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좋아하는 '만해 한용운' 대표시 12편 모음

나는나무 ・ 2026. 2. 5. 17:59

소이 밀크
Soey Milk
South Korean, b. 1989
Thoughts to Make Love to and Sleep With
2019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깨치고: 깨달아 사물의 이치를 알게 되고,
혹은 '깨뜨리고'의 잘못.
* 미풍: 약하게 부는 바람.
*정수박이: 정수리.
머리 위의 숫구멍이 있는 자리,
혹은 사물의 제일 꼭대기 부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사랑하는 까닭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길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발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사랑
한용운
봄물보다 깊으니라
갈산秋山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수繡의 비밀
한용운
나는 당신의 옷을 다시 지어 놓았습니다.
심의도 짓고 도포도 짓고 자리옷도 지었습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적은 주머니에 수놓는 것뿐입니다.
그 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습니다.
짓다가 놓아두고 짓다가 놓아두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아프고 쓰린 때에 주머니에 수를 놓으려면, 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러고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널 만한 무슨 보물이 없습니다.
이 적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는 것입니다.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 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복 종
한용운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사랑의 측량
한용운
즐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봐요.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와 두 삶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양을 알려면, 당신과 나의 거리를 측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적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
뉘라서 사람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하여요.
당신이 가신 뒤로 사랑이 멀어졌으면, 날마다 날마다 나를 울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어요.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여름밤이 길어요
한용운
당신이 계실 때에는 겨울밤이 쩌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에는 여름밤이 길어요
책력의 내용이 그릇되었나 하였더니 개똥불이
흐르고 벌레가 웁니다
긴 밤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긴 밤은 근심바다의 첫 물결에서 나와서 슬픈
음악이 되고 아득한 사막이 되더니 필경 절망의
성(城) 너머로 가서 악마의 웃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시면 나는 사랑의 칼을 가지고
긴 밤을 깨어서 일천(一千) 토막을 내겠습니다
당신이 계실 때는 겨울밤이 쩌르더니 당신이 가신
뒤는 여름밤이 길어요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나는 잊고자
한용운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지도 말고 생각도 말아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당신이 아니더면
한용운
당신이 아니더면 포시럽고 매끄럽던 얼골이 왜 주름살이 접혀요
당신이 기룹지만 않다면 언제까지라도 나는 늙지 아니할 테여요
맨 츰에 당신에게 안기던 그때대로 있을 테여요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기까지라도 당신 때문이라면 나는 싫지 안하여요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의 뜻대로만 하서요
나는 곧 당신이어요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상자속에 숨기고 싶은 그리움
한용운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않은
어느 햇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만 머물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람 같은 자유와
동심 같은 호기심을 빼앗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게만 그리움을 주고
내게만 꿈을 키우고
내 눈 속에만 담고 픈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내 눈을 슬프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작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을 담기에도
벅찬 욕심 많은 내가 있습니다.
*출처 시집: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한용운은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이다.
호는 만해(萬海), 만해(卍海)다.
1879년 8월 29일(음력 7월 12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출생했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홍성 한용운 생가지
1896년부터 속리사, 월정사, 백담사 등에서 불경을 공부했다.
서양 서적들을 통해 서양의 근대사상도 접했다.
1903년 세계일주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를 거쳐 귀국, 석암사를 거쳐 백담사에 입산,
1905년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08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임제종대학에서 6개월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조선불교유신론> 독립기념관

《유심》 1호
친일승려 이회광 일파가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1910년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자,
이에 분개하여 1911년 승려대회를 개최, 친일불교의 획책을 폭로하고 저지했다.
조선불교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조선불교유신론』(1913)을 발표했다.
1918년 『유심』을 창간, 주재했고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 신상 카드.
조선총독부가 감시 대상에 올린 인물 4,858명 대해 작성한 것이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앞선 수형기록표와 대조했을 때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일본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협하고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사진을 이용했다. 1929년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사상운동자 명부 작성"에 수집된 사진만 2천여 장이며, 1920년 7월부터 1935년까지 전과자의 범죄 수법과 지문, 그리고 사진을 모아놓은 자료는 35만 4,736매에 달했다. 그들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요주의 인물은 그 주변까지 면밀히 조사하고 관찰했다.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 준비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했다.

<3·1 독립 선언서> 유관순기념관
1922년 출옥 이후에는 각지를 돌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강연을 했고
1924년 불교청년회의 총재에 취임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흑풍』(1935), 『후회』(1936), 『박명』(1938) 등 장편소설과 한시, 시조를 발표했다.

한용운 소설 『흑풍』(1935)
1927년 신간회의 발기인이 되었고 경성지부장을 역임, ‘조선불교동맹’과 ‘만당’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1931년 『불교』를 인수 ‧ 간행하여 불교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였다.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서울 성북구)
1933년 서울시 성북구에 심우장을 짓고 거주했다.
총독부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44년 5월 9일 중풍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1962)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경기광주 만해기념관
… 중략 …
1967년 파고다공원에 비가 건립되었고

'용운당만해대선사비', 서울종로구 탑골공원
1973년 『한용운 전집』(전6권)이 간행되었다.

『한용운 전집』(전6권)
경기도 광주시에 만해기념관이 개관했고,

만해기념관, 경기 광주
한용운이 머물렀던 설악산 백담사 아래 마을인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만해마을이 조성되었다.

인제 만해마을, 출처: 꽃보다 쏠(블로그)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생가 근처에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가 있다.

한용운 사당 만해사, 충남 홍성
만해문학체험관도 건립되어 한용운의 삶과 문학세계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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