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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14] 선각자, 인류에 ‘의회(parliament)’를 선물하다

鶴山 徐 仁 2021. 11. 5. 20:28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14] 선각자, 인류에 ‘의회(parliament)’를 선물하다

 

장일현 기자


입력 2021.11.02 00:00

 

 

낭떠러지 옆으로 난 위험천만한 절벽길로 마차가 달립니다. 승객은 프랑스와 영국의 여행객들. 덜커덩거리던 마차가 한쪽으로 기울며 절벽 아래로 추락할 위기에 처합니다. 마차 안 승객들 표정은 대조적입니다. 프랑스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치는데, 영국인들은 아무일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마차는 무사히 마을에 도착합니다. 이제 승객들의 상태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프랑스인들은 언제 죽을 뻔했냐는 듯 유쾌하게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영국인들은 그제야 위기가 실감이 났는지 침대에 앓아 눕습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성문종합영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묘사된 영국인과 프랑스인 특성이 과장됐다고 볼 수도 있는데, 분명한 건 두 나라 국민들이 여러 면에서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유럽연합(EU)이라는 한 울타리에서 수십년간 갈이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앵글로-프렌치 갈등

유럽 뉴스를 접하다 보면 두 나라는 ‘다름’을 넘어 서로에 대해 ‘혐오’ 수준의 감정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두 나라의 ‘애증(愛憎)’은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지배자였던 정복왕 윌리엄이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 영국 왕에 오르면서 씨앗을 뿌리게 됩니다. 이후 두 나라 관계는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 많은 전쟁과 화해, 경제적 이해관계, 경쟁심, 얽히고 설킨 혈연 등으로 짙게 물들게 됩니다.

지금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로 남남이 됐지만, 기껏해야 35km 정도 밖에 안되는 해협을 사이에 둔 두 나라는 지금도 티격태격 다투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과 영국, 호주 등 앵글로색슨 3국의 안보 동맹 ‘오커스(AUKUS)’ 이슈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좀 더 이해가 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합의안이 15일(현지 시각) 영국 하원에서 부결된 직후 테리사 메이(오른쪽 아래 서 있는 사람)

 

 

영국 총리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메이 총리는 "16일 실시하는 의회의 내각 불신임 투표에서 내각 신임이 확인되면 오는 21일까지(합의안 부결에 따른) '플랜 B'를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영국 언론들은 영국 정부가 아무런 조건 설정 없이 EU와 결별하는 '노딜 브렉시트', EU와 재협상, 제2국민투표 실시, 브렉시트 시기 연기 등 어떤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최근에는 ‘어업 분쟁’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BBC와 가디언 등 영국 언론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프랑스의 작은 어선들이 영국 근해에서 고기를 잡겠다고 낸 조업 신청에 대거 ‘불허’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초 영국은 브렉시트 협상 때 영국령 저지섬 인근 해역 등 영국 영해 내에서 조업하는 EU 어선들에게 기존 만큼 충분한 조업권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프랑스 어선들이 신청한 47건의 조업 신청 중에서 허가가 떨어진 건 15건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두 나라의 격한 말다툼에 또 발동이 걸렸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달 27일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11월 2일부터 영국 상품의 프랑스 통관에 애로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산 생선과 해산물 등의 하역을 막고, 이를 운반하는 트럭에 대한 검문을 강화해 유통을 어렵게 만들겠다는 것이죠. 프랑스측은 그러면서 “저지섬에 대한 전기 공급 제한 등 여러 추가 조치가 있을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클레망 본 프랑스 유럽 담당 장관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영국에) 주저없이 보복하겠다”고도 했고, 프랑스 어업계 회장은 “(영국의 조치는) 바다와 육지에서 전쟁을 선언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 정부는 “프랑스의 협박은 실망스러운 뿐만 아니라 온당치도 않다”면서 “(프랑스의) 보복 조치는 양국간 무역협력협정이나 국제법에도 맞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어 “만약 프랑스측이 국제법을 어기는 사안이 있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영국은 “우리 근해에서 조업하는 EU 어선들에게 허가권을 주는 건 영국 당국”이라는 입장입니다.

두 나라 정상들도 싸움에 가세를 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영국이 보여온 행동으로는 영국을 신뢰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브렉시트) 조약 협상에 수 년을 보내놓고, 몇 달 뒤 반대로 행동한다면 신뢰성 측면에서 좋은 신호가 아니다”라면서 “영국이 보여주는 행동은 EU 뿐만 아니라 영국과 함께 일하는 다른 모든 나라에도 보내는 신호이니 실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만약 프랑스가 (무역 관련) 협정을 위반했다고 판단되면 영국의 이익 보호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두 나라의 힘겨루기는 지켜보는 주변을 불안하게 합니다. 특히, 기후 변화와 중국과 대결에서의 협력 등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함께 손잡고 풀어야 할 중차대한 이슈들이 산적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달 30일 “저명한 과학자와 환경운동가들이 마크롱 대통령과 존슨 총리에게 어업권과 관련된 ‘앵글로-프렌치 대립’을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두 나라의 다툼이 11월 초 영국에서 열리는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면서, 인류의 최대 현안인 기후변화 문제에 집중해 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입니다.

