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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新羅人의 美意識

鶴山 徐 仁 2005. 10. 19. 15:17

           ** 신라인의 미의식을 한번 압축해 보았습니다...아주 간단하게..

 

 

    "삼국통일의 大業을 통하여 더욱 성숙하는 신라미술"

 

 신라인의 미의식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삼국시대의 신라 미술품과 통일 신라시대의 미술품을 접할 수 있어야 하나, 우리가 접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신라인의 미술품으로도 당시 성행했던 신라인의 문화를 엿볼 수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의 문화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통일신라 이후에는 더욱 융성한 불교를 바탕으로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융합하면서 발전을 해 왔으며, 특히 당나라 문화의 유입을 통하여 독창적인 신라인만의 문화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신라사람들에게 있어 의식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던 불교를 바탕으로 불교 문화는 여러 가지 교리적 해석과 더불어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방법과 더불어 세련된 기술에 의한 양식으로 발전하여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불상을 중심으로 한 조각 작품들은 아름다움에 관심을 두면서도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런 발전을 통해 이루어진 신라의 예술에 담긴 신라인의 미의식을 간단하게나마 조각과 회화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의 발전에 있어서 그 내용의 완전한 이해와 새로운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표현이나 기술적 발전에 의한 숙달된 기법이 발전을 하게 되는데, 신라는 불교라는 정신적 바탕위에 새로운 형태로서의 문화의 발전을 가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불교를 국교로 숭배하며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지도층의 의식에 불교가 커다란 작용을 하였기에 일체가 되어 이룰 수 있었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가 하나의 숭배적인 종교로 정신적 지주의 형태를 갖게 되므로써 그에 따라 불상 등 불교 중심의 문화가 발전하는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즉,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열성이 고조되고 깊은 신앙심이 팽배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한 문화적 소산물로서 예술의 꽃을 피우게 되는것이 신라 문화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佛敎를 바탕으로 한 신라 예술의 꽃"

 

 이러한 신라의 예술을 조각과 회화로 나누어 설명을 하겠습니다. 먼저 조각을 살펴보면 새로운 종교의 수용 초기에는 그 종교의 이념에 따른 철저한 수행이나 정신적, 탈속적(脫俗的)인 요소가 강조됨에 따라 종교로서의 대상은 상징적으로 예배되는 경향이 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위의 구체적 형상으로 재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것은 단기간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간의 시일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심의 절정에 이르면 그 정신적 전통을 이어받아 예술은 가장 아름다움의 극치로 펼쳐진다고 할 것입니다. 신라의 조각은 바로 이러한 불교의 정신적인 바탕 위에 이룩된 하나의 결정체이며 신앙심이 깊어짐에 따라 불상 표현의 원칙이 세워지고 이러한 신라인의 불상 표현에 대한 미의식의 변화는 삼국시대 불상의 인간적인 표현에서 조금 더 위엄이 서리고 자비로운, 즉 인간과는 구별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조형의식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예로 경주 九黃洞의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순금製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座像)"은 현실 세계를 떠나서 사색의 경지에 몰입한 부처의 자비스러운 미소를 곁들임으로해서 신라인의 의식이 투영된 불상 표현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불상 표현의 소재를 찾던 상징적인 단계에서 한 단계 올라 조금 더 형이상학적인 불교 교리의 본질적 문제에 접근하여 그 개념을 시각적인 조형물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의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특정적인 佛身 표현의 강조나 설명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인체의 형상을 빌은 조형을 통하여 無量한 法門을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으며 이러한 사실적이면서도 이상화된 인체 표현을 빌어 깊은 사색과 法悅의 경지에 이르고 중생을 계도하는 표정에서 정신력의 실체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것으로 판단하면 불교가 신라인의 의식에 깊게 잠재하여 조형물을 만드는 사람이나 그 만들어진 조형물에 예배하는 사람 모두가 공감하는 조형 예술의 세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삼존판불(金銅如來三尊板佛)"이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에서도 마찬가지로 균제(均濟)된 불신의 형태나 정교한 주조기술로 조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런 조각을 통하여 불법의 실체를 체험하고 구현하려는 신라인의 미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미의식은 신라인의 균제와 조화의 예술 표현이 순수한 종교성과 하나로 융합하여 조각 양식의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주변의 불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굴암 본존불에 나타난 단순하면서도 정제(淨濟)된 불신의 표현과 형태는 중생이 갖는 고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아의 경지에 이른 숭고한 얼굴 표정으로 존엄무비(尊嚴無比)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조형예술은 단시간내에 이루어 진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연마된 조형기술의 뒷받침속에 신앙과 결부되어 이루어졌다 할 것입니다.

