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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완도 청해진 사당에는 장보고가 없었다

鶴山 徐 仁 2017. 5. 30. 12:10

[박종인의 땅의 歷史] 완도 청해진 사당에는 장보고가 없었다


입력 : 2017.04.19 03:04 | 수정 : 2017.04.19 10:12   


[78] 청해진 사당의 비밀과 문제적 인물 이도재

장보고 흔적 남은 완도 청해진
정작 그곳 사람들은 천년째 장보고 대신 송징 대장군 모셔와

송징이 활 쏜 '사현', 송징이 죽은 암초 '까투린여'
곳곳에 그의 흔적 있지만 1990년대 청해진 발굴 이후 장보고 모시고 송징은 밀려나

윤선도가 설씨 부인과 안빈낙도했던 보길도 부용동
아들 直美가 상속받았지만 직미 죽고난 뒤 폐허로 변해

완도군 세운 이도재, 훗날 전라감사로동학지도자 체포·처형

'가렴주구' 표상 조병갑은 비슷한 시기 고금도에 유배

박종인의 땅의 歷史
해상왕 장보고가 만든 전남 완도 청해진에는 사당이 있다. 장보고가 아닌 송징이라는 장군을 천년 동안 모신 사당이다. 그런데 30년도 되지 않은 최근에 그 주신(主神)을 송징에서 장보고로 바꾸었다. 아니, 바꾸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천년 동안 섬겨왔던 장군님 대신에 다른 장군님을 주신으로 모시라니. 천년 동안 불러온 샘물 이름도 '큰샘'에서 '장군샘'으로 바꾸라니. 전남도 무형문화재 제28호인 완도 장좌리 당제와 당굿 기능보유자 강양대(71)가 기자에게 이리 묻는 것이다. "장좌리 사람들 의문을 풀어주소. 우리 송징 장군은 어이 되었는지. 우리는 장보고 몰라." 청해진 사람들이, 장보고를 모른다?

천년 전 뱃놈, 장보고

장보고는 뱃놈이었다. 어릴 적 이름은 궁복(弓福), 활보였다. 궁파(弓巴)라고도 했다. 활 잘 쏘는 뱃놈이었다. 그저 고기나 잡고 이러구러 먹고사는, 뱃놈이었다. 뭍사람들은 그렇게 섬사람을 천시했다.

그 뱃놈 활보가 출중한 무예와 통솔력으로 당나라에서 장수가 되었다. 당과 신라와 왜국 무역을 장악하는 거상(巨商)이 되었다. 서기 828년 음력 4월 해적에게 끌려온 신라인들을 돕겠다고 그가 귀국하니, 나라에서는 청해진대사라는 위엄 가득한 직위를 내려주었다. 대한민국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 앞 작은 섬 장도에 그 청해진 유적이 복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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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청해진은 신라시대 장보고가 만든 무역항이요 군사기지다. 완도 하면 청해진이고 장보고다. 그런데 청해진이 있는 장좌리 사당에 장보고를 모신 지는 30년이 채 안 되었다. 그 이전 1000년 동안 사람들은 송징 장군을 모셨다. 무슨 일인가. /박종인 기자

신라 45대 신무왕이 그의 딸을 왕비로 맞으려 했을 때 귀족들이 반발했다. "활보는 미천하니 그의 딸로서 왕비를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장보고 군사력에 의지해 왕위에 오른 왕이지만 그 말을 따랐다. 귀족들이 자객 염장을 보내 술에 취한 장보고를 칼로 베어 죽였다.

청해진 사람들은 모조리 그때 바다였던 김제 땅 벽골로 이주됐다. 바다를 틀어막고 저수지를 만드는 간척 노역에 투입됐다. 청해진은 사라졌다. 서기 846년 일이다. 장보고도 잊혔고 청해진도 잊혔다. 완도는 빈 섬이 되었다.

원악도(遠惡島)와 송징 장군

장좌리 사당을 지키는 상쇠 강양대.
장좌리 사당을 지키는 상쇠 강양대. "우리 송징장군은 누군가"라 묻는다.

