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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젠 우리 조선족들의 외침에 귀기울여 봅시다

鶴山 徐 仁 2005. 8. 3. 18:44
 

이젠 우리 조선족들의 외침에 귀기울여 봅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중국에 사는 교포입니다..바로 한국에서 말하는 조선족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교포 3세입니다. 사실 이문제 때문에 제가 다음아고라나 큰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올려서 이문제를 하소연 하려 했습니다.. 정말 애국자라면 끝까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말씀 드리면 윗분 말씀대로 역사는 대략 맞습니다..한반도하고 만주가 자칭 일본땅인

시절 만주는 맘대로 드나는곳이엇습니다...만주는 한반도와 달리 흑토(세계적인비옥지대)라서 벼농사가 아주 잘됩니다..한반도에서 땅을 잃고 재산을 뺏긴 우리 할머니 세대 사람들은 보따리 짐을 싸고..압록강을 건너 백두산을 건너 .......건너면서 고향쪽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돌아와 살겠다고 눈물 뿌렸다고 합니다.....


황해도 출신인 저희 할머니는 그때 생각을 하며 항상 구수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할머니가 그러시는데 그때 만주나 한반도에서 크게 나누면 서열이 3개 였는데..일본인들은 자국인들을 제일 서열에 놓고 우리민족은 둘째에 넣었다고 합니다..뙤놈들은 마지막이었다고 합니다..


마을에서 같이 순경 노릇하는 경찰들은 의외로 조선인들과 친했다고 합니다..속심말도 나누고 맛잇는 것도 나눠먹고요...반면 중국인들은 싫어하고...지어 쫓거나 폭력까지 일삼았다고 합니다...할머니는 그것은 중국인이 더러워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때 나라를 되찾으려는 큰 뜻을 품은 우리 젊은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윤동주와 그의 몇 동료였습니다...그들은 만주 용정(지금 연변에 있습니다)의 한 프랑스교회를 활동지점으로 삼고 항일구국운동을 하였습니다..교회만은 프랑스 관할 하에 있었기에 우리 젊은이들은 거기서 매일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부르며 조국을 찾을 결심을 굳혔다고 합니다..일본인들은 그냥 지켜보는 이상 아무 것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교포는 댁 말씀대로 남 취급받습니다...우리는 재미, 재일, 재외교포와 같이 그 나라 국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 비해 남 취급받는 이유가 있습니다..조선족이 만주에 와서 살던 시절 일본이 갑자기 미국의 2차대전 개입과 핵폭탄 사용으로 일본은 거의 하루 아침에 투항하다시피 했습니다..이때 만주의 적지 않은 조선인들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눈물 흘렸고 집으로 돌아가도 아무것도 없어서 조국으로 못 간다는 사실에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조선족이 조선으로 귀환하는 선택권을 가졌습니다..그때 얼만지 몰라도 적지 않은 사람이 조선(지금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저희 할머니네 역시 형제가 그렇게 갈라졌습니다..그런데 그 후가 문제입니다..중국정부가 건국을 선포하고 소수민족한테 정말 만족할만한 정책을 주었습니다. 연변을 조선족 자치주로 정하고 공무원 간부 모두를 우리민족으로 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입장에서는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니까 우리를 그냥 조선족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치주란 땅을 가지고 이 불모지에서 터전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조국이 둘로 갈라졌다는 것은 알았지만 지금처럼 될 줄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북한이 제일 잘 살았죠. 남한이나 중국보다 더 좋았으니까요.


우리는 그러면서 중국의 그 유명한 공산주의를 저도 모르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김일성이 남침하고 6.25가 발발하면서 미국의 남한에 대한 영향이 더 커지자 중국은 남한을 서방 열강들의 우방국이요 하면서 적대시 했습니다. 반면 북한은 중국에 있어서 전략적 방어점이었습니다. 모택동이 그때 아들을 잃는 댓가를 치르면서 항미 원조란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참전하자 중국이 가만 있을 순 없었습니다. 중국국이 조선반도에 들어가려니까 가장 조선에서 가까운 연변에서 모병을 많이 했는데, 우리 많은 조선족이 거기에 휩쓸려 동족 죽이기에 참가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도 중국군영장을 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강세로 북한의 남침이 예상외로 힘들어지자 원래 땅보다도 더 뺏긴 개성 일선까지 후퇴하면서 정전조약이 체결되고 중국군도 공산주의 마지막 방어선인 북한을 목숨을 이어준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누구도 그 정전 협정이 지금까지 이어질 줄 몰랐겠죠.


