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미·북 정상회담이 둘째 날인 28일 오후 오찬과 서명식을 앞두고 갑자기 중단됐다. 백악관은 "미·북이 아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세계의 시선이 쏠린 핵 담판이 예정됐던 일정도 소화하지 못한 채 결렬된 것이다. 트럼프는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와 북한이 하려는 비핵화의 간격이 너무 컸다. 북한이 미국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비핵화만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하노이에서 정상회담이 열리던 그 순간에 미국 국내에선 트럼프의 전 변호사가 트럼프에게 치명적인 증언을 털어놓고 있었다. 트럼프로서는 김정은과의 회담을 어떻게든 성공으로 포장하며 회담을 타결 짓고 싶은 유혹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김정은이 내놓은 조치로는 도저히 '비핵화'라는 말을 붙이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회담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비핵화하겠다'는 김정은의 말에 진실성이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김정은은 고철이 된 것이나 다름없는 영변의 플루토늄 시설을 없애는 대가로 대북 제재를 완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김정은이 회담에 앞서 "내 직감으로는 오늘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한 것은 미국에서 궁지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그 거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김정은의 작전대로 회담 합의가 이뤄졌다면 북은 우라늄 농축시설과 수십 개의 핵폭탄을 그대로 갖고 있는 상태에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망은 급속히 무너졌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미국이 영변 고철이 아닌 다른 곳의 우라늄 농축시설을 발견했고 이날 회담에서 북측에 이 시설 폐쇄를 요구하자 북이 당황했다는 사실이다. 우라늄 농축시설은 북핵 폐기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 중의 하나다. 영변에도 전시용 우라늄 시설이 있다. 아마도 북은 이 시설 폐기로 비핵화 협상을 최종 마무리 지으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을 테지만 이제 그것은 불가능해졌다. 북에는 최소 두 곳 이상의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이 있고 여기가 진짜 핵 생산 기지다. 북의 우라늄 농축시설과 수십 개의 핵폭탄을 전부 불가역적으로 폐기하지 않는 '비핵화'는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모두 사기극이다.
김정은이 정말 핵 포기를 결단했다면 우라늄 농축시설과 핵폭탄을 신고하고 검증·폐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미국에 공격 목표를 알려주는 것이어서 못한다'고 하지만 비핵화와 제재 전면 해제를 맞교환하는데 무슨 '공격'인가. 지금 미국이 한반도에서 어떻게 한국이 반대하는 전쟁을 하나. 비핵화하는 척 시간을 무한정 끌면서 제재만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김정은은 김씨 왕조 체제를 지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가치다. 체제 유지를 위한 유일한 안전판이 핵이라고 믿고 지난 25년 동안 나라의 모든 것을 쏟아 왔다. 90년대 중반 수십만이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을 감내하면서도 핵(核)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2017년 6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성공으로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그렇게 얻은 핵을 김정은이 포기하겠는가. 전 세계에서 핵실험까지 성공한 나라가 핵을 포기한 사례는 하나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도, 심지어는 문재인 대통령도 김정은이 진짜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정은이 '비핵화' 미끼를 던지자 한·미 정부가 이에 환호했다. 안보적 판단에 정치적 고려가 끼어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미·북의 접근으로 영향력 감소를 우려한 중국은 북한의 후견을 자처하고 나섰다. 김정은은 비핵화 쇼로 단숨에 체제 질식 위기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런 한·미 정부의 잘못된 자세가 김정은에게 핵을 지키면서 미국의 제재망을 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것이다. 김정은이 진짜 핵을 내려놓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은 핵을 가지고 버티려다가는 진짜 체제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 때뿐이다. 지금으로서는 김정은을 그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갈 유일한 방법은 대북 제재뿐이다. 현재 북한 경제성장률은 2017년 -3.5%에서 2018년엔 -5%로 곤두박질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우리가 인내를 갖고 대북 제재를 지키면 김정은이 핵이 자신을 지켜주는지,
그 반대인지 계산을 다시 해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미·북이 다시 만나도 이벤트만 되풀이될 뿐이다. 북핵 폐기를 위한 대북 협상은 김정
은이 최소한 지금은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토대에서 시작돼야 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진짜 비핵화의 길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