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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도 못하는 것들이 라면도 못 만드네”

鶴山 徐 仁 2021. 1. 31. 13:15

“야구도 못하는 것들이 라면도 못 만드네”

 

이마트의 SK 와이번스 인수로 본
프로야구 40년 팀 변천사

 

장민석 기자


입력 2021.01.30 16:00

 

 

청보 핀토스는 마스코트가 말인 팀답게 투수 교체시 마차가 투수를 데리고 왔다. / 인터넷 커뮤니티

 

신세계 이마트가 프로야구단 SK 와이번스를 인수하기로 하면서 이번 주 ‘신세계’ ‘이마트’ ‘SSG’ ‘정용진’ 등의 키워드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야구 팬들은 저마다 신세계 이마트 야구단의 이름을 짓는 ‘작명 놀이’의 재미에 푹 빠졌다.

이마트 창고형 매장인 이마트 트레이더스의 이름을 그대로 따오자는 의견도 있고, 이마트 가전 전문점 일렉트로마트의 캐릭터 이름을 딴 ‘이마트 일렉트로맨’을 추천한 팬들도 있었다. 신세계 이마트 측과 SK 와이번스가 구단 인수와 관련한 협의에 들어간 가운데 팀 이름에 들어갈 기업명은 ‘SSG’가 될 가능성이 크다. 어떤 명칭이 됐든 신세계 이마트의 야구단은 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 23번째 이름이 된다.

1982년 프로야구는 6팀으로 출범했다. OB 베어스와 MBC 청룡,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그 중 지금까지 이름이 바뀌지 않은 팀은 단 두 팀,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다.

 

 

◇ 야구로 미리 친숙해진 LG

 

대구·경북 지역을 연고로 하는 삼성은 8회 우승을 자랑한다. 1985년과 2002년, 2005~2006년, 2011~2014년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류중일 감독이 이끈 2011년부터 2014년까지는 4년 연속 통합 우승(정규리그·한국시리즈)을 차지하며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가장 화려했던 팀으로 남았다.

부산팀 롯데는 긴 역사에도 우승은 두 차례밖에 되지 않는다.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거둔 1984년과 박동희와 염종석을 앞세운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정상에 올랐다. 한화에 패한 1999년을 마지막으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지 못하고 있다.

OB 베어스는 1982년 충청도를 연고로 리그에 참가했으나 1985년부터 서울팀이 됐다. 이는 프로야구가 출범할 당시부터 약속되어 있던 부분이다.

OB 베어스는 1999년 두산 베어스로 이름을 바꿨다. 베어스는 두산그룹의 인지도보다 소비재인 맥주를 취급하는 그룹 자회사 OB맥주의 인지도가 높았기 때문에 1982년 원년부터 OB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IMF 사태 이후 두산 그룹이 중공업 위주로 기업 구조를 개편하면서 OB 맥주 등 소비재 계열사의 매각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두산으로 팀 명을 바꾸게 됐다.

베어스는 OB 시절 두 차례(1982·1995), 두산 시절 네 차례(2001·2015·2016·2019) 우승했다. 원년 우승팀으로 유명하다. 1982년 투수 박철순이 22연승이란 불멸의 기록을 세우며 OB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두산은 최근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올라 세 번 우승하며 최강 팀의 면모를 뽐내고 있다.

서울팀 MBC 청룡은 1990시즌을 앞두고 LG 트윈스로 탈바꿈했다. 럭키금성 그룹이 1990년 문화방송으로부터 150억원에 팀을 인수했다. 팀 명인 LG는 모기업 이름인 Lucky(럭키)와 Goldstar(금성)의 약자였다.

