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중에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을 몇개나 구경하는가를 세어보면서 가면 재미가 있고 역사 공부가 된다. 지난 6월말 필자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및 南佛 프로방스와 니스 칸느 지방을 9박10일간 여행하면서 세계문화유산 세 곳을 구경했다. 리용의 舊시가지, 오랑주의 로마시대 극장,
그리고 아비뇽의 舊시가지.
인구가 약9만 명인 아비뇽은 14세기 때 만든 길이 4.5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벽이 워낙 잘 보존되어 있고, 장엄한 교황청 건물이 압도하므로 城內로 들어가면 14세기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생긴다. 우리 尙美會 여행단 일행이 묵은 유럽 호텔도 500여 년 전에 지은 건물이고 나폴레옹이 투숙한 방도 있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중에 부하장군들이 춥다고 불평하면 "여기가 아비뇽의 유럽 호텔인 줄 아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아비뇽이 세계사에 등장하는 것은 프랑스의 보르도 지방 대주교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클레멘스 5세로 등극한 1309년이었다. 프랑스 왕 필립은 로마의 교황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프랑스인 교황이 등장하자 필립왕의 强勸도 있었지만, 로마의 권력투쟁이 살벌하여 교황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고 생각한 클레멘스 5세가 아예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긴 것이다. 1377년까지 일곱 명의 프랑스인 교황이 아비뇽에서 집무한다.
1376년에 그레고리 6세는 아비뇽을 떠나 로마로 돌아가지만 그가 1378년에 죽자마자 곧 분규가 일어난다. 로마와 아비뇽에서 각각 교황이 추대되어 1417년까지 교황 2인 시대가 계속된다. 한때는 세 명의 교황이 각축했다.
아비뇽 시내에 우뚝 선 교황청은 '아비뇽의 幽囚(유수)'라고 불리던 시기에 세 교황에 의해서 30년만에 완성된 거대한 요새 같은 건물이다. 로마의 聖베드로 성당보다도 약200년 앞선 건물이다. 평면적이 1만5000평방미터이다. 이곳을 구경하는 것은 미로 탐험이기도 하고 등산이기도 하다. 옥상까지 올라가야 아비뇽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현대식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으므로 시계바늘이 60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론江을 넘어 있는 언덕에는 산탄도레 요새의 위용이 보인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이 건축물은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중세 요새로 꼽힌다.
유명한 아비뇽 연극제는 舊교황청 안마당에서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한다. 노트르담 성당, 쾰른 성당 같은 유럽의 오랜 교회는 문화재가 아니라 지금도 예배당으로 쓰이는 살아 있는 역사이다. 사람들이 역사속에서 숨쉬고 생활 속에서 역사가 꿈틀거리는 것이다. 유럽에선 역사가 박물관에 있지 않고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비뇽 옆을 흐르는 론江은 거의 한강만큼 큰데 유명한 다리가 있다. 프랑스 민요 '아비뇽 다리'가 바로 이 다리를 노래했다. 聖베네제 다리인데 베네제라는 양치기 소년이 천사의 계시를 받고 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공사를 주도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다리는 1177년부터 8년간의 공사로 완성되었다. 길이가 900m이고 아치가 22개나 있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이후 일부만 보존되고 있다.
마르세이유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가는 론江은 수량도 많고 兩岸이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다. 코발트 색깔의 하늘과 더 짙은 강물, 그리고 잔디의 초록색이 성벽과 요새와 교황청의, 세월의 이끼가 낀 옅은 황토색과 어울려 환상적인 색감을 연출한다.
아비뇽은 교황청이 로마로 복귀한 뒤에도 교황의 직할령으로서 프랑스 대혁명까지 독립되어 있다가 1791년에야 프랑스로 합병되었다. 교황청의 직할령 시절 이 도시는 유태인이나 이교도들을 많이 받아들였다. 사기꾼과 범죄자들도 덩달아 이 도시로 몰려왔다.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이 수많은 戰禍(전화)를 당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도시는 700년이나 평화를 누렸다. 1721년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2만4000명 인구가 4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이 도시는 2000년에 '유럽의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다.
