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과학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관이
아닙니다. 삶과 사회에서 두 가치관은 항상 중첩돼 있습니다. 다만 종교나 과학이 집단의 이념이나 제도가 돼 독선적·독단적 태도를 가질 때 문제가
생깁니다.”
지난주 미디어다음 기자와 만난 서울대 종교학과 정진홍 명예교수(사진)의 말이다. 그는 최근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의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해 일부 종교계와 과학계가 이견을 보이고 있는 데 대해 이같이 견해를 밝히며 말문을 열었다.
정
교수는 이어 “종교와 과학이 독선과 독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승패의 논리를 떠나 삶과 사회의 문제들을 논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이때 종교는
과학을 사랑하고, 과학은 종교 앞에 겸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교수는 특히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직접 황 교수를 만나
줄기세포 연구의 범위를 논하기까지 한 가톨릭계에 “가톨릭은 황 교수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권고하기도 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불치병 환자를 돕는 일은 비단 과학만 관심 갖고 있는 일이 아니다”며 “가톨릭이 이 일에 과학 못지않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황 교수를 지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아울러 줄기세포 연구의 범위를 법으로 정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선택적인 결정을 해 과학을 침묵시키는 셈”이라며 “이는 좋은 해법이 아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황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가 향후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올 것이라는 일부의 기대에 대해서는 “참 못된 생각”이라며 “황 교수의 연구를
이용해서 겨우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잘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천박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정 교수는 2003년까지 20년 넘게 서울대
종교학과에 재직하면서 종교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종교학 연구에서 정 교수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가히 독보적.
다음은 정 교수와 한 일문일답이다. |
“종교와 과학, 대립하는 가치관 아니야” “삶과 사회 속에 두 가치관은 항상 중첩돼
있어”
- 황 교수의 연구 성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저도 황 교수가 다시 한 번 큰일을 해냈다는 뉴스를 보고는
무척 기뻤습니다. 또 열심히 노력해서 그런 업적을 이룬 황 교수와 황 교수 연구팀 구성원들이 참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몇몇 종교인들은 황 교수의 연구를 ‘살인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황 교수와 정 대주교가 만나
표면적인 갈등은 해소한 듯도 보이지만, 배아줄기세포 연구 문제 등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 사이의
오랜 갈등이 다시 불거지고 있는 듯도 느껴집니다.
그런 소식을 전하는 기사들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왜 자꾸
종교와 과학을 대립하는 가치관으로만 인식하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사실 종교와 과학은 사람의 삶과 사회 속에 항상 중첩돼 있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을 놓고 생각해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종교의 세계에도 속해 있고 과학의 세계에도 속해 있게
마련입니다. 삶과 사회 자체가 본디 종교와 과학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 교수 역시 신실한 불교신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황 교수의 내면세계에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종교인이면서 과학자이고
과학자이면서 종교인인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왜 자꾸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얘기하는 것일까요. 물론 현실 세계에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종교와 과학이 일종의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갈등을 빚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어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종교와 과학은 각기 사람의 삶과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끌어온 ‘서술 방식’일 뿐인데, 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완결된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종교와 과학은 언제 어디서든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인데도 몇몇 종교인과 과학자들이 때로
종교와 과학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완결된 그 무엇으로 잘못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와 과학, 집단적 이념 되면 문제” “제도가 된 두 가치관, 독선·독단적 태도
가질 때 위험”
- 그런 착각을
바로잡는다고 종교와 과학의 갈등이 없어질지 의문스럽습니다. 다른 더 직접적인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종교와
과학의 갈등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교와 과학이 스스로 ‘자기완결성’을 갖추면서 완벽한 그 무엇이 되려는 것 역시 종교와 과학의 한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과학을 보면, 과학은 과학으로서 자기 영역과 자기 언어, 자기 방법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추구하고
지향하는 자기만의 가치가 있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도 나름대로 자기 영역과 언어, 방법론, 지향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개인의 처지에서는 과학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을 넘나들고, 과학의 언어·방법론과 종교의 언어·방법론을 때에 따라 골라 쓸
수 있습니다. 또 과학이 지향하는 가치와 종교가 지향하는 가치를 함께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와 과학이 각기 집단적인
이념이 되면 문제가 간단치 않습니다. 집단의 이념이 된 종교와 과학이 스스로 완벽한 그 무엇이 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종교와 과학은
자신들의 영역에 대해 ‘배타적인 주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즉, 종교와 과학 모두 다른 가치관에 의해 침해받는 것을 못 견디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가 과학으로부터, 과학이 종교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침해받았다고 느끼게 되면 이들은 자신들이 사람의 삶과 사회에서
중첩돼 있다는 것은 잊고 갈등을 빚게 되는 것이지요.