LG는 출범 첫해인 1990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1994년에도 우승을 차지했다. 1995년 구본무 회장이 취임하면서 럭키금성 그룹은 LG 그룹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소비자들은 이미 LG 야구단으로 이 명칭이 익숙한 상황이라 큰 거부감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LG 그룹으로 이름이 바뀐 이후엔 LG 트윈스는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광주를 연고로 하는 해태 타이거즈는 아홉 번(1983·1986~1989·1991·1993·1996~1997)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며 한국 프로야구 최강의 팀으로 군림했다. 해태는 모기업 경영 악화로 구단을 운영하지 못할 상황이 됐고, 이를 현대기아차 그룹이 2001년 8월 인수하며 KIA 타이거즈가 됐다. KIA 타이거즈는 2009년과 2017년 우승하며 명문 구단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빙그레 이글스는 제7구단으로 1986시즌부터 프로야구에 뛰어들었다. 대전광역시가 연고지다. 1994시즌부터는 한화 이글스가 됐다. 한국화약 김승연 회장과 동생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 간 재산 분할로 빙그레가 계열 분리되면서 김승연 회장의 자사 계열사 이름인 한화 이글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화는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유일한 우승 기록이다.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 모습. /연합뉴스

 

◇ 팀을 팔고 눈물을 뚝뚝 흘린 구단주

 

여기까지는 비교적 정리가 쉽다. 가장 복잡한 프로야구 역사를 가진 지역은 인천이다. ‘인천 야구 수난사’란 말이 나올 만큼 팀이 자주 바뀌었다. 신세계 이마트 야구단은 인천에서만 6번째 팀이 된다.

인천을 연고로 한 첫 프로야구단은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등 세월이 흘러 더욱 주목을 받은 삼미 슈퍼스타즈다.

1981년 프로야구 출범위원회가 인천·경기·강원 연고 팀으로 가장 먼저 접촉한 곳은 현대였다.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 강원도란 점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대한체육회장을 겸하고 있던 정주영 회장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에 매달린 상황이라 프로야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출범위는 다른 기업에도 문의했지만 잇달아 거부를 당했고, 그때 삼미 그룹이 구단 창단 의사를 밝히며 인천 야구팀의 첫 주인이 됐다.

당시 삼미 그룹은 해운·광업·특수강이 주요 산업으로 프로야구의 홍보 효과를 누릴 만한 소비재 분야 계열사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유학 시절 메이저리그 야구에 열광했던 김현철 회장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팀을 창단할 수 있었다.

악의 무리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슈퍼맨에서 팀 이름을 따온 슈퍼스타즈는 개막전에 치어리더로 원더우먼을 등장시켰다. 원더우먼이 슈퍼맨의 친구일 것이란 막연한 상상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삼미는 창단 당시 국가대표가 없는 유일한 팀이었다. 전력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1982시즌을 15승65패로 마감했다. 승률 0.188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단일 시즌 최저 승률이다. 심지어 후기 리그엔 5승35패를 기록했다. OB 베어스 한 팀에게만 16전 전패를 당했다(LG가 2018시즌 두산에 1승15패를 당하며 타이기록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1983시즌 삼미는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이변을 연출했다. 재일교포로 ‘너구리’라 불렸던 투수 장명부가 1983년 한 해 60경기에 등판(44경기 선발)해 427.1이닝 30승(28선발승) 1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36이란 괴물 같은 기록을 남긴 것이다. 30승 중 26승이 완투승이었고, 완봉승도 여섯 번 있었다. 임호균도 12승15패, 평균자책점 3.03으로 뒤를 받쳤다.

삼미는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전기와 후기 모두 2위를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한국시리즈는 전기 1위 팀과 후기 1위 팀이 맞붙는 시스템이라 아쉽게 한국시리즈엔 오르지 못했다.

장명부의 미친 듯한 호투엔 후일담이 있다. 삼미 허형 사장이 시즌을 앞둔 저녁 자리에서 장명부에게 “30승을 하면 보너스 1억원을 준다”는 약속을 했고, 장명부는 이를 받기 위해 혹사를 마다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30승을 달성하자 허형 사장은 모르는 일이라며 오리발을 내밀었고, 장명부는 1984시즌부터 혹사로 인한 후유증과 약속이 이행되지 않은데 대한 태업이 겹치며 기량이 뚝 떨어졌다.

삼미는 1984시즌 다시 꼴찌로 떨어졌고, 1985시즌엔 18연패라는 단일 시즌 최다 연패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2020시즌 한화가 18연패로 타이 기록을 세우며 다시 조명받았다.