아비뇽에 머물면서 가 볼 만한 곳이 많은데 우리 尙美會 여행단은 버스를 타고 약30분을 달려 생 레미로 갔다. 빈센드 반 고호가 자살하기 1년 전에 1년간 입원해 있으면서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던 정신병원이 이 작은 마을에 있다. 이 병동은 관광지로 유명해져 1년에 200만 명 이상이 이 마을을 찾는다. 정신병동은 미술관으로 변했고 고호가 썼던 방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이 천재가 조금만 참았더라면 부귀영화를 누렸을터인데"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신병동 부근의 경치는 '추수하는 사람' '올리브 나무' '생 레미의 밤' 같은 그림에 있는 그대로이다. 그림에 먼저 익숙해져서인지 현실이 그림을 본떠서 생긴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생 레미 병동에서 고호가 그린 자화상을 들여다 보면 강한 의지력과 슬픔, 허무함, 그리고 초점이 잡히지 않는 맑고 푸른 눈동자가, 인간의 모든 고뇌를 다 진 일그러진 정신을 보여준다. 1853년에 네덜란드의 탄광촌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37년간의 생애를 방황과 실연, 열정과 광기를 넘나들면서 화가, 설교사, 교사로 살았다. 그의 그림에는 가난한 가족과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이 자주 등장한다. 탄광촌 설교사로서 광부들과 함께 생활했던 그의 순수한 마음을 반영한 것이다. 그의 백지 같은 순수함은 수많은 상처를 받는 화폭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그의 心像이기도 하다.
그가 파리에서 좌절하여 1888년에 프로방스에 내려왔을 때 네덜란드의 어두운 하늘에 익숙해 있던 그에게 프로방스의 태양과 광채는 하나의 구원이었다. 그가 프로방스 시절 2년간 그린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밝음은 태양과 달, 대낮과 밤의 광채이다. 한자로도 밝음은 明이라고 하여 태양의 밝음과 달의 밝음을 합쳐서 표현하지 않는가. 소설가 故李炳注씨가 '山河'라는 소설의 副題처럼 썼던 말이 생각났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고호의 그림을 보면 인간의 고뇌하는 정신을 절절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어빙 스톤이란 사람이 쓴 고호 傳記 소설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그가 프로방스로 불러내린 고갱에게 하는 말이다.
"난 태양을 그릴 땐, 사람들로 하여금 태양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싶어. 엄청난 힘을 가진 빛과 熱波를 내뿜는 태양을. 보리밭을 그릴 경우엔, 보리알 안에 든 원소 하나하나가 영글어터지는 최후의 순간을 향해 밀고 나아가는 것을 느끼게 만들고싶고 사과를 그릴 땐 사과의 즙이 표피를 밀고나오려는 것을, 중심에 있는 사과씨들이 그 자신의 결실을 맺기 위해 바깥으로 나오려 몸부림치는 것을 느끼게 만들고싶어. 한 인간의 초상화를 그릴 때 난 그 사람이 보고 행동하고 겪었던 모든 것, 그의 全인생의 흐름을 느끼게 만들고 싶소"
생 레미에서 그린 자화상이 바로 그런 그림일 것이다. 화폭 하나에다가 인생의 모든 것을 그려넣으려고 인생을 불사른 그의 그림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고 있지만 그는 돈도 명예도 인정도 받지 못하고 죽었다. 뒤늦게 천재를 알아본 사람들이 그 천재의 고뇌가 만들어낸 작품을 즐기면서 행복해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연고인가. 고호와 비슷한 상태에서 자살했던 조각가 권진규가 남긴 낙서가 생각났다.
<凡人에겐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천재에게는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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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호는 늦둥이 화가였다.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 것이 스물일곱 살 때였다. 그가 권총자살로 生을 마감하기까지의 불과 10년간 畵家 활동으로 남긴 작품은 엄청나다. 유채화 800점, 수채화·素描·스케치 등이 1000점이나 된다. 고호의 동생 테오는 畵商으로서 형을 경제적으로 도왔다. 1890년7월에 고호가 자살한 이후 고호의 작품은 동생 소유가 되었는데 동생도 여섯 달 뒤 사망했다. 고호 작품의 관리는 테오의 아내, 아내가 죽은 뒤에는 그녀의 아들에게로 넘어갔다.
1962년 유족들이 갖고 있던 작품들은 당시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빈센트 반 고호 재단이 사들였다. 구입자금은 네덜란드 정부에서 출자했다. 1973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반고호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반 고호 작품이 약630점(그림 230점, 데상 400점), 그밖에도 19세기의 유명한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이 같이 전시되고 있다. 고호의 居處를 따라서 네덜란드 시대 - 파리 시대- 아를르 시대 - 상 레미 시대 - 오벨 술 오와즈 시대로 대별되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고호의 기복 많은 생애를 한 눈에 훑어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 고호 미술관의 전화번호는 +31(0)20 570 5200이고 전자주소는 info@vangoghmusueum.nl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동남쪽으로 약 두 시간 차로 달리면 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 안헴이 있고 그 주변은 국립공원 숲 지대이다. 이 한가운데 크뢸러 뮬러(Kroeller Moeller Museum) 미술관이 있다. 이 미술관에도 고호의 작품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生前에 불우했던 고호는
죽어서 암스테르담과 이 곳의 두 미술관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크뢸러 뮬러 미술관은 국립공원 안에 있고 조각 정원이 근사하다. 이곳을 찾을 때는 시간을 넉넉히 잡고 주변 경관까지 즐길 수 있도록 해야 아깝지 않다. 전화번호는 591-1627.