◇위테나게모트

프랑스와 영국은 그 ‘다름’에 어울리게,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발자취도 너무나 다릅니다. 프랑스의 경우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아주 빠르고 급격하게 ‘혁명적으로’ 왕정에서 민주정으로 전환합니다. 하지만 영국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건을 거치며 서서히, 상대적으로 급격하지 않게 입헌군주제로 바뀌어 갑니다.

 

입헌군주제가 확립되기 이전, 절대 권력을 가진 영국 왕이 중요한 통치 행위를 할 때 도움을 받거나 자문을 구하는 집단 또는 조직의 역사는 ‘웨식스 왕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0세기에 알프레드 대왕(재위 871~899)의 후손들이 전국에서 주요 인사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이들의 모임은 ‘위테나게모트(witenagemot)’ 또는 ‘위턴(witan)’이라고 불렸습니다. 왕은 새로운 법을 선포하거나, 당시 재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토지를 하사할 때, 전쟁을 개시할 때 위테나게모트를 소집했다고 합니다. 구성원은 왕족과 귀족, 주교와 수도원장, 왕실의 고위 관리 등이었습니다.

정복왕 윌리엄이 창건한 노르만 왕조(윌리엄~윌리엄 루퍼스~헨리1세~스티븐) 때에도 위테나게모트와 거의 같은 기능을 하는 조직이 있었는데 명칭은 ‘대자문회의(Great Council)’였습니다.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는 영국 존 왕의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영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존왕 시대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1215)’가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이 또한 프랑스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사건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존은 프랑스 지역에 있는 ‘라 마르쉬’ 땅을 놓고 프랑스 왕 필리프와 충돌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됐고, 존은 초기에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패해 일부 지역을 빼고 프랑스 지역 땅을 모두 잃었습니다. 절치부심 기회를 노리던 존은 이후에도 프랑스 땅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1214년 ‘부빈의 전투’에서 완패했고, 옛 땅을 회복하려던 야심은 물거품이 돼 버렸습니다. 전쟁을 준비하고 벌이는 동안 존은 무지막지하게 세금을 거뒀고, 이에 반발한 영주들이 들고 일어나 존에게 마그나 카르타를 종용한 것입니다.

◇몽포르, 인류에 대한 최고 시혜

존에 이어 헨리 3세(재위 1216~1272)는 9세 때 왕이 됩니다. 그도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됩니다. 헨리 3세는 몇 차례 프랑스 원정에 나섰지만 패했고, 1259년 파리 조약이 체결됩니다. 그 결과 가스코뉴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지역 땅을 프랑스에 넘겨줍니다. 계속되는 왕의 실정과 가중되는 세금은 영주들을 분노케 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시몽 드 몽포르(1208~1266) 입니다. 개인적으로 영국의 의회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이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이 인물의 의미를 새록새록 되새기게 되더라구요.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몽포르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왕인 헨리 3세의 매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231년 레스터 백령의 상속자가 됐습니다. 1258년 영주들이 왕에 대항하기 위해 몽포르를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이들은 ‘옥스포드 조항’을 만들어 왕에게 승인을 강요했는데요. 주요 내용은 당시 의회(parliament)라고 불리게 된 대자문회의를 1년에 세 번 열어야 한다는 것, 영주들로 구성된 15인 회의를 둬야 한다는 것, 세금은 왕실이 아니라 회계청에 내도록 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드디어 의회라는 단어가 이 때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의회는 프랑스어인 parler(이야기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대주교와 주교, 수도원장, 백작과 대영주, 왕의 주요 관리 등으로 구성된 대자문회의에서 국왕과 이들 주요 신하들이 만나 ‘이야기하는’ 모임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왕의 존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지요. 게다가 영주들은 잘 뭉치지도 않았고, 치열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얼마 후 왕은 교황으로부터 옥스포드 조항을 지키겠다는 맹세의 취소를 허락받았습니다. 영주들은 다시 몽포르를 영국으로 불러들였고, 몽포르의 지휘 아래 왕과 에드워드 왕자를 잡아 가뒀습니다. 힘의 균형이 영주들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것입니다.

이 때 몽포르의 업적이 다시 빛을 발합니다. 그는 1264년과 1265년 대자문회의(의회)를 소집합니다. 역사에서는 ‘최초의 의회’라고 불리기도 하는 의회입니다. 당시 의회에는 영주와 주교들만이 아니라 주의 기사들과 도시 대표들까지 소집했다고 합니다. 왕과 영주가 아닌, 지금으로 따지면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들과 도시 대표들을 국가 정책 결정의 장으로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도 잠시. 영주들의 시기와 몽포르의 독선, 왕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 등이 맞물리면서 헨리 3세가 다시 세력을 얻었고, 몽포르는 1265년 이브셤 전투에서 대패합니다. 이때 몽포르의 몸은 갈가리 찢겼다고 합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의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처칠은 의회를 가리켜 “전 세계 자유들의 성스러운 전당”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한 역사가는 “불멸을 얻지 못한 인간이 세운 가장 고상한 기념탑”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국의 의회를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몽포르 입니다. 벤담은 13세기에 의회의 기본적 틀을 만든 그를 놓고 “몽포르는 인류에 대한 최고 시혜자”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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