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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작가 畵壇

[스크랩] 밀레-<<봄>>

鶴山 徐 仁 2005. 7. 25. 11:25


<<봄>>

장 프랑수와 밀레 (Jean Francois Millet 1814.10.4∼1875.1.20)

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 1833∼18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37년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848년 살롱에 출품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루브르미술관 소장)은 그 후 농민생활을 그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18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이 시절에 T.루소, C.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詩的)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派)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1868년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주요작품 중 [씨뿌리는 사람](1850), [이삭줍기](1857), [걸음마](1858), [만종](1859) 등은 발표 당시부터 주목을 끌었으며, 만년의 가작 [봄]에는 빛의 효과에 있어서 인상파를 예고하였다. 그 밖에 [우유 짜는 여인],[저녁기도],[실 잣는 여인],[괭이 가진 남자],[젊은 어머니와 아기] 등이 있고, 소묘와 판화 등의 작품도 많다.

프랑스 자연주의(바르비종派) 화가. 그뤼시 출생. 가난했으나 신앙심이 깊고 애정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1837년 파리로 가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40년 살롱 전에 출품한 초상화가 입선되었으나, 장학금 지급의 중단으로 생활이 어려워져 로코코풍(風)의 나체화 등을 그려야 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F. 부셰· J.H. 프라고나르 풍(風)의 규방화(閨房畵)와 목가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었다. 또한 부드러운 필촉(筆觸)과 명암의 대비(對比)가 특징이었다. 이러한 화풍은 주제가 농민화로 바뀐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49년 콜레라의 만연을 피해 가족과 함께 바르비종으로 이주하면서부터는 거의 모든 그림의 제재가 농민의 일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밀레는 풍경적 요소를 인간에 종속시켜, 노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그린 바르비종파(派)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만년에는 단순화한 형체의 구성을 시도했는데, 진지한 종교적 심상이 표현되어 있는 그의 작품은 도덕적인 가치에서도 칭송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이삭줍기](1857), [만종](1859) 등이 있다.

밀레가 젊었을 때의 얘기이다. [접목하고 있는 농부]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당시에 밀레는 유독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막 화단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친구 루소가 밀레를 찾아왔다.

'기뻐해주게 밀레, 자네 그림을 살려는 사람이 있네''뭐라고? 그게 정말인가?'그때까지 무명에 불과했던 밀레는 친구의 말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해 했다. 그러나 루소는 돈을 꺼내며 밀레가 그리고 있던 [접목하고 있는 농부]란 작품을 지목했다.

'구매인은 급한 일 때문에 못 왔지만 그림의 선택은 내게 맡겼다네. 저 그림을 내게 양도해주지 않겠는가?'그러자 밀레는 흔쾌히 허락하며 기쁨에 젖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소가 내민 300프랑은 그때 당시 엄청난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밀레는 가난을 잊고 그림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밀레가 루소를 찾아갔을 때 루소의 방 안 벽에 자신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밀레가 보고 그제야 비로소 밀레는 친구 루소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벗의 생활고가 보기 딱했지만, 그보다도 벗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루소의 마음을... 그래서 루소는 밀레의 그림을 다른 사람이 사는 것처럼 자신이 사주었던 것이다.

