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해피엔딩 에 8:15-17

鶴山 徐 仁 2021. 11. 6. 08:25

해피엔딩 에 8:15-17

 

11월 06일 (토)

   
해피엔딩 에 8:15-17


15.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16.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17.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8절).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전권을 일임합니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왕의 조서가 작성되고 반포되었습니다. 이미 공포된 하만의 조서에 의하면 유다인들은 다 도륙당하고 진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전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새로운 조서를 통해 유다인이 아니라 유다인들을 죽이려던 자들이 도리어 진멸 당하게 된 것입니다(11절). 


모르드개가 유다인들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작성한 왕의 조서가 매우 급하게 각 지방으로 전달됐습니다. 역졸들이 왕의 준마를 타고 다니며 그 조서를 반포했다고 합니다(14절). 이는 위대한 승리이자 놀라운 반전입니다.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15-16절). 


각 성읍마다 승리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며 바사 왕국은 그야말로 유다인 천하가 됐습니다. 하나님이 유다인 멸망의 날을 구원의 날, 승리의 날, 원수들 심판의 날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의 날이요 저주의 사건이었던 주님의 십자가가 도리어 택하신 백성들의 구원 사건, 대속의 사건이 된 것과도 꼭 같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멸망의 날이 구원의 날, 승리의 날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 2:4-5)고 합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에스더서의 모든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속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절대적이고도 주권적인 섭리로 유다인들을 붙드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마치 침묵하시고, 부재하시듯 <하나님>이란 명명조차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역사의 무대 뒤편에서 철저히 간섭하시며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아름다운 해피엔딩을 연출하셨습니다. 


-당신은 역사의 배후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믿으십니까?
-당신은 주님의 십자가가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택하신 자들의 구원의 표상임을 확신하십니까?
-당신은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의 <해피엔딩>을 위해 내 삶을 간섭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주님, 과정은 험하고 언제나 위기에 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저희의 최후 승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저희 삶의 드라마가 해피엔딩이 되게 하시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유다 백성들처럼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승리의 개가를 올리게 하십니다.
저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경륜을 믿게 해 주시옵소서.
 
   
완벽함와 유연함의 조화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완벽함을 위하여 2백 번 이상이나 고쳤다고 합니다. 슬슬 넘어가야 할 것이 있고, 완벽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의 첫 문장입니다. 김훈은 첫 문장을 쓰면서 “꽃은 피었다”로 했다고 했습니다. 무수한 몸부림 끝에 선택한 것은 꽃은 피었다가 아니라 “꽃이 피었다”
였습니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의 그 미묘하고 도저한 차이가 무엇일까요. 작가는 한 끝 차이에 혼을 싣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다가갔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자신도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보이게 하였고, 약한 자들에게는 자신도 약한 자처럼 되었습니다.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유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단 사설 앞에서는 십자가의 복음을 ‘완벽한’ 논리로 사수하였습니다. 한 오리의 헛점도 없이 완벽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완벽해야 할 때와 유연해야 할 때를 구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전9:22)


“‘쿤타킨테’라는 주인공으로 유명한 「뿌리」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가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편집자로 근무할 때의 일화가 떠오르는군요. 그는 세계 명작을 요약해서 잡지에 권말 부록 형태로 올리는 일을 했습니다. 세계의 명작을 독자가 읽기 쉽게 원고 분랑을 줄이는 것이 편집 방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노인과 바다」 는 단 한 글자도 줄일 수 없는 작품이었다고 회고합니다. 동양 고전 「여씨춘추」
를 두고 여불위가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빼거나 보탤 수 있다면 천금을 주겠다고 한 ‘일자천금’의 고사가 떠오르는 일화이지요. 이 말은 완벽한 명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원재훈 저(著) 「상처 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하여(비채, 33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교회
가족이란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간 기구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가족으로 편입되며, 그 결과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나와 같지 않은 이상한 사람들의 동물원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교회는 불가항력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 이상한 동물원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끈이 우리를 묶기 때문에 그렇다. 이와 같은 공동체는 아무래도 다른 인간 기구보다는 가족과 우사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헨리 나웬은 공동체를 “결코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언제나 같이 사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필립 얀시의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중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신비입니다. 교회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나온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 생명이 꺼지지 않도록 서로에게 주의 사랑으로 격려하는 곳입니다. 서로 다르기에 아름다운 공동체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회의 존재방식은 오직 십자가로 모든 것을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