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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社會 關係

[박성희의 커피하우스] 정치적 개인이 '메뚜기떼'와 싸운다면

鶴山 徐 仁 2024. 8. 2. 10:59

오피니언 전문가칼럼

[박성희의 커피하우스] 정치적 개인이 '메뚜기떼'와 싸운다면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입력 2024.08.02. 00:02

일러스트=이철원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한 1만 시간 훈련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정치에는 적용되지 않는 게 분명해 보인다. 1만 시간이면 하루 3시간씩 10년, 하루 10시간이라면 3년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29세 때 최연소 상원 의원에 당선되어 팔순에 이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거의 정치의 신(神)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런 그도 주변의 조언과 압력으로 재선 도전을 포기했다. 자신의 야망보다 국가와 당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변을 내세우긴 했지만, 정치는 결코 개인기로 돌파할 성질이 아니라는 걸 노장이 모를 리 없다.

겉으로는 강하고 개성 넘치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난달 중순,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나흘간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를 밤낮없이 중계하는 폭스TV를 우연히 지켜본 나는 대회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열띤 표정과 분위기, 서른 명이 넘는 지지자 연설의 반복적 레토릭을 들으며 트럼프(혹은 그와 유사한 사람)를 강하게 열망하는 미국의 얼굴을 보았다. 트럼프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의 도구에 불과하다면 과한 표현일까. 아무튼 ‘트럼프의 미국’이 아니라 ‘미국의 트럼프’라는 표현이 새삼 와 닿았다.

정치 지도자는 종종 자신의 어떤 부분이 빼어나서 그 자리에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 자신을 불러내고 만드는 건 시대정신이고 국민이며 지지자들이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노력한다고 특별히 더 잘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지지자와 지도자의 역동성 측면에서 한국을 따라올 나라는 지구상에 드물다. 정치 경력이 몇 개월에 불과한 신인들을 불러내 대통령도 만들고 당대표도 만드는 나라니까. 지금 대통령도, 또 압도적 지지율로 선출된 여당 대표도 모두 정치라는 상자 밖에서 커 온 의외의 인물이다. 우리 국민의 정치적 상상력은 늘 우리를 놀라게 한다.

1차 경선에서 62.84%를 득표해 당대표에 선출된 한동훈 대표는 당선 소감에서 “제가 잘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우리 국민의 정치적 역동성의 법칙에 따르면 한 대표는 더 잘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한동훈이 한동훈 하면 된다’. 여당 지지자들은 ‘한동훈이 한동훈 하기를’ 원해서 선출한 것이지, 더 잘하라고 뽑은 것이 아니다. 노력한다고 더 잘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인간이란 어차피 딱 자기의 크기만큼만 잘할 수 있다.

우리말 표현 중에 가령 “손흥민이 손흥민 했다” 같은 말은 사람들의 기대에 딱 부응했을 때 쓰는 말이다. 우리는 ‘손흥민이 손흥민 하기를’ 원할 뿐이다. 이 말을 정치인에 대입해 보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유권자는 “윤석열이 윤석열 하기를” 바라며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그 기대가 어긋나자 지지율이 하락했다. 적어도 여당 지지자들은 “이재명이 이재명 할까 봐” 그걸 막기 위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아마도 한동훈 대표 선출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국회 법사위원장 정청래는 탄핵 청문회에서 ‘정청래 했고’ 과방위원장 최민희 역시 방통위원장 인사 청문회에서 ‘최민희 했다’.

고유명사를 순식간에 동사로 바꿔 말하는 그 표현의 묘미는 뜻의 중의성(重義性)에 있다. 애초부터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들은 반대로 “윤석열이 윤석열 할까 봐” 당시 이재명 후보를 찍었을 것이다. 그들은 ‘정청래가 정청래 해서’열광하고, ‘최민희가 최민희 해서’ 지지한다.

지난 여당 전당대회가 설전과 폭로전으로 얼룩졌다고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청탁이) 개인 차원이었다고요?”라고 발끈하는 나경원 후보나, “제가 잘하겠습니다”라고 하는 한동훈 대표의 말에서 모처럼 ‘개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인은 근대성과 합리성의 출발점이다. 한 대표는 ‘저는’ ‘제가’라는 일인칭 화법을 즐겨 쓰고, “더 경청하고, 설명하고, 설득하겠다”고 했다. 또 “저는 그동안 논쟁을 피하지 않아 왔다” “당원들을 논리로 설득하겠다”고 했다. 설득, 논쟁, 경청은 수평적 관계를 상정한 화법이다. ‘동료 시민’도 그런 개념에서 파생한 것이리라. 비슷한 무렵 지역순회 경선에서 이재명 대표가 90%가 넘는 압도적 지지율을 얻은 야당에서는 비록 작은 소리였지만 “집단 지성이 아니라 집단 쓰레기” “우리가 메뚜기 떼인가” “당원들은 표 찍는 기계” 같은 자성론이 나왔다. 곤충이나 기계에 빗대어지는 야당 전당대회보다는 설전하고 시끄러운 여당의 전당대회가 더 인간적 아닌가.

문제는, 초반에 언급했듯, 정치는 개인적 역량보다 시대적 상황과 지지자의 함수이고, 설득이나 논쟁 같은 개념은 생각하는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소통이라는 점이다. 경청이란 서로 말을 주고받는, 같은 언어를 교환하는 사람들 사이에 하는 일이고, 설득은 스스로 태도를 바꿀 유연성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하며, 논쟁은 논리와 증거를 받아들이고 논쟁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된 소통 방식이다. 무엇보다 그런 소통은 ‘생각하는 수평적 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수직적 집단’은 설득이 아닌 ‘선동’ 대상일 뿐이다.

근대적 개인은 계몽주의를 이끌고 근대를 열었지만, 정치에서는 맹목적 집단주의가 성공한 사례가 역사에서 새롭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가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익숙했다면, 지금부터는 ‘개인 대 집단’의 대결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모처럼 싹을 보인 ‘정치적 개인’이 전체주의라는 ‘폭풍’을 넘어설 수 있을지. 기대와 우려를 안고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