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방해꾼들 스 4:1-6

鶴山 徐 仁 2021. 12. 3. 11:03

 

방해꾼들 스 4:1-6

 
 
12월 03일 (금)
   
방해꾼들 스 4:1-6


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듬해 이월 꿈에도 그리던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 위해 기초를 놓고 기뻐하며 감사하며 대성통곡을 한 것도 잠깐, 사마리아에 살던 사람들이 그 성전 재건을 방해하고 나섰습니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4절).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일에는 반드시 이런 방해가 따릅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사람들을 충동질하고 부추겨 하나님의 전 역사를 훼방합니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1절).
본문의 <대적>이란 <차레이>라는 히브리말로 해를 끼치기 위한 목적으로 접근해 오는 <원수>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렇듯 선한 일에도 꼭 대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분명 선한 일인데도 낙심이 된다고 합니다. 포기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같이 이루어진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업에도 만만치 않은 대적자들이 나타난 걸 보십시오. 그들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을 고발하며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 선한 일을 막았습니다. 
<...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글을 올려 그들이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을 고발하니라>(5-6절).
그래서 결국 거의 16년 동안이나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그 대적자들의 방해는 단순히 성전 재건만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일은 결코 중단될 수 없습니다. 성전은 반드시 건축되고야 맙니다. 오히려 성전 재건을 방해한 세력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성도들은 사탄의 방해 책동에 굴하거나 물러서면 안 되고 오히려 믿음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성도들이 사탄의 훼방에 겁을 먹거나 위축되어 멈칫거리는 동안에는 성전 건축에 아무런 진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대적자들의 집요한 훼방과 악랄한 방해를 물리치고 반드시 승리하시길 기원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낙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전을 재건하는 일에 여러 대적자들이 나타나 방해하고 고발하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스라 시대 사마리아 사람들은 왜 유다인들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막고 훼방했을까요?
 
주님, 놀랍게도 하나님의 전을 재건하는 일에도, 기적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한 선한 일에도 대적자들이 나타나 방해하므로 심각한 낙심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다시 한 번 저희의 믿음을 가다듬습니다. 부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거나 하던 선한 일을 멈추는 사례가 없도록 저희를 깊이 깨우쳐 주시옵소서.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고 하셨사오니 끝까지 견디며 이기며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하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과거’에게 먹이를 주지 마십시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느 식당 뒤편에 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개들은 주방장이 남긴 찌꺼기를 먹고 음식에 대한 평가를 했습니다.
개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야 그 주방장 참 맛없게 한다.”


주방장은 그 말이 신경에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방장은 개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에게도 주고 개에게도 주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맛이 왜 이러냐고 불평을 해댔습니다.
얼마 뒤 그 주방장은 결국 자리에서 해고 되고 말았습니다.
주방장은 사람에게 최고의 음식을 제공해야 합니다.


사람보다 개가 말하는 것에 신경을 써서 개에게 초점을 맞추었던 주방
장은 쫓겨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먹이를 주지 말고 ‘오늘’과 ‘비전’에 먹이를 주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것에 초점을 두지 말고 남아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
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
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 (빌3:13,14)
 
“우리가 인생에서 일으키고자 하는 변화는 오로지 현재에만 일어난다.
‘지금’ 하는 일이 미래의 모습과 위치를 좌우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 살고 현재에서 일한다.


하비 파이어스톤 2세(Harvey Firestone Jr)는 “오늘은 지금부터 일
어날 모든 일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했다. 자신과 환경을 바꾸고 싶
다면 과거에 일어난 일로 속 썩지 말자.”


존 맥스웰 저(著) 김고명 역(譯) 「사람은 무엇으로 성장하는가(비지니
스북스, 142-14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디도서 2장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who gave himself for us to redeem us from all wickedness and to purify for himself a people that are his very own, eager to do what is good.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복기하려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언제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복기할 수 있는 삶이라 정의할 수 있다
 어느 날 불현듯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내 삶을 복기하려 해도
 복기할 거리가 하나도 없다면 그보다 더
 황당한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 모두 우리 인생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나온 우리 인생판에서 무슨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지난 일주간 만 하더라도 우리는 인생판에 일곱 수를 더하였다. 
그 한 수 한 수에는 참된 의미가 있었는가?
 그 중에 먼 훗날까지 그 의미가 소멸치 않을 참된 수는
 과연 몇 수나 되겠는가? 
이제껏 살아온 여러분의 전 인생을 놓고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과연 몇 수까지 스스럼없이 복기할 수 있는가?
-이재철 목사의 ‘육지에 올라보니’에서-


바둑이든 인생이든 의미 있는 것만 살아남습니다.
 복기할 수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의미를 상실한 인생이기에
 그보다 더 허망한 인생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기분 내키는 대로 
욕구를 좇아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참된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이어야 하는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