조선시대 정치범들 단골 유배지는 원악도(遠惡島)였다. 멀고() 흉폭한() (). 손에 물 묻히기 싫어하는 사대부 괴롭히기 딱 좋았다. 대표적인 원악도가 바로 완도다. 대한민국 시대, 더 이상 섬사람을 뱃놈이라 부르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원악도들은 세상 헛헛해진 뭍사람들이 툭하면 찾아가는 피난처가 되었다. 그래도 앙금은 남아 있다. 오죽하면 완도 고금도(古今島)가 강진과 연륙이 됐을 때, "우리는 이제 고금도가 아니라 고금 사람"이라며 위안을 했을까.

그 원악도 완도에서 사람들은 영웅을 신으로 모셨다. 풍파를 회피하고 풍어를 기원하며 국가 안녕과 마을 안위를 그 신에게 빌었다. 완도에서 신은 송징(宋徵)이었다. 완도 곳곳에 송징에 대한 전설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 기록인 동국여지승람에는 '신사에 송징이라는 신을 모시는데, 송징은 무용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60리 밖에까지 날렸다'고 적혀 있다. 그가 활을 쐈다는 사현(射峴)도 있고, 까투리로 변한 아비 송징을 딸이 찾아 죽인 암초 '까투린여'도 남아 있다. 완도 앞바다 세미선(稅米船)을 공격해 쌀을 주민들에게 나눠줬다는 미적추(米賊酋), 쌀도적 두목 전설도 전한다. 공주대 명예교수 윤용혁은 이렇게 추정한다. "완도를 비롯한 주변 섬에는 송장군, 송징장군, 송대장군 설화가 많다. 종합하면 진도에 기지를 만든 고려 삼별초가 완도에 파견한 장군일 가능성이 크다."

장좌리 청해진 사당과 송징

청해진 유적지 안에 있는 장좌리 사당에도 송징을 모셨다. 사당 상쇠 강양대가 말했다. "대대로 송장군을 주신으로, 좌우로 장보고의 친구 정연과 고려시대 큰스님 혜일대사를 모셨다." 그런데 1990년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장좌리 청해진에 있는 사당.
장좌리 청해진에 있는 사당.

강양대가 말했다. "25, 26년 전? 장보고 장군을 연구하신 고() 청해국민학교 최우주 교장이 왔다. 우리가 엉뚱한 신을 모셔왔다고 했다. 장보고가 주신(主神)이라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물었다. 그러면 송징은 누구냐고."

복잡한 설득 과정을 거쳐서 마을 주민들이 결론을 내렸다. "배운 분들 말씀이니 우리가 틀렸겠지. 송징은 아마 장보고 장군의 별호(別號)였겠지? 오늘부터 주신을 바꾼다." 마을에 있던 샘터 '큰샘'도 이름을 '장군샘'으로 바꾸고 "장보고 장군이 군사 십만을 거느리면서 먹는 샘물"이라고 군악을 울리게 되었다. 청해진 사당에 장보고 영정이 걸리고 이후 장보고 축제가 열리면 그 오프닝으로 사당에서 고유제가 열리게 되었다.

여전히 강양대는 궁금하다. 그러면 우리 송징 장군은? 송 대장군(大將軍)? 장보고를 연구한 목포대 교수 강봉룡이 말했다. "민간 전승은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청해진 주신이 바뀐 것도 그 변화의 일환일 뿐." 공주대 교수 윤용혁이 말했다. "청해진이 와해된 이후 장보고는 망각됐다. 이후 삼별초 때 주민에게 선정을 베푼 영웅 송징이 완도인들의 기억을 좌우한다. 청해진도, 장좌리 법화사지도 출토물은 삼별초 시대 유물이 대다수다. 그 전승을 인위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오류다." 한마디 덧붙인다. "장보고에 매몰돼 완도는 송징이라는 또 다른 영웅을 잃어버렸다."

보길도를 지킨 사람, 설씨 부인

1637년 병자호란 당시 멀고 흉폭한 섬, 보길도에 윤선도가 입도(入島)했다. 임금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소식을 듣고서 제주도로 은거하려다 풍파를 만나 정착한 섬이었다. 노론 거두 송시열과 목숨을 건 정쟁에 거듭 패배한 사내였다. 나라를 경영하려는 꿈을 접고 사내는 보길도에 자기 왕국을 건설했으니 곧 부용동과 세연정이다.

