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21일 일본을 방문한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도쿄 총리 관저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를 면담한 자리에서 이시바 총리에게 엔비디아 GPU를 선물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한 반도체 업체 고위 임원은 한국 반도체 위기를 새삼 절감한 최근의 경험을 들려줬다. 최첨단 반도체 기술 경쟁에서 대만 TSMC에 밀리고 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저서 ‘칩워(Chip War)’로 유명한 크리스 밀러 미 터프츠대 교수가 지난 4월 미 밴더빌트대학에서 ‘인공지능(AI) 시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주제로 한 강연을 유튜브에서 봤다고 했다. 밀러 교수는 중국에 대항하기 위한 미국 중심의 반도체 동맹 결성 움직임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 대목에서 대만·일본·네덜란드를 주요 대상국으로 거론하면서 한국은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밀러 교수가 이 세 나라를 동맹 대상으로 꼽은 근거는 분명했다. 대만은 AI용 최첨단 반도체의 95%를 생산한다. 일본은 ‘신에쓰’와 ‘섬코’ 같은 기업이 전 세계 고품질 웨이퍼(반도체 원판)의 56%를 담당하고, 포토레지스트(일종의 감광액) 등 핵심 소재 분야에서 압도적 경쟁력을 보여준다. 최첨단 반도체 공정의 핵심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 공급한다. 미국은 최첨단 반도체 설계와 소프트웨어 분야를 장악함으로써 이 모든 공급망의 최상단에 위치해 있다.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의 약 60%를 장악하고 있다. 핵심 AI 반도체인 HBM(고대역폭 메모리)도 거의 90%를 한국이 생산한다. 그런데 왜 한국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못 받을까? 반도체 고위 임원은 “미국 테크업계에선 한국의 메모리를 대체 가능한 양산품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며 “최근 마이크론(세계 3위인 미국 메모리 업체)의 약진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낮아지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지난달 미 트럼프 정부의 대중 반도체 제재가 강화되자,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중국을 방문한 후, 일본에 들러 이시바 총리와 면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의 정국 상황이 정상적이었다면, 그는 한국에 왔을까? 중국·대만을 수시로 방문하는 황 CEO가 한국을 공개적으로 방문했다는 보도는 아직 없다. 미 정부와 엔비디아가 추진 중인 미국 내 ‘AI 반도체 공급망’ 구축도 미·대만 기업 중심이다. 오픈AI·아마존 등 미국 주요 기업들이 일본을 아시아 거점으로 삼아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다. 업무상 매일 보는 외신에서도 한국 반도체를 다루는 뉴스를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이 중국에 맞선 ‘기술 동맹’을 일본·대만 중심으로 구축하는 기류가 갈수록 뚜렷해 보인다.
한국 반도체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은 주력 산업 위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과거 국제 관계에선 그 나라의 지리적 위치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한국이 서방 동맹에 편입된 것도 중국·러시아의 턱밑에 있다는 지정학(geopolitics)적 요인 때문이었다. 최근엔 한 국가가 보유한 기술력이 국제 관계에서 지리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이른바 기정학(技政學·technopolitics)이다. 최첨단 기술은 그 자체로 군사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국제 관계에서 한 국가의 위상을 대변한다. 정상회담 같은 외교 행사에 기업인이 동행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 보유 기술의 전략적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았을 때,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뻔하다.
그렇다고 한국이 “셰셰(감사하다는 중국어)”라며 중국의 기술 동맹에 들어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첨단 기술만큼은 단순한 산업·경제 정책이 아니라, 국가 전략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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