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길' 들어서서 회담 이전 상태론 못 돌아가
장마당 등으로 주민들 富와 자유의 맛 알게 돼
思想 통제 속 경제 개선할 경우 北 왕정 체제 시험대 설 것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과 그 이후 사태를 목도한 우리 국민의 심정은 착잡하다. 모든 사람이 바라마지 않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는 합의문에서 빠진 채 단지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모호한 약속만 받았을 뿐이다.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감쪽같이 숨기면서 한·미 연합훈련을 포기하게 하는 기만전술에 우리가 농락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북한은 그와 같은 외교 성과를 통해 국제 제재를 풀고 경제 위기를 넘기면서 세습 체제를 굳건히 지키고자 하는 것 같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설사 그런 저의(底意)를 북한이 품고 있다 한들 생각대로 될 것 같지는 않다. 북한의 역사는 싱가포르 회담 이전(以前)과 이후(以後)로 나뉠 것이다. 일단 변화의 길로 들어선 이상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다. 변화의 힘이 거대한 파도처럼 등을 밀어대는데 그것을 거스르며 뒤로 헤엄치기란 불가능하다.
돌이켜보면 북한 체제가 엄청난 위기에 직면했던 시기는 1990년대다. 정확한 실상을 알기는 힘들지만 당시 '고난의 행군' 시기에 적어도 수십만 명이 아사(餓死)한 것으로 짐작한다. 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후진국 경제개발 연구로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티아 센 하버드대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대기근이 발생하는 곳은 고대 왕국이나 제국주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편협한 일당 독재체제 국가뿐이다. 민주적인 정부나 자유 언론이 존재하는 독립국가에서는 대기근이 일어나지 않았다.
"20세기 후반에 실제 아사 사태가 일어난 곳은 아프리카의 수단과 북한뿐인데, 이 두 나라는 권위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이 센의 설명이다. 1990년대 당시에도 식량 절대량 부족보다 분배가 불공평했기 때문에 권력에서 배제된 주변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말하자면 비민주성이 비극을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 주민들은 가혹한 독재와 빈곤을 겪으면서도 반(反)체제 봉기에 나서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흔히 착취에 시달리며 굶주릴 대로 굶주리다가 끝내 악에 받쳐 봉기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무지막지한 탄압, 지속적이고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세뇌가 이어지면 대부분의 사람은 하릴없이 눌려 지낼 뿐 아예 저항을 포기하고 만다. 끊임없이 체제 선전의 구호를 외쳐대고, 신문·방송 모두 김일성 일가의 지배를 찬양하는 내용 일색인 북한 사회가 그런 상태이다. 불난 집에 뛰어들어가 지도자 동무의 초상화를 구하려다 변을 당한 사람을 영웅 취급하는 북한의 지배 체제는 '유사 종교' 수준이라 할 만하다.
체제에 저항하는 동기는 굶주림이 아니라 오히려 개선이다.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스 토크빌의 혜안에 따르면 "부패한 정부에 가장 위험한 순간은 일반적으로 그 정부가 스스로 개혁을 시작하였을 때이다." 그의 분석은 이어진다.
"혁명이란 반드시 사태가 악화되는 과정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압제적인 정부 치하에서도 마치 느끼지도 못하는 듯이 아무런 불평 없이 잘 참아내던 사람들이 그 압력이 완화되는 순간, 정부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한때는 불가피한 것으로 체념하고 감내하던 폭정도 일단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즉시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억압으로 여겨지게 된다."
오늘날 북한 사회가 안고 있는 잠재적 위험도 이와 같다. 이미 장마당 수백 곳이 생겨났고, 이 기회를 이용해 일부 시민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은 불법 '손전화'를 사용하여 외부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남조선 아이돌의 '색정적인 춤'을 따라 하려는 젊은이들을 엄히 단속한다지만, 사람들은 이미 자유의 맛을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고난의 행군' 운운했다가는 인민들이 차라리 정권 교체에 나 서려 하지 않을까?