그 무렵 옆 섬 진도에 땅을 간척한 적이 있었다. 주민들은 사당을 지어 윤선도를 기렸고 그는 경주 설씨 주민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이미 남원 윤씨 정부인이 있었지만 윤선도는 이 아름다운 처녀를 또다른 부인으로 맞아 보길도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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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 유적, 세연정. 설씨부인 아들 윤직미가 물려받아 관리했다.

17485대손 윤위가 윤선도 사후 77년 만에 보길도를 방문했다. 그가 쓴 '보길도지(甫吉島識)'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윤선도가) 임종 시 부용동을 개척하는 데 노고가 있었다 하여 부용동을 학관(學官)에게 주었다.'

학관(學官)은 이름이 아니라 '글 가르치는 사람'을 뜻한다. 부용동을 물려받은 이 학관 이름은 직미(直美). 설씨 부인의 둘째 아들이다.

하루 세 차례씩 윤선도에게 문안인사를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과 글을 읽고 아버지 임종을 지킨 사람이다. 학관 윤직미가 윤선도 약전을 쓰고 부용동을 관리했다. 그가 죽고 사위 이동숙이 섬을 떠나자 부용동과 세연정은 폐허로 변했다. 일제 강점기 보길국민학교 교정으로 쓰이던 세연정 터는 당시 어린이들이 청소를 하고 가꾼 덕에 깨끗하게 남아 있다가 1980년대에 '보길도지'를 근거로 복원됐다. 윤선도보다 먼저 세상을 뜬 설씨 부인은 인근 노화도에 묻혔다가 몇 년 전 윤씨 문중 묘역으로 이장됐다.

문제적 인물 이도재와 조병갑

완도

이제부터 잘 읽어야 한다. 1886년 고금도에 이도재라는 인물이 귀양을 왔다.

갑신정변에 연루된 이도재는 이 원악도에서 9년 동안 살면서 주민들과 교류했다. 글을 가르쳤다. 김 양식, 고구마 재배 따위 기술도 연구하고 전파했다. 온갖 구실로 특산물과 돈을 뜯기고도 '뱃놈'이라 천시받는 섬사람 삶을 보았다.

1894년 유배가 풀리고 섬을 떠난 그가 전라감사로 돌아왔다. 그가 한 조치는 강진, 해남, 영암으로 흩어져 있던 섬들을 묶어서 섬사람들 공동체를 건설한 일이었다. 그게 지금의 완도군이다. 행정구역 신설이라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천년 동안 억압받던 섬사람들의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완도 사람들은 고금도에 그를 기리는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 일이 더 복잡해진다. 1894년 동학혁명이 터졌다. 팔도가 농민군으로 들끓었다. 만석보를 만든 가렴주구의 표상, 고부군수 조병갑이 바로 이곳 고금도로 유배를 당했다. 1894년 음력 54일이다. 이도재가 전라감사로 부임한 날은 그 해 106일이다. 그때 두 사람이 만났을까?

두 달 뒤 동학 지도자 전봉준과 김개남이 이도재 감사 지휘하에 연달아 검거됐다. 이도재는 과격파 김개남을 심문한 후 목을 잘라버렸다. 재판도 없었다. 시신은 갈라서 양반들에게 나눠줬다. 2개월 감봉처분을 받은 이도재는 두 달 뒤 체포한 전봉준은 법대로 서울로 압송했다. 왜 김개남을 재판 없이 잔인하게 처형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 또 복잡하다. 김개남이 사형당하고 7개월 뒤 고금도에 유배당했던 조병갑이 관직에 복귀했다. 3년이 지나고 1898721일 동학 2대 교주 최 시형이 교수형을 당했다. 그런데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부 판사가 조병갑이니, 이 어이된 일인가.

장보고가 송징을 지워버렸다. 윤선도의 흔적을 보존한 아들은 이름도 없이 '학관(學官)'으로 기록됐다. 이도재가 덕을 쌓고 떠난 그 섬에 가렴주구의 상징 조병갑이 유배를 왔다. 그 뒤 역사는 매우 기이하게 돌아갔다. 그 기이하고 어이없는 역사를 섬나라에서 훔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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