조선족은 그 이후에도 남한을 부정적으로만 배우게 됐습니다. 자본주의는 무조건 욕하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공산당의 종교에 가까운 중독성 교육을 받아 조선족은 점차 중국을 사랑하고 중국인임을 자호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나 생활습관이나 민속명절. 언어 등은 중국에서 계속 사용하게 했기에 김치나 찌개, 한복 여러 명절 모두 그대로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만큼 보존한 것도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말로 중국국가를 번역해서 부르게 했고 중국국기를 가슴에 새기게 했습니다. 중국은 우리에게 학교를 지어주면서 교과서도 우리말로 학교도 모두 우리말로 하게 했습니다. 물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걸 알기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애들의 교과서 한글자 빠짐없이 번역해서 가르쳤고 ,우리한테 조국은 조선이나 한국이라는 것은 무슨 말도 안되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조선과 한국은 우리 세대한테는 정말 순수한 외국이었죠. 참으로 웃겼습니다.


중국은 89년부터 개혁개방을 실시했지만 그 대신 공산당 집권을 강화하고 폭력행사를 인민들이 알게 모르게. 때론 쥐도 새도 모르게 행사했습니다.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이 그 희생자였죠. 그때 이미 북한은 점점 쇠퇴해졌고 남한은 그야말로 그럴듯한 신흥국가가 되었습니다. 한반도, 만주에 거쳐 분포된 세 한민족은 그야말로 서로 판이한 환경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92년에 중국한국이 수교를 맺으면서 중한 교류의 길이 열렸죠. 그때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이니까 그 뒤 수교 맺은 효과의 실감기간 5년을 감안할 때 저같은 경우 순수 공산당이 칭하는 공산주의후계자였죠. 중국 조선족이 한국에서 남 취급받은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그전에는 만날 기회가 없으니까 뭐 그냥 저 멀리 오랑캐 땅에서 우리 민족이 살고 있다 그 정도로 알았지만 한국인들이 중국에 투자하고 조선족들을 보러 오니까 그들의 변해있는 모습에 당황한 겁니다. 이 대목까지 역사적으로 볼 때 조선족도 어쩔수 없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그래도 그것을 인정하고 동포니까 많이 도와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수교후 한국으로 달려가서 불법체류하면서 돈버는 조선족이 많아졌습니다. 여태 중국서 태어나 중국교육 받은 세대인데 한국의 자본주의에 적응 할수가 없죠. 여러가지 불공평해 보이는 한국 세상에 불만이 많고, 싸우고, 충돌하고, 게다가 동포를 불법체류자로 잡으려하는 정부 때문에 서로간 불신과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국투자자들이 중국에 오면 언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사업 파트너를 조선족을 선택하면 소수의 조선족들은 돈 많은 한국인을 자본주의 나쁜사람이라면서 사기치고 돌려보내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불신의 씨가 되고 소문은 눈처럼 굴러 한국에선 이젠 조선족은 말이 한민족이지 생각하는 것 중국인이다...라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박혀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대목을 좀 딴 방향으로 나갑니다. 1998년전후 연변 청소년들의 에쵸티(H.O.T.)열풍 드라마 열풍으로 한국에 대한 생각이 점차 바뀝니다. 이렇게 재밌고 세련된 드라마들이 왜 갑자기 우리말로 나오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연변에 많은 투자와 개발을 하여 연변사람들도 부유층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위성티비 설치 열풍도 한때 연변을 강타했습니다. 물론 중국정부의 위성가마 찾아내기가 행사되고 벌금액도 많아지고, 그러나 지금은 유료 스카이라이프를 비롯한 여러가지 위성안테나가 거의 보급됐습니다. 한국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문화는 한국인들 못지않게 실시간으로 보게 된거죠. 제가 지금 대학교 1학년이니까 음...제가 고1때 아마 한일월드컵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반에서는 서서히 두개 파로 응원이 나뉘었습니다.