- 종교와 과학이 일종의 제도가 됐을 때 생기는 문제점을 지적하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종교든 과학이든 두 가치관이 집단의 이념이 되고, 각각의 집단에서 제도적 권위가 생겨나면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일은 일종의 제도가 된 종교와 과학이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태도를 가질 때 생깁니다.
종교와 과학이
이처럼 제도가 되면 항상 ‘자기완결성’이 상처를 입을까봐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종교는 교리가 손상당할까봐, 과학은 탐구의 독립성이 손상당할까봐
걱정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두 가치관은 끊임없이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발생하는 큰 문제는 종교와
과학의 이런 독선과 독단이 결국 인간 개개인의 삶의 진실들을 가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삶의 현실적 문제들 대신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는
종교와 과학의 ‘주권’ 문제가 현실에서 더 진지하게 다뤄지게 되는 것이지요.
“종교와 과학, 승패 논리 떠나 논의해야” “종교는 과학을 사랑하고, 과학은 종교에
겸허해야”
- 그렇다면 종교와 과학이
참으로 사람의 삶에 이로우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종교는 물론이고, 과학도 이미 사회의 중요한 제도가 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든 과학이든 이제까지 해왔던 대로 계속하면 곤란합니다. 자기가 절대선이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종교는
악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와 과학이 서로 승부를 벌인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대하면 절대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번 황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 문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에서도 종교와 과학은 승패의 논리를 떠나 논의를 해야만 합니다.
쉽게 말해, 황 교수와 정 대주교의 만남도 황 교수가 이겼느냐, 정 대주교가 이겼느냐 하는 데 관심을 두고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종교와 과학이 이번 논의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각기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상대와 협조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런 논의는 종교와 과학이 사람의 삶과 사회에 중첩돼 있는 가치관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제 얘기가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가 종교의 본디 자리를, 과학이 과학의 본디 자리를 잊지
않고 현실의 독선과 독단을 반성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종교와 과학은 끊임없이 치열한 자기 고뇌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 그런 건설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종교와 과학이 극복해야 하는 점은 서로 다를 것 같습니다. 종교와 과학의 경우를
나눠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과학의 경우부터 얘기하겠습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사실의 세계를
탐구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을 탐구하기만 하는 것이 과학의 본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탐구해서 발견해낸 사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과학은 비로소 온전한 모습이 됩니다.
즉, 과학은 스스로 발견한 사실이 사회에서 올바른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예컨대 황 교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줄기세포 연구에 ‘불치병 환자 치료’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황 교수의
연구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황 교수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실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본인이 발견한 사실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 사실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야만 과학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일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반대입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의미의 세계를 탐구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종교 역시 의미를 탐구하기만 하면 온전한 모습을 갖출 수 없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사실로 구현되지 않은 의미는 공허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종교가 사랑에서 큰 의미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의미만 발견할 뿐 이웃사랑조차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과학이든 뭐든 현실적인 도구를 이용해 탐구한 의미를 현실 속에서 사실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런 뜻에서 종교는 과학을 아껴야 합니다. 과학마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현실화되지 못해 공허하게 되기 쉬운
종교의 의미들을 사실로 만들어주는 좋은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과학을 통해 인간이 더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도울 수가
있습니다.
