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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과 그리움

鶴山 徐 仁 2026. 4. 23. 19:43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과 그리움

 

고영석  2026.01.06 12:47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과 그리움

 

38살 기혼자인 청마 유치환은 29살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를 사랑했다.

세간은 플라토닉 사랑이라 한다.
청마와 정운이 처음 만난 곳은 각각 국어교사와  가사교사로 있던 통영여자중학교 

이때 이영도는 17세에 결혼하여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 하나가 있었다.
단아하고 지적인 이영도를 청마는 흠모했다. 또 그녀의 오라비가 당시 유명한

이호우 시조 시인이었으니 문학적 관심도 인연이 되었으리라.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 눈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미련하다 우십니까?

 

ㅡ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청마를 향해 움직였다.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기에 직장이나 집에서 편지를 쓰기보다 우체국에서 쓰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영도 역시 연민을 입 밖으로 내어놓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훗날 '연인'이라는 시로도 알려진 시조가 '무제 無題'였다.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
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드는
유리문 밖으로
연보라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고
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ㅡ  우편국에서 / 유치환

 

통영우체국(현 통영중앙동우체국)의 문패를 청마우체국으로 바꿔달기 위한 개명작업이 추진 중

(* 지하철 4호선 '상록수역'은 최초 '용신역'으로 추진했다가 변경한 것입니다)

이 우체국은 현재 통영중앙우체국으로 청마거리와 함께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이지만 이들의 플라토닉적(?)인 사랑은 오래 이어지고 깊었다.

편지는 청마 유치환이 1967년 2월 귀가 중 버스에 치여 별세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영도는 연모 어린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이영도는 이 편지 중 200통을 추려 1967년 출간한다. 


청마의 '행복'이라는 시에서 한 구절을 따온 제목의 책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이다.

 

무제1(연인) ㅡ이영도(1916~1976)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 시를 읽으면 황진이와 서경덕이 주고받은 시조가 생각난다.

어쩌면 사제라는 한계가 있었던 황진이보다 기혼남녀라는 한계가 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들의 공통 주제는 그리움으로 통한다.

 

그리움ㅡ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아래 거리건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긴 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다
오오~
너는 어디에 꽃같이 숨었느뇨

 

그리움 ㅡ   이영도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어느새 가슴 깊이 자리 잡은
한 개 모래알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그리움(2) ㅡ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누구나 간직하는 그리움이 있다.
대개는 아득해지는 먼 그리움은 잔잔하고 부드럽다.
가장 강력한 그리움이 있다면 지금의 사랑이 사라졌을 때일 것이다. 
혹여 그것이 아픔이라면 고통을 수반한 그리움이니 아늑하지 않겠지만.

청마가 죽고 이영도가 서간집을 내었을 때는 행복이 아니라 

과거 행복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 책을 부여잡고 조용히 몇 번이고 울었을 것이다.

 

둘러보면 어느덧 황혼
스치는 건 바람의 깃
빈손으로
빈 가슴만 누르는 종일

ㅡ시조시인; 이영도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보면 청마가 이영도에게 보낸 글은

1946년부터 시작되었지만 1950년 6.25가 나면서 시대를 감당하기 어려워 그

때까지의 편지들을 몽땅 불살랐다는 것이 최계락의 ‘머리말’에 밝혀져 있다.

최계락은 그 정황을 이영도의 말을 빌어 적고 있다.

"그때의 편지야말로 그대로 시요, 문학이었다고 말하는 정운(이영도)여사는

6.25 피란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청마의 일방적인 애정에 자기는 어디까지나

우정으로 자처해 왔었는데 피란을 가서 대한천지가 위기에 놓였을 때

재회의 기약 없는 청마의 안위를 기도로서 달래며 비로소 그와의 정분이

단순한 우정만이 아닌 애정임을 자인할 수 있었노라고."

 

이영도는 수필 「유성」에서 “일찌기 나는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흐르는

별똥을 향해 아픈 기원을 나누어 왔다. 우리들의 목숨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서 멀고도 창창한 영겁의 길을 동반할 수 있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본의 아닌 배신을 그는 저질렀고, 남은 나는

함께 우러르던 그날의 성좌를 버릇처럼 우러러 섰다.”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처음 이영도는 '편지는 공개할 문서가 아니며, 더구나 책을 발행하는 것은

가당치 않는 일이다' 라고 완강히 반대했으나 유치환의 사후 몇 명 여성이

자기가 받은 편지를 동료문인들에게 내놓으며 청마와의 은밀했던 ‘관계’를

말하기에 이영도는 문단의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즉 유치환과 진실한

사랑을 나눈 사람은 오직 자기 한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본인이 갖고 있던

수천 통 편지 중에서 일부를 『주간한국』의 기자 이근배 시인에게 주어

기사화를 시킴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뒤인 1967년, 이근배 시인이 중앙출판공사의 편집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이영도 시인으로부터 200여 통의 편지를 넘겨받아 서간집을 냈으니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이다.

 

이 출판사의 대표는 최계락 시인으로서 서간집의 발문을 쓴다.

책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 당시로는 기록적인 판매 부수 2만 5천 부를

출판하게 되는데, 이영도는 책의 인세수입 또한

우리나라 시문학발전에 전액 기부한다.

 

출처: 공감 사랑방 |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과 그리움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