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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간 북한인 남편 기다리는 루마니아 할머니

鶴山 徐 仁 2005. 11. 11. 10:50

현대사의 한 장면서 꽃핀 북한 男교사와 루마니아 女교사의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
결혼 성공했으나 66년 각국서 생이별…“매일 생각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미디어다음 / 블로거 alto


[블로거가 만든 뉴스] 지난해 봄 저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한 루마니아 할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큐멘터리는 지난해 6월 ‘KBS 수요기획-미르초유, 나의 남편은 조정호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방송됐습니다.

그리고 방송이 나간 지 1년이 지난 지금, 저는 아직도 그 루마니아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북경 나비의 날갯짓이 태평양 한가운데에 커다란 허리케인을 일으켰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지난해 2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갑자기 영화감독 박찬욱 선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야, 아주 기막힌 사연을 지닌 할머니 한 분이 있어.” 동문 선배인 그가 영화 ‘올드보이’의 제작을 마치고 동유럽 여행을 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알게 된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사는 제오르제따 미르초유(71)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는 39년간 북한인 남편 조정호 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단 한 순간도 남편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할머니의 소원은 남편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는 것입니다.


1954년, 미르초유와 남편 조정호 씨가 연애하던 시절에 찍은 사진.
할머니의 안타까운 사연은 이렇습니다. 할머니는 1934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났습니다.

1952년에 사범학교를 졸업해 처음 발령을 받은 곳이 수도 부크레슈티에서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시레뜨의 ‘조선인민학교’였습니다.

할머니의 애절한 사연에는 우리 현대사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깔려 있습니다. 바로 북한이 1952~1959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많은 전쟁 고아들을 루마니아를 비롯한 동구권 공산국가에 보내 위탁 교육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 전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제 짐작이지만 아마 우리나라 정부가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열등감’으로 인해 이 사실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생겨난 전쟁고아를 해외입양이라는 방식으로 처리했던 우리나라와는 크게 비교가 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었던 가족사진.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지요. 북한에 살고 있던 청년 교사 조 씨는 전쟁 고아 3000명을 데리고 위탁 교육을 위해 루마니아를 찾았습니다. 북한에서 온 이 아이들을 교육했던 학교가 바로 ‘조선인민학교’ 였습니다.

바로 이렇게 북한에서 온 청년 교사 조 씨와 이 학교로 발령을 받은 ‘초년병’ 루마니아 교사 미르초유는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미르초유는 책임자 급으로 루마니아에 온 조 씨의 강인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에 호감을 느꼈고 두 사람은 국경을 초월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7년 동안 계속됐고,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습니다.

1959년 루마니아 정부와 북한 정부로부터 정식 결혼 허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은 결혼한 뒤 함께 평양으로 이주해 신혼 살림을 차리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은 너무 짧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 미란이가 칼슘 부족으로 뼈가 구부러지는 병에 걸려 미르초유는 딸을 데리고 루마니아로 일시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르초유는 이 일시 귀국이 영원한 귀국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것은 1960년대부터 북한에서 일기 시작한 외국인 배척운동 때문입니다. 당시 북한 당국은 사람들이 외국인과 연락하는 것을 금했고 국제 결혼한 부부의 외국인 남편이나 아내를 강제 추방시켰습니다.


남편이 1966년 마지막으로 보내온 편지. 그 뒤로 미르초유는 남편의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처음 헤어졌을 때에는 그래도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재회를 꿈꾸며 한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지만, 1966년 남편 조 씨가 보낸 편지를 끝으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마지막 편지에는 남편 조 씨가 탄광으로 이주한다는 소식이 담겨있어, 남편에 대한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져 갔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소식은 들을 길이 없었고 그렇게 긴 이별은 시작됐습니다.

미르초유 할머니는 37년이라는 세월 동안 남편을 잊지 않기 위해 한글을 공부했습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 스스로 찾고 쓰고 외우기를 거듭했습니다. 혼자 시작한 한글 공부는 어느새 최초의 ‘한국어-루마니아어’ 사전 발간을 눈앞에 둘 정도가 됐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 남편에 대한 사랑을 담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쓴 사전의 원고는 벌써 다섯 상자가 넘을 정도의 분량이 됐습니다.

미르초유 할머니는 그동안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북한 당국은 물론이고 국제적십자, 앰네스티 등 각종 국제 단체에 탄원서를 수없이 써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남편과 사랑을 약속했던 호수에 나와 말 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미르초유.
실제로 북한 당국은 37년 동안 남편의 생사를 일곱 번이나 바꾸어 가며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생사는 소재파악 불가, 사망, 생존확인, 사망 등으로 매번 달라졌습니다.

미르초유도 알고 있습니다. 남편의 나이를 감안해 보면 이미 자연사 했을 가능성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남편의 무덤 확인 요청도 해놓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공식적인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마치고 귀국 준비를 하던 나에게 미르초유 할머니는 나지막하게 물었습니다. “이 방송이 나가면 우리 남편을 만날 수 있는 거죠?” 나는 대답 대신, 가져갔던 이산가족 재회신청서 한 부를 할머니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 희망을 이산가족 상봉에 걸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한글로 또박또박 남편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르초유는 39년 동안 단 한 번도 결혼반지를 빼지 않았다. 루마니아 여성들은 남편이 죽거나 이혼하기 전까지는 결혼 반지를 빼지 않는다.
그리고 돌아와서 통일부에 미르초유 할머니의 이산가족 재회신청서를 접수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통일부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외국인은 이산가족 재회신청 접수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부가 정해놓은 이산가족의 범주에는 외국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방송이 나간 뒤 몇 달이 지나자 미르초유 할머니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잘 되어갑니까?” 나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신없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지만 사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고집스러운 할머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남편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나와 우리의 딸 미란이를 더없이 사랑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서도 그걸 느낄 수 있습니다. 꼭 한 번 만난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매일 생각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미르초유 할머니가 남긴 말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떠나질 않습니다. 방송이 나간 뒤 여러 곳에서 제보를 받았습니다. 미르초유 할머니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할머니들이 러시아, 동유럽에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많은 분들이 꼭 재회의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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