밀레의 생애와 작품세계I. 밀레에 따라 다니는 오해밀레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은 결코 그의 예술의 어떤 총체적인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의 작품에 근거하고 있다. [만종]과 [이삭줍기] 같은 작품이 그런 일부의 작품에 속하는데, 이 작품들은 밀레의 예술을 대표해주면서도 한편 밀레를 부단히 통속적인 예술가로 만들게 하는 요인의 그것이기도 하다. 중. 고등학교의 교과서에서부터 산간 벽촌의 음식점이나 이발소에 이르기까지 그 복제품이 퍼져있는 편이고 보면, 가히 이 작품들이 지니는 대중화라는 것은 그 예를 찾을 수 없게 하고 있다. 이 점으로 볼 때 밀레는 이 작품들로 인해 유명해진 반면, 자신의 많은 부분을 잃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도 밀레의 예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작품들을 에워싸고 있는 통속적 의미를 떨구어 버리는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이 보인다. 이 작품들이 유명해진 것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그만큼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과는 다르게 이 보편성은 그대로 통속적으로 결론지어지는 경우가 바로 이들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든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 가령 르노아르의 누드화들 같은 작품들도 일반들이 좋아하는 보편성을 갖고 있는 그림임에도, 그것을 쉽게 통속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유독 밀레의 경우가 예외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회화적 가치 이외에, 지나친 종교적 의미나 사회적 의미가 부연된 나머지,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보편성에 기인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들 작품 속에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만을 강조했을 때 작품이 지니는 예술성은 그만큼 윤색(潤色)될 수 있고, 따라서 통속적인 것으로 떨어질 위험을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II. 流派를 초극하는 보편성이 예술이 갖는 영원성이기도밀레의 생애를 보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농촌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한때의 도시생활을 제하고는 화가의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농촌에 파묻혔으며, 그가 즐겨 그린 것도 그의 생활 주변의 농촌과 농민들의 생활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밀레는 농민화가이며, 그의 중심 작품들도 농민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지역의 풍속화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들은 시대 나 지역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근대 프랑스 자연주의의 일파란 특정한 유파를 초극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의 그림에 따라다니는 통속적인 위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예술이 지니는 영원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곧 그가 단순한 한 시대의 특정 그룹에 머물지 않는 지속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풍속적 의미 이상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영원 한 경외감과, 노동에 대한 신성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II. 철학적인 깊은 省察이 종교 화가로서의 위치를밀레의 예술은 자연으로 향한 깊은 철학적 성찰로 이룩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곧 자연이나 대지로 대변되는 영원한 것에 대한 경건한 태도이며, 그를 단순한 자연주의 화가가 아닌 종교화가로서의 위치로 끌어올리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밀레와 자연과의 관계는 그의 출생에서부터 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성격 형성은 깊은 종교적 감화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814년 10월 4일, 노르망디의 코탕탕 반도 끝에 있는 조그만 마을 그뤼시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경건한 카톨릭교도인 조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가 태어나던 해는 나폴레옹이 실각하여 에바섬으로 유배되던 해이기도 한데, 미술계에선 다비드와 제리코 등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엇갈리고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그의 소년 시절엔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았다. 셰익스피어, 괴테, 바이런, 위고 등의 문학 작품을 독파한 것도 소년 시절이었다. 그러나 20세를 넘어서부터 부친이 사망하고 많은 가족을 부양해야했고, 50세가 넘을 때까지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난 후는 심한 육체적 병고로 고통을 겪었는데 평생 밀레는 고통 속에서 산 셈이 된다. 그는 생전에 어느 정도 명성을 누리긴 했지만, 가난과 병고로 인해 평생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그의 끝없이 고요하고 경건한 그림들은 이 고통 속에서 제작 된 것이었다.

IV. 새 地平을 열어 보인 진정한 현대적 화가밀레의 농민화에서 발견되는 뚜렷한 몇 가지 특성은 대지로 수렴되는 끊임없는 수평의 구도와, 이에 대차되는 인간의 의지로서의 수직적 요소들이며, 또 대지와 인간의 화합에서 생겨나는 평화와 안정으로서의 끝없는 정적(靜的) 분위기다. 밀레에게 있어 미술의 목적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현실을 표출해내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당대의 풍조에 휩쓸려 정치적 오해까지도 받았으나 결코 부유한 계급에의 시기도 도전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농부 속의 농민으로서 자신을 보았으며, 농부들의 삶 속에서 영원을 확인하였을 뿐이다.'어째서 농부의 삶과 죽음이란 것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남는가'라고 한 넋두리 가운데서 우리는 또 한번 그의 영원의 개념을 확인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 어디서 퍼온글인데 어딘지 기억이 나질 않는 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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