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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코리아] 우리에겐 이름 없는 우리가 있다

鶴山 徐 仁 2020. 3. 8. 18:04


[터치! 코리아] 우리에겐 이름 없는 우리가 있다

조선일보

입력 2020.03.07 03:16

줄 서도 못 구하는 마스크를 택배 기사에게 건네는 마음
부모의 금 모으기 DNA가 자식 세대로 이어졌다

김미리 주말뉴스부 차장
김미리 주말뉴스부 차장
택배 기사의 삶을 다룬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리키가 아들 일로 며칠 쉬어야겠다고 하자 관리자가 쏘아붙인다. "수많은 집을 다니며 얼굴 보고 말 섞는 고객 중에 진심으로 자네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어? 그들은 가격, 배송, 손에 쥔 물건 외에는 관심도 없어." 뜨끔했다. 물건 전달자라는 기능적 관점 말고 인간적으로 그들을 대한 적이 있었던가.

꼼짝없이 집에 발 묶여 있는 요즘, 바이러스 온몸으로 뚫고 손발이 되어주는 택배 기사는 구세주다. 지인은 그들을 '일상 수송관'으로 비유했다. 석유 수송관처럼 생필품을 집으로 날라주는, 일상에 촘촘히 매설된 수송관. 배송량이 폭증했다는데 얼마나 힘들까. 수소문해 전국의 택배 기사 몇몇에게 연락해봤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몇 시간 줄 서도 못 구하는 그 귀한 마스크를 건네주는 분들이 있어요. 자기 쓸 것도 몇 장 없는데 기사님 아프면 큰일 난다면서. 제 몸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라예." 바이러스 직격탄 맞은 대구의 '쿠팡맨' 윤현식씨는 요즘 눈물샘 틀어막느라 힘들단다. 며칠 전엔 익명 발신인이 보낸 비타민 음료 열 상자를 수성소방서에 배달했다. '대리 기부'하는 동안 이름 없는 천사의 고운 마음이 윤씨 마음을 덥혔다. 서울에서 새벽 배송하는 강희원씨는 계단 발소리를 듣고 나와 음료수 챙겨주는 고객을 만났다. 콧날 시큰해지는 응원이 사명감을 지폈다. "작지만 없으면 시계가 멈춰버리는 '시계 부품'의 심정으로 일한다"고 했다.

집단적 히스테리가 퍼져 나가지만 희망을 주유하는 이들의 기세를 꺾진 못한다. 맘 카페엔 배송맨 응원, 의료진 기부 릴레이가 펼쳐진다. 20여 년 전 IMF 외환 위기 때 장롱 속 패물을 빼내 금 모으기에 동참했던 어머니를 기억하는 딸들에겐 고통 분담의 DNA가 유유히 흐른다.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된 딸들은 아이들 간식을 기꺼이 빼내 문고리에 건다. 위기 속에서 가격, 배송, 손에 쥔 물건만 따지지 않는다. 배송 중 깨진 계란 사진을 올리며 "그래도 감사한다, 이분들 없으면 안된다"고 쓴 맘 카페 게시물은 안온한 일상에선 미처 못 봤던 노동의 숭고함을 일깨운다.

택배뿐만 아니다. 바이러스에 신음하는 대한민국 한쪽에선 감동을 퍼뜨리는 수퍼 전파자가 곳곳에 나타난다. 대구 칠성야시장 청년 상인들이 의료진에게 보낸 도시락 문구는 또 어떤가. "당장 내일이 힘든 자영업자이지만, 오늘 더 힘든 당신을 응원합니다. 단디('똑바로'라는 뜻의 사투리) 힘내라 대구!" 나보다 힘든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젊음이 훈훈하다. 카페 하는 친구는 단골들이 손 소독제를 만들어 와서 깜찍한 엄포를 놨단다. 이 시련 지나가면 못 왔던 것까지 해서 더 자주 올 거니 '단디' 준비하시라, '보복적 소비' 하겠노라고. '혼밥' 세상이라면서 점점이 박혀 있던 개인이 서로 끌어당긴다. 사회적 거리는 멀어져도 심리적 장력(張力)은 커졌다.

신종 코로나 사태와 닮은꼴이라며 요즘 소환되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조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정체불명 실명(失明) 바이러스에 감염돼 시력을 잃고 격리 수용된 이들은 밑바닥을 드러낸다. 결국 그 들을 구원하는 것은 연대. 서로 뗄 수 없는 한 덩이가 됐음을 깨달았을 때, 인물 하나가 읊조린다.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없는 뭔가가 있어요. 그 뭔가가 바로 우리예요."

급작스러운 바이러스 침공에 가슴이 얼얼하고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에겐 그 누구의 우리보다 강한 우리가 있음을. 눈 뜨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우리가 더 단단해지기를.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06/202003060309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