 

 

"남은것이 거의 없는 신라 회화....그래도 뻘 속의 珍珠..."

 

 지금까지는 조각에 신라인은 어떻게 미를 접목시켰나에 대해 말씀드렸고, 다음은 신라 회화에 나타난 미의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신라의 회화를 이해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은 현존하는 신라의 회화가 거의 전무하다는데 그 이유가 있답니다.

 사실, 신라는 국가에서 채전(彩典)이라 하여 국가에서 관장하던 일종의 화원 양성소도 설치하였었고, 덕만공주(德曼公主)의 예에서 나타나듯 당시에 당나라와 빈번한 왕래를 통한 회화의 교류가 있었음을 판단하면 회화에 대한 신라인의 열의는 고구려나 백제 못지않게 활발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회화의 발전된 모습 또한 대단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아 있는 신라의 회화라고 할 수 있는것은 경주의 천마총(天馬塚)과 98호 고분에서 출토된 공예품들 뿐입니다. 여기 말이 나왔으니 하고 싶은 말입니다만, 우리가 천마도라고 하는것은 지금은 천마라기 보다는 기린이라는 동물이 아닐까 하는 점이랍니다. 왜냐하면 천마와는 달리 기린은 서기(상서로운 기운)을 내 뿜는 상상의 동물인데 천마도는 일반적인 말이라고 보기 보다는 기린이라고 보는것이 합당한것 같습니다. 이런 천마도나 기마, 인물도, 서오도(瑞烏圖), 우마도 등 출토품의 수준은 고구려나 백제의 회화와 비교하면 상당히 그 수준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분에서 출토된 미술품을 단순하게 일반 미술품과 비교할 수 없다는 비교 방식의 차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고분 출토품들은 고구려 고분 벽화와 같은 회화라기 보다는 공예품에 그려진 공예화로서 신라 회화의 본 모습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라의 회화는 내재된 함축미의 조용한 전달"

 

 천마도를 살펴보면 고구려 벽화의 말 그림 처럼 강렬함이나 위풍당당한 기세가 없으며, 백제의 산수문전(山水文塼)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천마도에서는 무엇인가 할말을 다 하지 않고 할 말을 담고 있는듯한 그림으로 우리는 고요와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한편, 의도적으로 통제되고 절제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반가사유상에서 느끼듯 "내재된 세계의 함축미"라고 논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신라인의 회화 작품으로 신라인의 미의식을 담고 있는 회화로는 유일하게 국보 제 196호로 지정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光佛華嚴經變相圖)"가 있는데 감지에 金銀泥로 그려졌으며 여기에서 나타나듯 화려하고 풍요로운 화풍은 신라 회화의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특히 인체 표현에 나타난 부드러운 곡선과 후덕한 얼굴, 몸매의 유연한 자태, 호화로운 분위기 등은 신라 예술이 불교와 더불어 극도로 세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光佛華嚴經變相圖)"는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중인데 변상도의 가운데 부분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양쪽 갓쪽만 남아 있으나 이 부분에 나타나있는 회화만으로도 신라인의 회화적 솜씨가 상당하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라의 조각과 회화에 나타나는 신라인의 미의식을 살펴보았는데, 신라는 통일전인 삼국시대부터 당나라와 활발한 교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특히 통일 이후에는 철저한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더욱 포근하고 풍요롭게 아름다운 미의식으로 활발한 문화활동을 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불안 속에서 조성된 작품들이 상당히 흔들리고 있음을 볼 때 신라인의 미의식 또한 정치적 불안과 더불어 많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예술은 불교라는 교리를 바탕으로 불법을 이루려는 의지 아래 하나의 완성된 미의식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라인의 예술적 감각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에 걸쳐 불교를 대상으로 신앙심의 절정에 이르면서 예술품 또한 절정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라의 예술은 불교의 정신적 바탕위에 이룩된 하나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불교를 받아 들여 정신적 지주로 삼으며 인간이 이루지 못하는 세상을 부처가 이루고, 인간의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난 부처로서의 승화된 형상을 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예술의 꾸준한 발전을 가져 왔으며, 그 발전의 결정체로 신라 예술은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인의 미의식은 불교와 더불어 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며 지극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방법으로 정착하며 보다 세련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라인의 미의식을 알아 볼 수 있는 작품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한정된 미술품이라도 충분한 연구를 통하여 조금 더 考察해야 하겠으며 앞으로는 상대적으로 고구려, 백제인의 미의식과 비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수수께끼의 낡은 보물창고 |글쓴이 : 가시나무새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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