다만 이때 과학에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과학은 이런 종교 앞에 겸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사실에 너무
매몰되면 의미를 보지 못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종교는 과학을 사랑하고 과학은 종교 앞에 겸허하면 두 가치관이
두루 사람의 삶에 이로울 수 있습니다.
“법으로 과학 침묵시키는 것, 좋은 해법 아니야” “줄기세포 연구가 가져올 경제적
이득? 그건 참 못된 생각”
- 이제 줄기세포 연구 논란과
관련해서 더 구체적인 사안을 여쭤보겠습니다. 일부에서는 법을 제정해 줄기세포 연구의 범위를 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독일·프랑스 등에서는 법으로 줄기세포 연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법을 만든다는 것은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선택적인 결정을 해 한쪽을 침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과학을 침묵시키는 셈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좋은 해법이 아닙니다. 법으로
줄기세포 연구를 금지하면 과학자들은 외국으로 나가 연구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렇듯 과학적 탐구를 억제할 수 있는 힘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결국 사회가 과학을 통제하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 앞서 말했듯 과학이 발견해낸 사실의 의미를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찾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활발한 논의가 과학을 올바르게 이끕니다.
안락사 문제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의사들은 안락사의 범위를 법적으로
정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가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살인을 했다고 처벌받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호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변호사들은 법으로 안락사의 범위를 정해주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살인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따라서 변호사들은 안락사 문제를 매번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논의하고 논쟁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도대체 언제까지 논쟁을 해야 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대답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끊임없이 논쟁하면 그
문제에 대한 사회 전체의 인식 수준이 높아지게 돼 있습니다. 안락사든 줄기세포 연구든 사회가 그 문제를 더 현명하게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 줄기세포 연구가 가져올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지금과 같은 생명윤리 논쟁이
참 답답해 보일 것입니다. 종교가 쓸데없는 방해를 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건 좀 따끔하게 지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경제적 이득이라니요. 그건 참 못된 생각입니다. 황 교수의 연구를 이용해서 겨우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잘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천박합니다. 게다가 이런 천박한 얘기에 일침을 놓는 이도 없는 현실은 안타깝습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과학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
사실에 올바른 의미를 부여해야지만 사회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만약 황 교수가 발견한 사실에 우리가 경제적 이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데
그친다면 이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그런 논리는 지양돼야 합니다.
종교가 과학의 발전을 쓸데없이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도
얄팍한 인식입니다. 이건 종교와 과학을 서로 대립하는 가치관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생각입니다. 종교와 과학은 논의와 논쟁을 통해
함께 발전해 나아가는 가치관들입니다.
불치병 환자를 돕는 일은 비단 과학만 관심 갖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가톨릭을 비롯해 많은
종교들이 이 일에 과학 못지않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은, 이런 오해를 씻기 위해서라도, 황 교수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만
합니다.
만약 가톨릭이 연구비까지 지원해 황 교수의 연구를 돕는 자세를 가진다면 소모적인 갈등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 가톨릭은
황 교수를 도우며 연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고 함께 올바른 방향을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가톨릭은 황 교수를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도와야 합니다.
“종교, 사회 속에서 매개체 구실해야”
- 정
교수님께서는 평생을 바쳐 종교를 공부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요즘 종교의 올바른 모습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있는 사회에서 종교가 구심점 구실을 해야 한다며 종교의 사회통합기능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오히려 사회를 해체시킨 적이 더 많은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 종교의 기능을 가만히 보니, 종교가 사람들 속에서 삶과 사회의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가 이제 여러 영역의 사이사이를 흘러 다니면서 일종의 매개체 구실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정치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경제가 의미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종교가 조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삶과 사회 속에서 매개 기능을 하는 종교의 모습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