북한 당국은 최대한 정치적·사상적 통제를 하며 경제를 개선해 나가려고 할 테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사실상의 왕정, 사회주의, 시장경제, 거기에다가 핵미사일, 이 모든 것을 한 그릇에 담아내는 기적이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비극적인 격변 사태를 피하고 평화의 길로 나아가려 하면 그중 두엇쯤은 버릴 진짜 용기가 필요하다.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감쪽같이 숨기면서 한·미 연합훈련을 포기하게 하는 기만전술에 우리가 농락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북한은 그와 같은 외교 성과를 통해 국제 제재를 풀고 경제 위기를 넘기면서 세습 체제를 굳건히 지키고자 하는 것 같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설사 그런 저의(底意)를 북한이 품고 있다 한들 생각대로 될 것 같지는 않다. 북한의 역사는 싱가포르 회담 이전(以前)과 이후(以後)로 나뉠 것이다. 일단 변화의 길로 들어선 이상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다. 변화의 힘이 거대한 파도처럼 등을 밀어대는데 그것을 거스르며 뒤로 헤엄치기란 불가능하다.
돌이켜보면 북한 체제가 엄청난 위기에 직면했던 시기는 1990년대다. 정확한 실상을 알기는 힘들지만 당시 '고난의 행군' 시기에 적어도 수십만 명이 아사(餓死)한 것으로 짐작한다. 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후진국 경제개발 연구로 199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티아 센 하버드대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대기근이 발생하는 곳은 고대 왕국이나 제국주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편협한 일당 독재체제 국가뿐이다. 민주적인 정부나 자유 언론이 존재하는 독립국가에서는 대기근이 일어나지 않았다.
"20세기 후반에 실제 아사 사태가 일어난 곳은 아프리카의 수단과 북한뿐인데, 이 두 나라는 권위주의 체제가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이 센의 설명이다. 1990년대 당시에도 식량 절대량 부족보다 분배가 불공평했기 때문에 권력에서 배제된 주변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말하자면 비민주성이 비극을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 주민들은 가혹한 독재와 빈곤을 겪으면서도 반(反)체제 봉기에 나서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흔히 착취에 시달리며 굶주릴 대로 굶주리다가 끝내 악에 받쳐 봉기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무지막지한 탄압, 지속적이고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세뇌가 이어지면 대부분의 사람은 하릴없이 눌려 지낼 뿐 아예 저항을 포기하고 만다. 끊임없이 체제 선전의 구호를 외쳐대고, 신문·방송 모두 김일성 일가의 지배를 찬양하는 내용 일색인 북한 사회가 그런 상태이다. 불난 집에 뛰어들어가 지도자 동무의 초상화를 구하려다 변을 당한 사람을 영웅 취급하는 북한의 지배 체제는 '유사 종교' 수준이라 할 만하다.
체제에 저항하는 동기는 굶주림이 아니라 오히려 개선이다.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스 토크빌의 혜안에 따르면 "부패한 정부에 가장 위험한 순간은 일반적으로 그 정부가 스스로 개혁을 시작하였을 때이다." 그의 분석은 이어진다.
"혁명이란 반드시 사태가 악화되는 과정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압제적인 정부 치하에서도 마치 느끼지도 못하는 듯이 아무런 불평 없이 잘 참아내던 사람들이 그 압력이 완화되는 순간, 정부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한때는 불가피한 것으로 체념하고 감내하던 폭정도 일단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즉시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억압으로 여겨지게 된다."
오늘날 북한 사회가 안고 있는 잠재적 위험도 이와 같다. 이미 장마당 수백 곳이 생겨났고, 이 기회를 이용해 일부 시민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은 불법 '손전화'를 사용하여 외부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남조선 아이돌의 '색정적인 춤'을 따라 하려는 젊은이들을 엄히 단속한다지만, 사람들은 이미 자유의 맛을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고난의 행군' 운운했다가는 인민들이 차라리 정권 교체에 나 서려 하지 않을까?
북한 당국은 최대한 정치적·사상적 통제를 하며 경제를 개선해 나가려고 할 테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사실상의 왕정, 사회주의, 시장경제, 거기에다가 핵미사일, 이 모든 것을 한 그릇에 담아내는 기적이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비극적인 격변 사태를 피하고 평화의 길로 나아가려 하면 그중 두엇쯤은 버릴 진짜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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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29/201806290395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