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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綠野]바로크時代 會畵最高峰 루벤스

鶴山 徐 仁 2005. 8. 7. 18:55

 

 

 

바로크시대 회화최고봉 루벤스

17세기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년)는 자신의 생애만큼이나 화려하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처럼 정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예술가다.그의 그림은 따뜻한 색채와 능숙한 데생으로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이런 회화기법은 그 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화풍으로 평가되고 있다.

루벤스는 6개 국어에 능통하고 고전과 현대의 학문을 두루 섭렵한 사려 깊고 학식 있는 화가이자 외교관이었다.사람들은 화가로서 루벤스의 성공과 행운을 당대의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불운과 자주 비교하곤 했다.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삶에는 질서가 있었다.그는 매일 아침 화실로 가기 전에 예배를 드렸다.그후에 화실에서 하루종일 작품에 열중했다.이렇듯 예술가로서의 삶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했던 루벤스는 개신교인이었던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루벤스가 태어나기 전,스페인 지배하의 플랑드르는 극심한 종교적 박해를 받았다.신교를 추종했던 플랑드르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수형을 당했는데 루벤스의 가족도 그 박해의 희생자가 됐다.그런데 때마침 그의 부친과 신교도인인 왕실 공주의 은밀한 관계가 들통났다.공주의 간청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된 루벤스의 부친은 독일 쾰른으로 추방을 당했다.독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루벤스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부친이 죽자 어머니는 가족을 이끌고 플랑드르로 돌아갔다.그는 15세때 재정적인 어려움속에서 누이의 결혼지참금 마련을 위해 정규교육을 중단하고 왕실에 들어가 잔심부름을 시작했다.1년쯤 지났을까.그곳의 생활에 싫증을 느낀 그는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수업에 전념했다.여러 화실을 전전하며 화가가 되기 위해 기초를 닦았다.

루벤스는 1560년 이탈리아로 가서 8년 동안이나 체류했다.그때 그는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카라바조 등의 베네치아 화가들에게서 빛과 색채의 자유로운 기법을 터득했다.

이탈리아 유학중이던 그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그의 어머니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그때 플랑드르를 통치하던 스페인 합스부르크왕가는 그를 궁정화가로 임명했다.그 `황금족쇄'는 그에게 화가로서 명성과 부를 안겨주었다.

그무렵 그는 안트베르펜 성당의 주문으로 그 유명한 `십자가를 세움'(1610년)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1614년) 등 여러 연작을 남겼다.그중 `십자가를 세움'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는 장면을 역동적이며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하다.예수를 크고 무거운 통나무 십자가에 못박은 후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 여러 명의 장사들이 뒤에서 밀고 가운데서 받쳐 일으키며 앞쪽에서는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다.장사들은 거대한 체구에 울퉁불퉁한 근육과 힘줄이 튀어나와 잘 발달된 남성미를 보여준다.그리스도의 몸은 대각선상에 놓여 강한 조명을 받고 있다.그러나 무게 때문에 십자가는 곧 넘어질 것처럼 보인다.작품 전체가 강하고 힘찬 동작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간 육체의 긴장된 힘과 거대한 에너지 노출은 변하지 않는 루벤스 회화의 핵심이다.그러나 마치 줄다리기 시합 같은 인상을 주는 루벤스의 그림들은 종교적 경건성이 결여돼 있다는 비판도 받아야 했다.하지만 그의 명성은 절정에 달해 당시 루벤스는 그의 제자가 되고 싶어 지원한 사람들을 1백명 이상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합스부르크왕실은 그를 외교관으로 임명했다.그러나 왕실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외교관으로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외교관으로서 유일한 업적이 있다면 1630년 체결한 스페인과 영국의 평화조약.영국의 찰스1세는 천재화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루벤스를 영국으로 초청해 기사작위를 수여하고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명예학위를 수여했다.1630년 루벤스는 왕실로부터 사절임무를 맡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게 됐다.

그때 그는 “나는 그 어떤 호의보다도 더 힘들게 이 호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면서 “이제서야 나는 나의 사랑하는 직업 이외에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됐다”고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후 그는 말년을 고향에서 지냈다.낭만적인 시골생활과 풍경을 그리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그림 그리는 팔에 마비증세를 가져온 통풍으로 인해 1640년 숨을 거두었다.

풍부한 시적 감흥과 유려한 색채기법,유화물감의 자유로운 붓놀림으로 예술가로서 최고의 부와 명성을 누렸던 루벤스는 바로크시대의 최고봉이었다. /이강미 kmlee@kukminilbo.co.kr



[성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그리스도'
루벤스의 뛰어난 종교화중 하나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1614년·안트베르페성당 제단화의 중앙부분)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뒤에 예수가 십자가로부터 내려지는 것을 주제로 삼은 작품으로 `십자가를 세움'과 연결된다.

그리스도의 몸이 숨을 거둔 뒤 십자가로부터 내려진 것은 그날 저녁 때였다.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린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라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었다.그는 로마의 공회의원이었다.요셉은 예수의 가르침에 감화돼 스스로 제자를 자처한 인물이다.요한복음 19장에는 그가 십자가에서 예수의 몸을 내리려 하자 로마의 군병들이 죽음을 확인하고 다리를 꺾지 않았으나 그중 한 병사가 창으로 주의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그림의 사다리 오른쪽 중앙 아래에 있는 젊은 요한은 예수의 몸을 떠받치며 예수의 상처 입은 발을 응시하고 있다.막달라 마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예수의 다리 한쪽을 붙들고 슬픔에 젖어 있다.그녀의 뒤에 서있는 여인은 어머니 마리아다.그녀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차있으나 위엄을 잃지 않은 모습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사다리 위에 올라가 예수의 시체를 내리고 있다.한 사람은 입으로 세마포를 물었으며 한손으로는 예수의 팔을 쥐고 다른 한손으로는 십자가를 붙잡고 있다.왼쪽 인물은 마치 곡예사처럼 배를 사다리에 대고 한발로 사다리를 밟고 있다.그리고 전면 사다리 앞 쟁반에는 `가시면류관'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죄패가 놓여 있다.

이같이 많은 인물들로 등장시켜 극적이며 사실적으로 웅장하게 표현했던 화가는 루벤스 뿐이었다.극적인 빛의 효과와 인물들이 갖는 각기 다른 개성,표정과 동작의 풍요로움이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성화해설가 베일리는 “이 그림은 전세계 12개의 위대한 그림중 하나”라고 격찬하며 루벤스의 완벽한 기교와 강렬한 색채를 높이 평가했다.



 
가져온 곳: [행복/사랑/성공/예술/詩/經營/여행]  글쓴이: 綠野GreenField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