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 지성으로 불린 이어령씨가 지난해 2월 세상을 떠났을 때 “이제부터 죽음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다짐하던 6년 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그 작업을 끝내고 삶을 마감한 인생의 승자였다.
생로병사라는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점에서는 다른 이와 같은 패자였을지 모르지만 웰다잉의 좋은 모델로 남았다는 점에서는 역시 승자였다. 그는 끝까지 존엄을 지켰다. 이어령의 사후 1주기를 맞아 17년 동안 가까이서 지켜보며 기록한 메모를 참고로 그의 인생 종반의 흔적을 두 차례로 나눠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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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의 세 번째 월요일 저녁.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하 존칭 생략)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도착한 J 박사와 이야기 중이었는데 분위기가 어두웠다. 이어령은 한 달 전 서울 평창동 그의 사무실에서 마주 앉은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속 시원하게 설명해 줄 만한 좋은 의사 없을까요. 내가 암 투병 중이요.
신문사 퇴직 후 이곳저곳에서 웰다잉 강의를 하러 다니던 중 나는 그가 앓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그와 J 박사와의 만남을 다시 주선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이어령은 딸 이민아 목사가 몹시 아팠을 때인 2011년 7월에도 저녁 식사에 나를 초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어령은 암 치료를 둘러싼 궁금증을 풀어 줄 의사의 조언을 간절히 희망했다.
현역 기자 시절 여러 문화행사에서 어쩌다 한 번씩 그와 대면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틈은 없었다. 자주 마주하게 된 것은 중앙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한 지 1년여가 지난 2001년 초부터였다. 그가 중앙일보 고문으로 영입되면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얼굴을 보게 되었다.
편집국과 논설위원실 등에서 여러 보직을 거쳐 퇴임한 뒤까지 만남은 17년간 이어졌다. 편집국장 시절에는 주요 간부들과 함께 매주 한 차례 그와 점심을 같이 하며 21세기 초에 벌어진 세상사의 이모저모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고, 귀에 솔깃한 아이디어는 일선 기자들의 취재를 거쳐 신문 제작에 반영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이어령은 기자들의 현장 감각과 문제를 보는 시각을 존중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넘치는 메시지와 주변 사람의 개성을 압도하는 화제 독점 탓에 슬슬 합석을 피하는 간부들이 늘었다. 그때 나는 오히려 그와의 단독 점심이나 티 타임 횟수를 늘렸다. 끝없는 질문을 던지며 가끔 그의 칼럼에 이런 내용을 녹이기도 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2015년 촬영한 사진이다. 중앙포토
몇 년 후 내 딸과 아내가 차례차례 말기 암 환자로 신음하고 있을 땐 대체의학에 관한 여러 정보를 알려주며 마음 깊은 위로로 나를 감싸 주었다. 세월이 흐르며 서로의 입장이 몇 차례 바뀌기도 했다. 그의 딸 역시 병마에 쓰러지고 5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이번엔 이어령 자신이 암과 싸워야 하는 긴급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어령이 나를 찾은 건 암 진료에 관해 솔직한 의견을 들려줄 의사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주치의가 아닌 다른 전문가로부터 두 번째 의견을 참고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그마저 지난해 2월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내가 암과 싸우는 처지가 되었으니 우리는 서로 다른 삶과 죽음의 이모저모를 돌아가며 겪는 셈이다.
2017년 내가 이어령에게 처음 추천했던 J는 웰다잉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독특한 의료인이었다. 미국에서 25년 동안 암 연구와 치료에 전념해 왔고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일하며 지켜온 명의라는 이름값 때문에 구원을 외치는 암 환자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J의 항암 치료를 받으려면 2년 이상 기다려야 했다.
그는 의사이면서 토속적이고도 철학적인 화두를 자주 던지는 말재주꾼이라 이어령의 시선에 딱 꽂히기 좋은 인물이었다. 이를테면 말기 환자 가족이 그에게 “최선을 다해 주세요, 모든 것을 다 맡기겠습니다”라고 하소연하면 “아뇨, 그렇게 맡기면 나중에 찾아갈 게 없어요. 나도 별로 할 게 없고요”라고 답변했다. 어차피 말기 단계에서는 환자 스스로가 웰다잉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을 넌지시 던지곤 했다.