인구가 약9만 명인 아비뇽은 14세기 때 만든 길이 4.5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벽이 워낙 잘 보존되어 있고, 장엄한 교황청 건물이 압도하므로 城內로 들어가면 14세기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생긴다. 우리 尙美會 여행단 일행이 묵은 유럽 호텔도 500여 년 전에 지은 건물이고 나폴레옹이 투숙한 방도 있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중에 부하장군들이 춥다고 불평하면 "여기가 아비뇽의 유럽 호텔인 줄 아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아비뇽이 세계사에 등장하는 것은 프랑스의 보르도 지방 대주교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클레멘스 5세로 등극한 1309년이었다. 프랑스 왕 필립은 로마의 교황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프랑스인 교황이 등장하자 필립왕의 强勸도 있었지만, 로마의 권력투쟁이 살벌하여 교황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고 생각한 클레멘스 5세가 아예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긴 것이다. 1377년까지 일곱 명의 프랑스인 교황이 아비뇽에서 집무한다.
1376년에 그레고리 6세는 아비뇽을 떠나 로마로 돌아가지만 그가 1378년에 죽자마자 곧 분규가 일어난다. 로마와 아비뇽에서 각각 교황이 추대되어 1417년까지 교황 2인 시대가 계속된다. 한때는 세 명의 교황이 각축했다.
아비뇽 시내에 우뚝 선 교황청은 '아비뇽의 幽囚(유수)'라고 불리던 시기에 세 교황에 의해서 30년만에 완성된 거대한 요새 같은 건물이다. 로마의 聖베드로 성당보다도 약200년 앞선 건물이다. 평면적이 1만5000평방미터이다. 이곳을 구경하는 것은 미로 탐험이기도 하고 등산이기도 하다. 옥상까지 올라가야 아비뇽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현대식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으므로 시계바늘이 60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론江을 넘어 있는 언덕에는 산탄도레 요새의 위용이 보인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이 건축물은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중세 요새로 꼽힌다.
유명한 아비뇽 연극제는 舊교황청 안마당에서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한다. 노트르담 성당, 쾰른 성당 같은 유럽의 오랜 교회는 문화재가 아니라 지금도 예배당으로 쓰이는 살아 있는 역사이다. 사람들이 역사속에서 숨쉬고 생활 속에서 역사가 꿈틀거리는 것이다. 유럽에선 역사가 박물관에 있지 않고 일상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비뇽 옆을 흐르는 론江은 거의 한강만큼 큰데 유명한 다리가 있다. 프랑스 민요 '아비뇽 다리'가 바로 이 다리를 노래했다. 聖베네제 다리인데 베네제라는 양치기 소년이 천사의 계시를 받고 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공사를 주도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다리는 1177년부터 8년간의 공사로 완성되었다. 길이가 900m이고 아치가 22개나 있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이후 일부만 보존되고 있다.
마르세이유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가는 론江은 수량도 많고 兩岸이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다. 코발트 색깔의 하늘과 더 짙은 강물, 그리고 잔디의 초록색이 성벽과 요새와 교황청의, 세월의 이끼가 낀 옅은 황토색과 어울려 환상적인 색감을 연출한다.
아비뇽은 교황청이 로마로 복귀한 뒤에도 교황의 직할령으로서 프랑스 대혁명까지 독립되어 있다가 1791년에야 프랑스로 합병되었다. 교황청의 직할령 시절 이 도시는 유태인이나 이교도들을 많이 받아들였다. 사기꾼과 범죄자들도 덩달아 이 도시로 몰려왔다.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이 수많은 戰禍(전화)를 당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도시는 700년이나 평화를 누렸다. 1721년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2만4000명 인구가 4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이 도시는 2000년에 '유럽의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다.
아비뇽에 머물면서 가 볼 만한 곳이 많은데 우리 尙美會 여행단은 버스를 타고 약30분을 달려 생 레미로 갔다. 빈센드 반 고호가 자살하기 1년 전에 1년간 입원해 있으면서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던 정신병원이 이 작은 마을에 있다. 이 병동은 관광지로 유명해져 1년에 200만 명 이상이 이 마을을 찾는다. 정신병동은 미술관으로 변했고 고호가 썼던 방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이 천재가 조금만 참았더라면 부귀영화를 누렸을터인데"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신병동 부근의 경치는 '추수하는 사람' '올리브 나무' '생 레미의 밤' 같은 그림에 있는 그대로이다. 그림에 먼저 익숙해져서인지 현실이 그림을 본떠서 생긴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생 레미 병동에서 고호가 그린 자화상을 들여다 보면 강한 의지력과 슬픔, 허무함, 그리고 초점이 잡히지 않는 맑고 푸른 눈동자가, 인간의 모든 고뇌를 다 진 일그러진 정신을 보여준다. 1853년에 네덜란드의 탄광촌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37년간의 생애를 방황과 실연, 열정과 광기를 넘나들면서 화가, 설교사, 교사로 살았다. 그의 그림에는 가난한 가족과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이 자주 등장한다. 탄광촌 설교사로서 광부들과 함께 생활했던 그의 순수한 마음을 반영한 것이다. 그의 백지 같은 순수함은 수많은 상처를 받는 화폭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그의 心像이기도 하다.
