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사청산, 우리모델 아니다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 박지현 지음/ 책세상/ 184쪽
▲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 | |
1994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은 인문대 이름을 역사학자이자 레지스탕스였던 마르크 블로크의 이름을 따 마르크 블로크대로 바꾸려 했다. 이 대학은 ‘역사를 위한 변명’으로 널리 알려진 블로크가 역사학 교수로 첫걸음을 내딛었던 곳이었다.
‘행동하는 지성의 표상’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블로크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러나 뜻밖에도 부결됐다. 첫 번째 이유가 ‘교육의 소명을 버리고 책임회피를 위해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단다.
과거 청산은 역사 넘어선 인간의 문제
이게 무슨 소린가? 과거 청산의 모범국가로 불리는 프랑스 아니었던가.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를 최고의 명예로 여겨왔던 것이 프랑스 현대사의 ‘간판’임을 감안한다면 궁금증은 더해질 수밖에 없다.
이 당연하면서도 풀기 힘든 의문으로 인해 한국의 젊은 사학도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독일 점령하 프랑스 합법 정부로 존재했던 ‘비시 정권’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02년 서른세 살 때 ‘비시정권 연구’로 파리 1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지현의 주장은 우선 당혹스럽다. “1차 대전의 영웅 페텡 원수를 수반으로 한 친독 비시정권은 독일군에 의해 강제로 세워진 정권이 아니라 합법적 절차를 거쳐 세워진 자발적인 프랑스 정부다.”
박지현의 이번 책은 문고판에 가까운 소책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책에서 비시 정부의 실체를 분석하며 우리 역사에 ‘프랑스식 과거 청산’을 적용하는 것은 걸맞지 않다고 문제제기하는 것은 역사와 인간의 조건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저자는 드골판 프랑스 현대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치에 적극 협력한 후기 비시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전후 청산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단 그가 착목한 것은 “한국에는 비시 정권 같은 (친일)협력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 1944년 8월 25일 파리 해방 직후 독일군과 관계를 맺은 프랑스 여성을 벌거벗긴 채 끌고 다니며 조롱하는 파리 시민들, 주간 '파리 미치'는 이 사진을 가리켜 "영광의 나날 중 암울했던 시간들"이라고 지적했다. | |
“비시 정부는 1차대전 때 독일군에 대항해 싸운 전직 각료들이 스스로 참여해 세운 정부”라는 점에 그는 일단 주목한다. 박지현 씨는 자신의 이 같은 시각전환이 소위 ‘팩스턴 혁명’으로부터 영향받고 있음을 밝힌다. 팩스턴 혁명이란 미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오웬 팩스턴이 1972년에 출간한 비시정권 프랑스에 대한 대작 ‘비시정권’이 불러온 시각 변화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조차 “단절되고 배제되었던 비시의 역사를 프랑스 현대사 속으로 들여놓은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비시 정부 초기의 ‘좋은 비시’ 페텡의 정부는 좌우 대립으로 피폐화된 프랑스 정신으로 괜히 독일에 맞서려다가 재앙을 당하느니 일정한 타협을 한 후에 프랑스 정신을 되살리는 ‘민족혁명’을 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프랑스의 발전을 위해 훨씬 나은 길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비시의 민족혁명이란 ‘흙으로 돌아가자’는 자연공동체와 인간다운 노동자 실현을 지향하는 노동공동체를 핵심 골격으로 하면서 온건한 좌우파 지식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이런 민족혁명론은 히틀러의 공격으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극심한 좌우 대립에 절망감을 느끼던 지식인들이 주장해온 것들이며, 이들이 주장한 인격주의는 1940년 12월 7일 비시정부가 세운 학교 ‘에콜 뒤리아주’의 교과과정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비시 정부의 ‘회색지대 지식인들의 존재’를 끌어들인다면 우리도 ‘민족 개조론’을 주창했던 친일 지식인과 일제강점기엘리트를 옹호하거나 용서해주자는 논리가 나오는 것 아닌가? 저자 역시 이를 마음에 둔다. 그는 그 같은 논리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그것은 우리 문화 안에서 프랑스 역사를 왜곡하는 길로 다시 들어서는 일이다. 대독 협력에 대한 완벽한 과거청산의 모델로 프랑스를 꼽거나, 프랑스의 자발적 협력을 우리의 모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이다.”
▲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다음날인 1940년 6월 23일 히틀러 독일 총통(오른쪽)이 에펠탑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AP자료사진 | |
그에 대한 해답에 접근하는 길로 그는 독일-프랑스와 일본-한국(조선)의 점령/피점령 관계의 차이에 눈길을 보낸다. “점령이라는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수탈과 말살, 강제를 요구하는 철저한 식민지 관계였던 일본과 한국의 관계와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는 다르다.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 공동체에서 동반자적 관계였고, 독일의 식민지가 아니라 독일의 힘에 잠시 밀린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하나로 점령을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바로 그런 상황이었기에 프랑스 지식인들은 비시 정부에서도 인간의 삶을 위한 혁명을 시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을 우리 역사에 끼워 맞춰 친일파를 옹호하는 논리로, 혹은 용서해주는 논리로 탈바꿈시키는 일을 그는 ‘또 다른 역사 왜곡’이라고 경고한다.
결론은 무엇인가. “타자의 역사를 완벽한 역사로 바라보려는 우리의 인식이 결국 우리 안에 부재하는 과거 청산 문제를 왜곡” 시킬 뿐이라고 지적하는 그는 “우리가 과거 청산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 청산을 이루지 못한 자화상을 부인하고 현재의 관점에서 그 자화상에 덧칠을 한다면 그 역시 역사의 왜곡”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회색 지대 프랑스 지식인들의 존재가 분명 우리 역사에 던지는 시사점이 있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을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라는 이분법적 틀 안에서 이해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시대적 조류에 따른 인간 조건에 순응해야 했던 자들이 훨씬 많았다.… 고착된 이분법적 틀은 그 당시 삶에 근접하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이다.
억지로 끼워 맞추면 또다른 왜곡
저자는 ‘과거사 규명’과 ‘친일 청산’이라는 우리의 문제에 대한 프랑스 사례의 교훈을 이렇게 정리한다. “여전히 남과 북, 보수와 진보로 다시 대립을 빚고 있는 오늘날, 인간의 삶을 위한 혁명을 이루려는 회색지대의 한국 지식인들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인간의 비합리적이며 본성적인 모습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한 자들의 삶이 분명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용처: 조선일보 200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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