1985년 4월 30일 삼미는 MBC청룡을 4대0으로 꺾고 연패 탈출에 성공했다. 당시 인천 도원구장은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듯 축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날 김현철 삼미 회장은 풍한방직의 청보식품에 팀을 넘겼다. 매각금은 70억원으로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구단 매각이었다. 김 회장은 야구단을 파는 계약을 한 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5월 1일 김현철 회장은 KBO에 매각 승인을 요청했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핀토스 청바지 광고에 출연한 당시 허구연 청보 핀토스 감독.

 

◇ 투수 교체 때 마차 등장... 똥은 어쩌나

 

삼미 슈퍼스타즈를 인수한 풍한방직은 청보 핀토스란 이름으로 1985시즌 후반기부터 리그에 참가한다. 김정우 풍한방직 사장이 경기고 후배인 김현철 삼미 회장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 팀 인수를 결심했다. 새로 뛰어든 식품사업(청보식품)을 홍보할 목적도 있었다.

팀 마스코트를 조랑말로 정한 것은 김정우 구단주의 생각이었다. 김정우 구단주는 당시 대한승마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팀 출범 초창기만 해도 투수를 교체할 때 마차가 등장했다. 하지만 관중들의 함성에 말이 똥을 싸는 등 돌발 변수가 속출하며 구단이 원하던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핀순이’라 불리던 말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새끼를 낳다가 죽으면서 ‘불펜 마차’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청보식품은 당시 인천과 춘천 홈 경기에서 자사 제품인 ‘곱배기 라면', ‘영 라면’을 관중들에게 제공했다. 그런데 맛이 별로였다고 한다. 당시 팬들은 “야구도 못하는 것들이 라면도 못 만든다”며 역정을 내곤 했다. 뜯지도 않은 라면이 경기장에 굴러다녔다.

1985년 후기 리그를 4위로 마치며 선전한 청보는 1986시즌을 맞아 허구연 MBC 해설위원을 감독으로 앉혔다. 당시 35세로 최연소 사령탑이었다. 허구연 감독은 청바지 브랜드인 ‘핀토스’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야심차게 1986시즌에 돌입했지만, 개막과 함께 7연패에 빠졌다. 허구연 감독은 시즌 도중 경질됐다. 그래도 신생팀 빙그레 덕분에 최하위는 면했다.

1987시즌엔 다시 꼴찌가 되며 인천 프로팀은 약팀이란 공식이 완전히 자리 잡았다. 원하던 홍보 효과 대신 조롱만 당하던 상황에서 모기업 풍한방직이 자금난에 처하며 핀토스는 다시 매각 대상이 됐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원년 팀이라는 상징성에 최다 연패와 최저 승률, 장명부의 30승 등으로 좋든 나쁘든 나름 임팩트가 있었던 것에 반해 청보 핀토스는 프로야구 역사에 가장 존재감이 없는 팀으로 꼽히고 있다.

1988년 50억원에 청보 핀토스를 인수한 기업은 태평양화학이었다. 태평양 돌핀스는 삼미·청보와는 달리 강력한 투수진을 앞세워 약체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공격력은 역대 최악 수준이었다. ‘짠물 야구’란 별명이 붙었다.

1988시즌을 꼴찌로 마친 태평양은 이듬해 김성근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오대산 극기훈련을 통해 정신력을 다잡은 태평양은 1989년 3위에 오르며 인천 연고 팀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임기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성적 부진 등의 이유로 사퇴했다.

태평양 돌핀스는 1994시즌 최상덕·김홍집·최창호·정명원 등 특급 투수진을 앞세워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비록 LG에 무릎을 꿇었지만 인천팀 최초의 한국시리즈 진출이었다.

1995년 7위로 떨어진 태평양 돌핀스는 현대에 매각됐다. 매각 대금은 470억원으로, 이번에 신세계 이마트가 1352억8000만원에 SK 야구단을 인수하기 전까지는 역대 최고 금액이었다.