(참고로 저의 아버지는 민족시인입니다. 일찍 한국서 밀리언셀러도 출판했고 번역시, 창작시 등을 한국서 많이 출판했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래서인제 제 세대에서 찾기 어려운 민족주의 입니다.)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은 여학생들은 대부분 오! 필승코리아를 외쳤습니다. 남학생들도 대부분 한국, 중국같이 응원했습니다. 담임샌님도 한국을 응원하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반의 경우 좀 좋았던 거 같습니다.


제가 주위 또래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열에서 적어도6~7은 중국과 한국이 축구하면 중국을 응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강조 하자면, 지금 연변은 옛날과 많이 다릅니다. 한국문화침투의 견제도 정부가 이젠 포기했습니다. 스물다섯살 이상이면 절반 넘게 한국 다녀왔습니다. 저 역시 남북한 전역, 금강산 묘향산 설악산 다 다녀왔습니다. 한국에 대해 알건 다 알고, 민주에 대해 다 알고 우리가 한핏줄이고 뭐고, 암튼 알건 다 압니다.


여기서 저는 한마디 할려고 합니다. 칠천만 동포에서 중국교포를 포기해야 합니다. 중국교포인 제가 물불 안가리는 민족주의 청년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사태를 알아야 합니다. 저희 父子은 다 여기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주의입니다.


중국교포는 정말 남 취급받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한국인이 차별이 심해 남 취급하겠습니까? 그들도 지내보니 하는 말입니다. 정말 중국교포인 저로써는 안타까움을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북한관광을 할때, ... 물론 우리는 중국에서 왔다고 먹을것도 잘 주었습니다.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우리가 갔을때 호텔앞에서 반갑습니다 노래부르며 고국여행을 환영한다는 플랜카드는 나를 눈물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금강산 묘향산을 돌며 우리 아름다운 강산을 이제야 둘러보는 제가 미웠고. 우리땅이라 그런지 너무 좋았습니다.


김삿갓이 되어 시도 읊었습니다. 남한여행 역시 너무 좋았습니다. 우리는 역시 하나였습니다. 연변에 돌아오면서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게도 느껴졌습니다. 하다못해 나와같은 설레임과 비록 갈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조국이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못 느껴본 이들이 가여웠습니다..


200만 중국교포! 우리의 운명은 점차 중국에 동화되어 갑니다. 중국에, 뙈놈속에 녹아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연변의 아파트 열풍은 첨에 우리민족이 선도 했지만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운 중국인이 먼 내지에서 들어와 차지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연변에는 아직도 민족심이 끓고 있는 기업가, 그리고 연변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교수들...너무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조선족을 구해보고 싶지만 저는 어쩔 수 없는 스무살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구랑 도와 달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냥 그동안 맘속에 쌓였던 분노에 가까운 하소연을 조금이나마 했을뿐입니다. 이걸 읽으신 여러분의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조선족 ... 어찌하면 좋습니까? 노무현대통령께라도 물어 보고 싶습니다. 빨리 통일하면 국적은 없지만 한국 가서 살고 싶습니다. 엄마는 지금 한국에 계십니다. 저는 우리 200만을 개성만땅한 민족으로 중국에서 큰소리치며 살게 하고 싶습니다.


단결도 안 되고 말도 안 듣고...참 미칠 지경입니다.


글을 처음 쓰니 범벅이 되었습니다...휴,,,언제 조국땅에서 가슴 찡하게 태극기 바라보며 애국가 부를런지..........


[네이버지식IN을 검색하다가 어느 한 조선족동포의 글을 우연히 보게되었습니다]


글쓴이 :자남외아해


조회 : 6 스크랩 : 2 날짜 : 2005.07.18 21:40


( 위의 글은 다음 까페 백의민족 배달민족 한민족  cafe.daum.net/ahcorea에서 스크랩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