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버는 1930년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이었던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치에 반대해 고국을 떠난 아버지를 따라 다섯 살 때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그는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교육을 받은 뒤 24세 때 지휘자로 데뷔했다. 50, 60년대 취리히 오페라극장,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극장 등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오페라 지휘자 겸 콘서트 지휘자로 명성을 쌓았고 국적도 오스트리아로 다시 바꿨다. 70년대 이후 자유계약 지휘자로 세계 각지를 돌며 지휘대에 섰던 그는 개성 넘치는 작품해석과 함께 일체의 인터뷰를 사절하는 등 은둔적인 풍모로도 유명했다. 악단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도 실제 연주에서는 활화산과 같은 열기를 이끌어냈던 그는 바이에른 국립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4번(오르페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한 베버 오페라 ‘마탄의 사수’(DG) 등의 명반을 남겼다. 슬로베니아 언론들은 그가 17일 슬로베니아의 코니시카에 있는 부인의 묘 옆에 묻혔다고 보도했다.(동아일보) --최후의 마에스트로(거장)가 갔다.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74)가 최근 타계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난 6일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숙환으로 별세, 슬로베니아 출신 아내의 묘지 옆에 10일 안장됐다고 연합뉴스가 20일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의 언론을 인용해 보도했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클라이버는 유려하고 다이내믹한 ‘초서체(草書體) 지휘’로 음악팬을 사로잡았지만, 어느 오케스트라에도 ‘음악감독’이나 ‘상임’으로 얽매이지 않은 음악적 자유인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등 특급 악단의 러브콜도 “한 군데 매이기 싫다”며 한사코
뿌리쳤다. 36세부터 2년간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을 맡은 게 음악감독 경력의 전부다. 클라이버는 1930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명한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 부친이 나치정권에 항거하면서 1935년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수학했다.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가 ‘클라이버는 그 자신에게조차 수수께끼’라고 저서
‘거장의 신화(The Maestro Myth)’에 적은 대로, 수수께끼처럼 클라이버는 갔다.(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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