자이너 못지 않게 중요한 향과 용기 등에서도 최고의 파트너들과 제휴했다. 향은 애닉 메나르도가 맡았다.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리는 달콤한 감초꽃 향과 성숙하고 관능적인 이미지의 오리엔탈 플로랄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용기 디자인은 알랭 드 무르그에게 맡겼다. 그는 장 폴 고티에, 에르메스 등 유명 브랜드의 향수용기를 디자인한 인물이다. 그는 파격적인 디자인을 내놨다. 매혹적인 금단의 사과를 형상화한 사과형 용기를 만들었고, 기술적으로 쉽지 않았던 사과 꼭지 분사 방식을 채택했다. 용기 제조는 프랑스 최고의 용기 제조업체인 푸셰 드 쿠벌에게 맡겼다. 가격은 고가 향수 중에서는 중간 가격대 전략을 채택했다.


그렇게 해서 1997년 4월 롤리타 렘피카가 파리에 첫선을 보였다. 이 향수는 태평양 최초의 라이선스 향수이자, 디자이너 롤리타 렘피카로서도 자신의 이름을 딴 최초의 여성용 향수였다.

태평양은 시세이도의 초기 실패 사례를 교훈 삼아 롤리타 렘피카가 한국의 태평양 제품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태평양 김형길 홍보팀장은 “출시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도 롤리타 렘피카가 한국기업의 브랜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프랑스 시장에 선보인 덕분에 롤리타 렘피카는 출시 직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선 이례적으로 현지 언론의 호의적인 보도가 잇따랐다. “롤리타 렘피카의 첫 향수… 이 향수의 핵심 포인트는 용기의 장식들이다. 맵시 있는 장식들은 내면파 화가들의 분위기와… 작은 숲 속의 바로크적 느낌을 준다. … 애닉 메나르도는 도발적인 숫처녀의 은은한 자취를 법랑으로 된 사과 모양의 병에 담아놓았다. 감초향, 보랏빛 사탕냄새, 버찌의 솔직함 등으로 말이다.”(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 1997년)

“롤리타의 부티크는 시적이고 바로크적이다. 롤리타 렘피카 향수는 1년에 50여개의 향수가 선보이는 명품 시장에서 샤넬, 랑콤, 크리스찬 디오르 같은 기득권의 거대 메이커와 경쟁하는 파워를 드러낸다.”(패선전문잡지 보그, 1999년)

언론과 전문가집단의 관심과 찬사는 소비자들의 반응으로 이어졌다. 해마다 수십 종의 새로운 브랜드가 쏟아져 나오는 프랑스 향수시장에서는 단일 제품의 시장점유율이 1%가 넘으면 성공한 것으로 간주된다. 롤리타 렘피카는 출시 1년8개월 만인 1998년 11월에 드디어 점유율 1%를 넘어섰다.

2001년에는 2%를 넘어섰고 지금은 3%에 육박하고 있다. 이익 측면에서도 2001년부터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언론과 전문가, 소비자의 호의적인 반응은 각종 수상으로도 이어졌다. 향수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FiFi재단으로부터 1998년에 프랑스 및 유럽 지역 최고 여성 향수상을 받았고, 1999년에는 미국 여성 최고 향수상을 받았다.

태평양은 롤리타 렘피카 여성용 향수의 성공을 발판으로 2000년 4월 남성용 향수를 내놓아 2002년에 시장점유율 1%를 넘는 등 꾸준한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또 2000년 6월에는 디자이너 장 샤를르 드 카스텔바작(Jean Charles de Castelbajac)과 손잡고 또 하나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향수인 ‘카스텔바작’을 선보여 역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향수는 2001년 프랑스 향수협회가 주는 최우수 용기 디자인상을 받았다.

롤리타 렘피카의 성공 사례는 비단 태평양만의 성과에 그치지 않고 한국 기업에 귀감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고려대 장세진 교수는 “롤리타 렘피카의 사례는 우리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노력하면 외국에서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는 선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