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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에는 두 마왕이 있었다. 한무제와 징기스칸.
한무제는 중국농경정착문명의 생산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제국을 건설했고, 징기스칸은 몽골 유목기마문명의 기동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제국을 건
설했다.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엄청난 파괴와 인명희생에 대해서 두 마왕은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 악마적 파괴와 살육, 현군의 건설과 관용,
이 두 가지 얼굴을 공유하는 것이 마왕이기에 이들은 통상적인 윤리와 평가를 뛰어넘어서 세계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람으로 우뚝 서있는 것이다.
18세에 즉위하여 서기전 140년에서 87년까지 53년간 황제 자리에 있었던 한무제는 북방초원의 흉노제국에 처음으로 결정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그 1천3백여년 뒤에 등장한 징기스칸은 흉노의 계통을 잇는 초원의 제국을 건설하고 손자대에 가서 북방 유목민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전토를 지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무제는 진시황과 한고조의 형식적 통일을 계승하여 내부적 통합을 완성함으로써 그 뒤 2천년간 계속될 국가체제의 모델을 만들었다. 무제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확정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노장사상, 법가 사상, 유학이 각각 국가경영의 방략으로서 각축하고 있었다.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관학으로 선택하였다. 유교만이 하 은 주에서 현세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체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유교만이 중국이란 무엇이며 중국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중국과 중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줄 수 있는 논리는 유교만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징기스칸도 몽골을 통일한 뒤에 '야사'라는 법률을 만들어서 무도- 무법천지의 초원에 질서를 가져왔다. 그는 위구르 포로를 시켜서 위구르 문자를 참고로 하여 몽골문자를 만들게 했다. 징기스칸의 이 두 발명 - 법률과 문자는 그 뒤 몽골인들이 정체성을 갖고 민족과 나라를 유지하도록 한 기본틀이 되었다. 징기스칸 자신은 문맹자였지만 몽골민 족에겐 세종대왕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한무제와 징기스칸은 위대한 시스팀 구축자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고조는 흉노를 토벌하러 갔다가 포로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전한의 황제들은 흉노와의 정면대립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무제 시절에 이르러 그 동안 축적된 국부가 모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조정의 재정에 여유가 생기고 창고에는 해묵은 쌀이 넘치며 동전이 쌓여 녹쓸고 있었다. 경제관료들은 이처럼 재물이 사장되면 경제가 불황에 빠지게 될까 걱정했다. 이런 때 전쟁을 일으키면 돈과 물자가 유통되고 이것이 고용을 창출하여 다시 생산을 증대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제는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수십만의 부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투항해온 흉노병을 선봉으로 삼았다. 내지에서 말을 길러 대부대의 기병을 양성하였다. 무제가 물량으로 밀어붙이니 흉노는 흩어져서 게릴라전으로 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제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20대 젊은 지휘관을 썼다. 황후의 동생 위청, 황후의 언니의 아들 곽거병, 무제가 총애하는 이부인의 오빠 이광리가 지휘부를 구성했다. 통계상 젊은 장군과 나이 많은 장군이 대결하면 젊은 편이 이긴다는 것 이 동서양 전사의 공통점이다. 무제는 지금 몽골지방에 근거지를 둔 흉노를 협공하기 위하여 지금 중앙아시아 지방의 나라들과 손을 잡으려고 했다. 장건이란 사람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으로 파견하여 외교교섭을 벌이게 했다. 장건은 13년만에 귀국하여 서역(지금의 신강성과 중앙아시아지역)에 관한 견문보고를 했다. 무제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 지방에서 나온다는 준마이야기에 특히 호기심이 동했다. 무제는 서역과의 통상을 장려하기로 결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흉노를 북으로 밀어 올리고 서역의 도시국가들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무역로의 안전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무제의 서역경영이 시작되고 실크로드라는 동서 무역로가 개통되는 것이다. 징기스칸도 전쟁과 경제를 잘 결합시킨 사람이다. 그는 몽골을 통 일한 이후 그의 주위에 몰려든 전사들에게 나누어줄 약탈물을 필요로 하게되었다. 남쪽의 금나라, 서쪽의 이슬람문명권 국가들이 그의 사정권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약탈물을 얻기 위해 시작한 정복전쟁은 너 무나 성공적이 되어 징기스칸은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경제통합과 팍스 몽골리카를 이룩했다. 징기스칸은 하느님을 모시는 샤머니즘의 신봉자였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의 모든 세계'를 정복하라는 사명감을 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사명감이 경제적 실익과 한 덩어리가 되면서 (마치 청교도정신과 자본주의의 윤리가 통합되었듯이) 그의 정복욕에 거대한 추진력을 부여하였다. 한무제는 북방의 흉노뿐 아니라 남쪽의 월남을 정복하고 동쪽으로 는 한반도까지 진출, 한사군을 설치함으로써 중국의 판도를 당시의 세계제국 로마 이상으로 넓히고 중국문명을 동서남북으로 확산시켰다. 서양의 로마와 동양의 한은 인류문명의 저수지가 되었다. 징기스칸은 북방유목민족문화에서는 금기가 되어 있었던 권력의 세습을 성공시켰다. 무제는 죽음이 다가오자 아들(소제)에게 제위를 넘기기 전에 생모 조씨를 죽여서 아들의 처족들이 발호하는 것을 차단하여 주는 악역을 자임했다. 권력과 제국, 두 마왕에게 있어서는 이 두 단어만이 정의였던 것이다. <1998년 1월 8일 주간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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