그가 파리에서 좌절하여 1888년에 프로방스에 내려왔을 때 네덜란드의 어두운 하늘에 익숙해 있던 그에게 프로방스의 태양과 광채는 하나의 구원이었다. 그가 프로방스 시절 2년간 그린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밝음은 태양과 달, 대낮과 밤의 광채이다. 한자로도 밝음은 明이라고 하여 태양의 밝음과 달의 밝음을 합쳐서 표현하지 않는가. 소설가 故李炳注씨가 '山河'라는 소설의 副題처럼 썼던 말이 생각났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고호의 그림을 보면 인간의 고뇌하는 정신을 절절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어빙 스톤이란 사람이 쓴 고호 傳記 소설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그가 프로방스로 불러내린 고갱에게 하는 말이다.
"난 태양을 그릴 땐, 사람들로 하여금 태양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싶어. 엄청난 힘을 가진 빛과 熱波를 내뿜는 태양을. 보리밭을 그릴 경우엔, 보리알 안에 든 원소 하나하나가 영글어터지는 최후의 순간을 향해 밀고 나아가는 것을 느끼게 만들고싶고 사과를 그릴 땐 사과의 즙이 표피를 밀고나오려는 것을, 중심에 있는 사과씨들이 그 자신의 결실을 맺기 위해 바깥으로 나오려 몸부림치는 것을 느끼게 만들고싶어. 한 인간의 초상화를 그릴 때 난 그 사람이 보고 행동하고 겪었던 모든 것, 그의 全인생의 흐름을 느끼게 만들고 싶소"
생 레미에서 그린 자화상이 바로 그런 그림일 것이다. 화폭 하나에다가 인생의 모든 것을 그려넣으려고 인생을 불사른 그의 그림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고 있지만 그는 돈도 명예도 인정도 받지 못하고 죽었다. 뒤늦게 천재를 알아본 사람들이 그 천재의 고뇌가 만들어낸 작품을 즐기면서 행복해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연고인가. 고호와 비슷한 상태에서 자살했던 조각가 권진규가 남긴 낙서가 생각났다.
<凡人에겐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천재에게는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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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호는 늦둥이 화가였다.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 것이 스물일곱 살 때였다. 그가 권총자살로 生을 마감하기까지의 불과 10년간 畵家 활동으로 남긴 작품은 엄청나다. 유채화 800점, 수채화·素描·스케치 등이 1000점이나 된다. 고호의 동생 테오는 畵商으로서 형을 경제적으로 도왔다. 1890년7월에 고호가 자살한 이후 고호의 작품은 동생 소유가 되었는데 동생도 여섯 달 뒤 사망했다. 고호 작품의 관리는 테오의 아내, 아내가 죽은 뒤에는 그녀의 아들에게로 넘어갔다.
1962년 유족들이 갖고 있던 작품들은 당시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빈센트 반 고호 재단이 사들였다. 구입자금은 네덜란드 정부에서 출자했다. 1973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반고호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반 고호 작품이 약630점(그림 230점, 데상 400점), 그밖에도 19세기의 유명한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이 같이 전시되고 있다. 고호의 居處를 따라서 네덜란드 시대 - 파리 시대- 아를르 시대 - 상 레미 시대 - 오벨 술 오와즈 시대로 대별되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고호의 기복 많은 생애를 한 눈에 훑어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 고호 미술관의 전화번호는 +31(0)20 570 5200이고 전자주소는 info@vangoghmusueum.nl이다.
암스테르담에서 동남쪽으로 약 두 시간 차로 달리면 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 안헴이 있고 그 주변은 국립공원 숲 지대이다. 이 한가운데 크뢸러 뮬러(Kroeller Moeller Museum) 미술관이 있다. 이 미술관에도 고호의 작품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生前에 불우했던 고호는
죽어서 암스테르담과 이 곳의 두 미술관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크뢸러 뮬러 미술관은 국립공원 안에 있고 조각 정원이 근사하다. 이곳을 찾을 때는 시간을 넉넉히 잡고 주변 경관까지 즐길 수 있도록 해야 아깝지 않다. 전화번호는 591-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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