남의 차 얻어 타고 험한 길에 들어서면 심한 차멀미를 하다 쓰러져요. 그러나 본인이 직접 운전하면 그런 일이 없어요. 제발 다른 사람 차 타지 말고 자기 차로 가세요.
환자들이 암 치료받는답시고 죽을 둥 살 둥 엄청난 고통 속에서 허덕이지 말고 스스로 삶을 정리할 수 있는 편안한 방법을 찾으라는 경고를 그런 식으로 전달했다. J는 말기 암 치료의 최종 단계에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존엄사를 강조해 온 흔치 않은 의사였다. 나는 이어령에게 그의 평소 생각을 미리 설명해 두었다.
암 투병 끝에 지난해 2월 26일 별세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사진은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놓인 영정. 중앙포토
식사가 시작되면서 이어령은 자신의 여러 가지 증상을 소상하게 나열했다. 각종 검사 중 겪는 고통과 갖가지 상념도 덧붙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할 일이 참 많아요. 지금 20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책도 여러 권 써야 하고 방송 프로그램도 있고….” 유창하던 그의 말이 여기서 그쳤다. 한참 후에 그는 “이게 그동안 내가 병원에서 받았던 검사 자료와 의무기록 사본”이라고 말하며 가지고 온 봉투 속에서 서류를 꺼내 J 앞으로 내밀었다.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흐르면서 저녁 식사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J는 한 페이지씩 서류를 넘길 때마다 이어령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고는 한참 후 아무런 수식어도 붙이지 않은 채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말했다.
장관님, 암을 이대로 놔두시면 어떻습니까. 그냥 이대로 사시면서요. 나는 암 환자가 아니다고 생각하시고 일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3년 사시게 되면 3년치 일하시고 5년 사시게 되면 5년치 일만 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게 치료 방법입니다.
나는 J가 그토록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무나 확실하게 쏟아낸 말이었다. J의 권고안은 오래전 그의 딸이 선택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어령은 “허, 참” 하고 가볍게 웃어넘겼다. 세상에 가장 긴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내는 언어마술사 이어령에게 J는 가장 짧고 쉬운 문장으로 설명했다. 나는 참으로 잘 조화된 질문과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이어령의 긴 질문은 서류 속에 있었고 J의 답변은 인생을 다 산 할아버지의 농축된 식견처럼 표출되었다. 이어령은 한식 요리를 먹으면서 마지막에는 하얀 밥에 나물 조금, 그 위에 고추장 한 숟가락 듬뿍 넣고 참기름까지 주룩 흘려 넣어 비빔밥을 만들었다. 침묵의 식사 시간을 메우려는 듯한 이어령의 재빠른 즉석요리 솜씨를 J는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어령은 그때 어떤 암 환자 이야기를 꺼냈다. 가장이 중병에 시달리면 가족들의 속내도 복잡하게 얽힌다는 것이었다. 환자를 둘러싼 세상의 단면을 우스갯소리로 풀어내자 우리 셋이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한참 후에 J가 자신의 소견을 마무리하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말기 환자가 머릿속에 담아 두어야 할 삶의 주제였다.
장관님, 저는 환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살기 위해 치료받을 것인가, 치료받기 위해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고요. 환자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 다릅니다.
이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요.”가 유일한 코멘트였다. 언제나 긴 문장이었던 그의 말솜씨에 변화가 생긴 것을 나는 주목했다. 그의 눈 가장자리가 젖어 있었다. 헤어질 때 그가 내민 손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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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최철주
-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
- c_project@joongang.co.kr
- 동양방송(TBC)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중앙일보 경제부장·일본총국장·편집국장·논설위원실장·논설고문 등을 역임했다. 정년 퇴직 뒤 칼럼니스트와 '웰다잉' 강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해피엔딩,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이별서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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