현대 유니콘스의 등장으로 인천 야구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모기업의 든든한 후원을 받은 현대 유니콘스는 공격적인 선수 영입에 힘입어 1998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며 인천 야구 최초의 우승을 일궜다.

하지만 현대는 2000년 1월 쌍방울 레이더스를 인수한 SK 와이번스에 인천을 내주고 야반도주하듯 수원으로 떠나버렸다. 수원은 현대의 임시 연고지였다. 서울 연고 이전을 꿈꿨던 현대는 IMF 사태 등으로 모기업이 휘청거리며 이전 비용인 54억원을 마련하지 못해 2000년부터 임시로 수원을 연고지로 삼았다.

1997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승리한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 /조선일보DB

 

◇ 기사식당에서 외상으로 먹던 구단

 

인천 야구 팬들은 그때부터 둘로 갈리게 됐다. ‘삼·청·태·현’이라 불리며 인천 야구의 전통을 이어갔던 현대를 응원할 것인지, 전주가 연고지였던 쌍방울 선수단을 승계한 새로운 인천 연고 팀 SK를 성원해야 할지 선택을 해야 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많은 인천 팬들이 야구를 외면하게 됐다. SK와 현대가 맞붙은 2003년 한국시리즈는 흥행 참패의 시리즈로 남아 있다. 흥행 보증수표인 한국시리즈 7차전마저 외야석에 빈 곳이 쉽게 눈에 띄었다.

SK 와이번스를 설명하기에 앞서 쌍방울 레이더스를 언급해야 한다. 쌍방울은 전라북도를 연고로 탄생한 제8구단이었다. 당초 전북에 8구단을 만들겠다는 KBO의 계획에 해태 타이거즈를 비롯한 호남 야구팬들이 격렬히 반발했다. 해태의 전성기가 길어지자 호남 야구를 남북으로 분열시키려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용일 당시 KBO 사무총장은 호남 팬들의 반대로 쌍방울 창단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를 찾아가 사정했다. 김대중 총재가 신생팀을 전북에 유치해도 좋다고 하자 호남 팬들의 반발은 수그러들었다. 당시 이의철 쌍방울 사장은 전주고 출신의 야구 마니아였다.

1990년 창단한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1시즌부터 1군 경기에 뛰어들었다. 첫 시즌 6위로 꼴찌를 면한 쌍방울은 1995시즌까지 7~8위를 오갔다.

‘해태 2중대’로 불리며 선수들이 가기 꺼리는 구단이 된 쌍방울은 1996시즌 그룹이 본격적인 지원을 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며 ‘지옥 훈련’을 소화한 쌍방울은 1996시즌 정규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하지만 현대에 2승을 먼저 거두고 3패를 당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엔 실패했다.

쌍방울은 1997시즌에도 선전하며 3위에 올랐다. 김성근 감독의 마운드 변칙 운용은 중간계투 김현욱의 구원 20승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1승2패로 탈락했다. 1997시즌 쌍방울은 연봉 총액 1위 팀이었다.

IMF가 터지고 쌍방울은 심각한 재정난에 처한다. 돈 없는 쌍방울은 김기태·김현욱·박경완·조규제 등 핵심 선수들을 팔아치웠다. 남은 선수들은 호텔 대신 여관 신세를 졌다. 선수단 식사는 기사식당에서 외상으로 먹었다. 모기업이 팀 운영을 할 수 없게 되면서 1999시즌이 끝나고 KBO가 구단을 위탁관리하게 되었다.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현대 유니콘스. 인천 연고팀의 첫 우승이었다. /조선일보DB

 

◇ 메인 스폰서를 팀 이름으로 내세웠다

 

야구단에서 손을 뗀 쌍방울은 매각 대금으로 240억원을 희망했다. 하지만 자동 퇴출당할 쌍방울에 그 돈을 지급할 기업은 없었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문화관광부 장관 재직 시절 SK가 야구단 창단을 망설이자 “SK 손길승 회장님께 충격요법을 도입했다”며 “각 언론사 체육부장들을 초청, 저녁식사를 하며 쌍방울 야구단을 SK에서 인수하기로 했으니 기사화하라 했더니 다음날 일제히 스포츠지 등 언론에 보도돼 기정사실화시켰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SK는 쌍방울이 해체되기를 기다렸다가 인천을 연고로 와이번스를 창단했다. 인천 지역의 5번째 팀이었다. SK는 김성근 감독과 함께 2007·2008·2010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며 ‘왕조’를 열었다. 2018년에도 한 번 더 우승하며 신흥 명문이 됐다. 2000년부터 21년간 인천과 함께한 SK 와이번스는 이마트의 인수로 이제 역사 속의 팀으로 남게 됐다.

