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백성들아 들을지어다 왕상 22:24-36

鶴山 徐 仁 2022. 2. 8. 06:34

백성들아 들을지어다 왕상 22:24-36

 
 
 
02월 08일 (화)
   
백성들아 들을지어다 왕상 22:24-36


24.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25.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26. 이스라엘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27.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28.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29.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30.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
31. 아람 왕이 그의 병거의 지휘관 삼십이 명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32.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그들이 이르되 이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왕이라 하고 돌이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는지라
33. 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34.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35.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36. 해가 질 녘에 진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각기 성읍으로 또는 각기 본향으로 가라 하더라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지 아니 하셨으리이다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28절).
미가야에게는 왕의 지위나 권력, 그리고 다수 백성들의 주장이나 눈앞에 닥친 어떤 위협조차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하거나 더 우위에 있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그가 여기서 <너희 백성들아 들으라>며 외친 것은 저들을 일종의 증인으로 호출한 행위였습니다. 즉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아합의 패배 소식이 들리면 그 결과가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증거하도록 백성들을 각성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주도하는 핵심은 서로 하나님의 계시임을 주장하는 두 선지자 세력 간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의도에 봉사하는 거짓 선지자와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참선지자 간의 대립과 갈등을 가리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는 있으나 궁중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인간의 뜻이었고, 미가야의 선포는 인간보다는 하나님의 의지였습니다. 


한편 이런 차이를 이 시대에 확대 적용해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도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지만 그 모든 선포가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그들의 사역이 누구의 이익과 무엇을 위한 봉사인지를 신중히 관찰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집단적 이기심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점검해볼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 아닌 것이 복음 행세를 하는 경우를 방지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 대해 갖는 교회의 자기비판의 신성한 의무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29절).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을 묵살한 채 아합이 <길르앗 라못> 정벌을 감행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패망의 길로 접어드는 아합 왕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악인이 패망의 길로 행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둠>이 때로는 곧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라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때로 인간의 헛된 탐욕과 악령의 미혹이 결합하여 패망으로 향하게 되는 비극조차도 실은 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용인 아래 있다는 것이 오늘 이 본문이 말씀하는 주요 요지입니다. 물론 이 때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두실 뿐이지 악을 능동적으로 주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시드기야가 미가야 선지자의 뺨을 친 이유는 무엇입니까(24절)?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27절)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아합 왕이 변장을 하고 전투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30절)?
 
주님, 아합 왕이 미가야의 예언을 묵살하고 유다 왕 여호사밧과 함께 기어이 길르앗 라못 정벌에 나섰습니다. 왕복까지 벗고 일개 군사로 변장을 하고 나섰지만 결국은 <그날에 전쟁이 맹렬하여>(35절) 부상을 당했고,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일만큼 많은 과도한 출혈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전쟁은 처음부터 아합의 욕심 때문에 시작된 것일 뿐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했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아합처럼 완고하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때 당하게 되는 재앙과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확인하고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때를 놓치면
 
“《사기》에는 때를 놓쳐 몸을 망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
장한다. 명장 한신이 그랬고 월나라의 대부 문종이 그랬다. 반면 범려와
장량은 최고 절정기에 욕심과 미련을 버리고 깨끗하게 물러나 심신이
편한 상태에서 삶을 마감했다(중략).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김영수 저(著) 《나를 세우는 옛 문장들》 (생각연구소, 326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뱀한테 물리면 빨리 상처를 끈으로 감아 독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상처는 작지만 치료할 타이밍을 놓치면 죽음에 이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뒤집지 않은 전병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
이로다.” (호7:8)


적절한 타이밍에 호떡을 뒤집지 않으면 한 쪽은 새까맣게 타버리고, 한
쪽은 설익어 버립니다. 타버린 쪽도 못 먹고 설익은 쪽도 못 먹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눈에 비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뒤집을 기회, 헌신할 기회, 회개할 기회를 모두 놓친 암담한 상황이었
습니다.
“해가 있을 때 건초를 말려라(Make hay while the sun shines)”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쇠는 달구어졌을 때 망치를 내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어져 세 배 네 배의 힘을 더해 망치질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응답하고 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집지 못해 타버리고 설익은 쓸모 없는 전병이 됩니다.
   
이사야 3장 11절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Woe to the wicked! Disaster is upon them!
They will be paid back for what their hands have done.
Isaiah 3:11 [NIV]
   
부르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 계획에 제대로 안착해 있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때 영혼 깊은 곳에서 무언가 혼란을 겪는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 천국 이편에서 누구도 완벽하게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을 들을 때 전쟁은 시작된다. 이 여정은 좁은 길을 따라 이어진다.
-래리 크랩의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 중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대입니다. 잘 분별하여 믿는자의 도리가 세상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앞에 수도 없는 고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우리지만 이것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