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통치 시절 잠복시기를 거쳐 1980년대 민주화운동 때부터 대학가와 지식사회에 침투해 교육과 선전에 치중했던 친북-NL세력은
한국 정부의 ‘햇볕’과 민족주의를 타고 힘을 기른 뒤 지금을 그 노출의 적기(適期)로 잡은 것이라고 한 남북문제 전문가는 말했다. 기존
재향군인회에 맞서는 새 예비역 조직을 만들겠다고 나선 어느 퇴역장성은 자신의 아버지가 남로당 출신임을 당당히 내세우고 있고, 맥아더동상 철거
시위에 나섰던 어떤 사람은 “그래, 나 빨갱이다. 어쩔래” 하고 소리질렀다고 한다. 어느 틈에 ‘우리민족련방제 추진위’가 구성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강정구 발언은 이전 상황들을 집약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제 친북세력은 당당하고 꺼릴 것이 없다는 태도다. 보수적 입장의
한 대학교수는 “이 다음 단계는 보수층과 우익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북한의 자신감에는 한국의 반미 기운에 염증을 느끼는 미국이 한국을 우회해서 북한과 직거래를 하려는 움직임도 크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주류세대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도와줬다고 믿었던 한국인들이 한국안보의 최대위협세력으로 미국을 지목한 데 큰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이들은 한국의 새 세대와 마찬가지로 6·25를 체험하지도 않았고 핵저지를 위한 또다른 전쟁을 원하지도 않는 세대다. 미국의
반(反)부시세력은 핵문제 해결과 인권개선을 위해서라면 북한과 직접 거래하고 협상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런 분위기가 이번
베이징 6자회담에서 실제로 실험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하고 있다. 한 남북관계 전문가는 “북한은 이번 6자회담을 통해 미국 등으로부터
한반도에서 ‘DPRK’의 지위를 공인받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고 했다.
미국은 그동안 기회있을 때마다 북한을 위해 미국이 ‘자제’해줄 것을 요구하며 6자회담의 성사를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인 것으로
내세우려는 한국 당국의 ‘허울 좋은 한·미공조’와 국내정치 이용 기도에 실망하고 또 식상해왔다. 한국의 좌파세력이 정치권력의 전면에 포진하는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한·미관계가 더 이완되고 미국의 동북아 영향력이 먹히지 않을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대비, 차라리
북한과 직접 거래해서 김정일 정권의 인정-보장과 경제지원을 내세워 핵과 인권문제를 도모하는 것이 한국을 통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이처럼 김정일 정권이 대남-대미전선에서 그들에게 유리한 호재(好材)를 만나 이를 극대화하는 정치공세를 펼 때 이것은 크게는 한국
전체에, 작게는 한국의 정통보수세력을 코너로 모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작금에 폭로되고 있는 안기부의 도청사태와 재벌·언론·정치권력의 유착을
보여주는 도청 내용들은 더더욱 좋은 배경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기회 포착이 한반도의 안정과 한국과의 평화공존에 기여할 것으로 보는 친북세력의 주장은 환상이다. “북한이 식량과 에너지라는 구조적 결함에서 벗어나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궁극적으로 한국을 통째로 깔고 앉는 것이라는 것이 김정일의 속셈”이라는 탈북자 김태산씨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북의 인권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고조되고 경제의 피폐와 주민의 식량기근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 05, 7, 31)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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