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칼럼]‘덜 하기’에서 ‘더 하기’로… 풍향 바뀌는 ‘일자리’ 시대정신
- 동아일보 업데이트 2024-11-19 23:212024년 11월 19일 23시 21분 입력 2024-11-19 23:21
EU 보고서 “노동시간 감소가 美에 뒤진 원인”
日 알바 근무시간 늘리려 ‘103만 엔 벽’ 허물기
韓 반도체 R&D 인력 주 52시간제 예외 추진
글로벌 경쟁 속 달라진 ‘싸움의 법칙’ 적응해야
박중현 논설위원
“사람 수 많아봐야 소용없어요. 기술 개발 마지막 단계에선 몇몇 핵심 인력이 얼마나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립니다.” 20여 년 전 방문한 한 대기업 연구소의 소장이 들려준 얘기다. ‘시라소니’ 같은 싸움꾼들이 수십 명과의 난투에서 살아남는 비결로 ‘적이 많아도 상대는 결국 주변 4명뿐’이라고 했다던 ‘싸움의 법칙’을 연상시키는 말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한국이 글로벌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리튬이온 배터리, 유기발광다이오드 같은 기술이 모두 이런 식으로 개발됐다. 그 소장은 연구원들이 노닥거리는 시간이 아깝다며 커피 자판기 전원 줄을 가위로 자르고, 추석 연휴에 귀향 중인 연구원 차를 돌리게 해 일 시킨 일화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지금이라면 ‘갑질 상사’로 낙인찍히고, 주 52시간제 위반으로 고발됐을 것이다.
최근 한국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초격차 경쟁에서 뒤처지는 이유로 예전과 달리 핵심 인재들도 필요한 만큼 일할 수 없게 만드는 여건을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신제품 출시가 코앞이어도 주 52시간 규제에 맞춰 오후 6시면 연구실 불을 끄고 퇴근할 수밖에 없어서다. 여야가 입법을 추진 중인 ‘K칩스법’에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넣어 달라고 산업계가 요청하는 이유다.
제조업 강국 독일에선 요즘 근로자의 과도한 ‘병가(病暇)’가 논란거리다. 전기차 업체 테슬라가 독일 공장 직원들이 너무 자주, 그것도 금요일에 집중적으로 병가를 낸다는 이유로 직원 집을 불시에 찾아 꾀병 여부를 확인한 게 계기였다. “테슬라 공장은 인원이 부족하고, 작업량이 많아 병가가 많은 것”이라고 금속산업노조가 반발하자 메르세데스벤츠 최고경영자(CEO)가 “독일의 높은 병가율은 기업 입장에선 문제”라며 테슬라 역성을 들었다.
독일 근로자의 1인당 평균 연간 병가 일수는 19.4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과도한 병가가 없다면 마이너스 0.3%였던 작년 독일의 경제 성장률이 플러스 0.5%로 높아졌을 거란 분석도 있다. 두 달 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의뢰로 ‘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낸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미국과의 경쟁에서 유럽이 뒤처진 이유로 첨단 산업에 대한 투자 부족, 낮은 생산성과 함께 노동시간 감소를 꼽았다.
지난달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얻지 못해 야당과 연정을 통해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게 된 일본 자민당의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요즘 청년, 주부의 알바 근로시간 연장을 가로막는 ‘103만 엔(약 930만 원)의 벽’과 씨름하고 있다. 자신을 다시 총리로 만들어준 연정 파트너 국민민주당의 총선 핵심 공약이 ‘103만 엔 벽 허물기’였기 때문이다.
103만 엔은 일본에서 23세 미만 대학생 자녀가 알바로 돈을 벌었을 때 부모가 부양 공제를 받을 수 있는 연소득의 상한이다. 그 이상 벌면 연말정산 때 공제를 못 받는다. 지금은 150만 엔으로 높아진 배우자 공제 기준도 예전에 103만 엔이었기 때문에 이 선을 직원들의 배우자 수당 지급 기준으로 삼는 기업이 많다. 통상 하루 4∼5시간, 주 3∼4일 일하는 주부, 청년 알바가 근로시간을 늘렸다가 소득이 이 선을 넘으면 가족 전체로 볼 때 경제적으로 손해여서 더 일할 의지를 꺾는 제약이 된다는 비판이 많다.
한국에선 주 5일, 15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에게 휴일 하루 치 일당을 더 주도록 하는 ‘주휴수당’이 일본의 103만 엔처럼 근로시간 연장 기회를 막는 벽이다. 주휴수당은 근로 여건이 열악하던 1953년 일본의 법을 베껴 만든 제도로 전 세계에 몇 안 되는 나라에만 남아 있다. 높은 최저임금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려는 자영업자가 많아 ‘15시간 미만 초단기 알바’는 한국 파트타임 일자리의 표준이 됐다. 수입이 더 필요한 근로자는 따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한국은 선진국 중 최장 근로시간의 오명을 벗기 위해 덜 일하고, 더 많은 여가를 제공하는 유럽식 근로 형태를 지향점으로 삼아 왔다. 지금도 야당과 노동계는 ‘주 5일제’로도 부족하다며 ‘주 4.5일제’를 요구한다. 하지만 선진 각국은 다른 나라보다 강한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개인들은 더 많은 경제적 보상을 위해 근로시간을 늘리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럼프 정부의 ‘정부효율부’ 수장을 맡은 일론 머스크가 “주 80시간 일할 용의가 있는 초고지능(super high IQ) 혁명가를 모집한다”고 한 건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일자리와 관련한 시대정신이 빠르게 바뀌는데 한국만 다른 길로 가선 곤란하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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