그렇다면 2000년 수원으로 연고지를 옮긴 현대는 어떻게 됐을까. 2000년과 2003년, 2004년 우승하며 ‘왕조’를 건설한 현대도 재정난을 피하지 못했다.

야구 사랑이 남달랐던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2003년 사망한 데다가 유니콘스 최대주주인 하이닉스의 채권단이 야구단 운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현대가의 지원이 서서히 끊겼다. 2005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박용오 KBO 총재에게 올해를 끝으로 구단 지원은 어려우니 매각을 추진해 달라고 최후통첩했다.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해상 측도 지원을 끊었다.

현대는 결국 2007시즌을 끝으로 KBO리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농협과 STX, KT가 유니콘스 인수를 시도했으나 모두 결렬된 상황에서 외국 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투자 회사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가 현대를 이어 받아 2008년 히어로즈란 이름으로 팀을 새로 창단했다. 목동구장을 쓰다가 2016년부터 고척 돔에서 경기를 펼쳤다.

다른 프로야구 구단은 모기업의 이름을 팀 이름으로 사용하지만, 히어로즈는 후원사의 이름을 팀 이름으로 달아주는 사업 모델을 선보였다. 2008년 첫 시즌엔 우리담배가 스폰서라 우리 히어로즈였다. 하지만 우리담배는 히어로즈의 가입금 미납 문제로 불매운동이 벌어지자 후반기부터 스폰서 권리를 포기했다. 이후 2009시즌 종료 때까지 서울 히어로즈란 이름을 썼다.

2010시즌부터 넥센 타이어가 메인 스폰서로 들어오면서 2018시즌까지 넥센 히어로즈가 됐다. 박병호와 강정호, 서건창, 유한준 등이 활약한 넥센은 2014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강팀으로 자리 잡았다. 타이어 후발주자였던 넥센은 야구팀 후원으로 톡톡히 홍보 효과를 누렸다.

2019시즌부터는 키움이 메인 스폰서로 들어왔다. 키움 히어로즈는 2019시즌에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거뒀다. 김하성과 이정후, 조상우, 최원태 등 국가대표급 젊은 선수들이 대거 포진한 키움은 2020시즌을 앞두고 기대를 모았지만 5위에 그쳤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선 LG에 패하며 탈락했다. 김하성은 올해부터 메이저리그에서 뛴다. 히어로즈가 박병호, 강정호에 이어 세 번째로 배출한 메이저리거다.

이제 남은 팀은 NC 다이노스와 KT 위즈. 2011년 경남 창원을 연고로 창단한 NC는 구단주인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의 든든한 지원에 힘입어 이른 시일 안에 성과를 냈다. 1군 진입 2년 만인 2014시즌 3위로 ‘가을 야구’에 진출한 NC는 2016년엔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8년 꼴찌로 떨어지며 위기를 맞았지만 이동욱 감독 부임과 함께 분위기를 추슬러 2019시즌 5위에 이어 작년엔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다.

막내 구단 KT는 2013년 수원을 연고로 창단했다. 현대가 서울 진입에 실패해 임시로 수원에 연고지를 삼았던 것을 생각하면 KT가 수원을 연고로 한 첫 정통 구단인 셈이다. KT는 NC와 달리 ‘가을 야구’로 가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9시즌 처음으로 5할 승률을 기록했던 KT는 작년 정규시즌 2위로 기염을 토하며 플레이오프에 직행했다. 플레이오프에선 두산에 패했지만, 첫 ‘가을 야구’를 맛본 성공적인 시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