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 태재욱(75) 발해왕조제례보존회장이 60㎡ 남짓한 건물 앞에 섰다. 지금은 터만 남은 사찰 상현사에서 쓰던 낡은 토담집이다. 단청을 수놓은 벽과 기둥, 서까래엔 금이 쩍쩍 갈라져 있고 깨진 기왓장 사이에선 잡초가 자라 있었다.
발해 멸망후 고려로 내려온 후손들 임진왜란때 경산으로
발해 알리기 위해 마을 곳곳에 발해 상징 깃발과 벽화
대조영 왕릉 재현해 왕궁터 흙 봉안할 계획
"발해는 우리역사 분명한데 발해 유산 부흥 노력은 처참한 수준"
"대조영 황제영정을 시골의 낡은 건물에 모셔 마음 아파"
태 회장이 자물쇠를 풀고 창호문을 열어젖히자 어두컴컴한 방 안에 영정사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해시조 대조영 황제(?~719)의 영정. 영정의 크기는 170㎝가 넘었지만 건물이 너무 좁아 영정은 제삿상 뒤에 놓여 있는 처지였다. 제삿상 위로는 제례에 쓰이는 술잔과 촛대가 올려져 있었다.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차지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렸던 고대국가 발해. 그곳에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대조영을 기리는 재실은 황제 영정을 모셨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했다. 영순태씨 43세손인 태재욱 회장은 창호문의 자물쇠를 다시 걸어 잠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전해 내려오는 족보로 보나 발해왕궁터에서 발굴되는 유물로 보나 발해는 우리 역사가 분명한데도 발해의 유산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은 처참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앞장서 발해마을을 알리기 위해 벽화도 그리고 홍보물도 만들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다. 태 회장은 "황제 영정을 시골 구석의 낡고 좁은 건물에 모셔놓아 후손 입장에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대조영의 영정이 봉안된 곳은 '발해마을'이다. 대조영의 후손인 영순태씨 집안이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만주와 연해주를 지배하던 발해의 후손들이 이주한 지역 치고는 꽤나 남쪽이다. 이들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계기는 발해가 멸망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9세기 후반 멸망했다. 발해왕조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은 934년 민중 수만 명과 함께 고려로 내려와 살았다.
이후 대장군 태금취(太金就)를 중시조(中始祖)로 삼은 영순태씨 일족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피난하면서 경산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이 바로 국내 유일의 태씨 집성촌인 발해마을이다. 지금은 40여 가구에 60여 명 정도가 산다. 주민 중 80%가량이 태씨 집안 사람이다.
영순태씨가 어째서 대씨인 대조영의 후손일 수 있느냐는 의문도 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영순태씨의 태(太)는 큰 대(大)와 서로 통용되는 글자"라고 했다. 크다의 의미인 '대'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획을 하나 추가해 '태'로 썼다는 설명이다. 태 회장은 "중국의 역사 기록서인 『동사통감』에도 대조영을 '태조영'이라고 쓴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도 고려 후기의 무신 대집성(大集成)을 태집성(太集成)과 혼용했다"고 말했다.
태 회장은 "1592년 송백리에 터를 잡으신 분이 태순금 할아버지다. 주역을 공부해 세상 이치를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녔던 태순금 할아버지는 송백리가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하면서 터를 잡았다"면서 "여러 차례 일어난 국란에도 이곳은 멀쩡했고 태풍 사라와 매미가 한반도를 덮쳤을 때도 피해가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 발해마을엔 곳곳에 발해를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 있다. 대조영이 말을 타고 들판을 누비는 벽화도 3군데에 그려져 있다. 마을 입구에 발해마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됐다. 집집마다 봉황이 그려진 문패도 걸어뒀다. 해동성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의 작품이다.
태영철(63) 송백2리 이장은 "마을 알리기에 나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역사관과 역사공원을 반드시 조성하고 마을에 풍부한 대나무를 활용해 산책길도 만들어 사람들이 여행 오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태 이장은 "역사관에는 발해의 역사를 알리고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삼으려고 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의 허점에 대해 지적하는 자료를 채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5년부터는 춘분과 추분에 대조영을 추모하는 제사도 지내기 시작했다. 제사를 지내는 날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영순태씨 후손들이 모두 모인다. 영순태씨와 협계태씨 등 태씨는 전국적으로 6000명쯤 된다고 전해진다. 태 회장은 "대조영 후손들이 고려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왕조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중시조 제사로 작아졌다"면서 "지금이라도 시조에게 직접 제를 지내는 왕조 제사 형식을 갖추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사에 내걸리는 표준영정엔 독특한 사연도 숨어 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태씨 집안 남성들의 얼굴이 이 영정에 스며 있어서다. 표준영정을 만들 때 모두 142명의 태씨 남성 얼굴 특징을 분석해 영정에 녹여냈다. 이 작업엔 석 달 정도가 걸렸다. 우선 182㎝ 떨어진 거리에서 105㎜ 망원렌즈로 정면과 측면, 45도 비스듬히 기울여 얼굴 사진을 찍었다. 한 명당 5장씩 142명을 찍어 모두 710장의 사진을 자료화했다. 이 사진들을 계량화해 한국인 남성 표준얼굴과 300~500군데 기준을 놓고 대조했다.
그렇게 표준얼굴에서 벗어나는 특징들만 추출해 얼굴을 만들고 이를 민두상으로 조각했다. 태씨 가문 남성은 평균 한국인 남성보다 머리의 앞과 뒤가 더 큰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얼굴박사'라고 불리는 조용진 한국얼굴연구소 소장이 진행했다. 서울교대 미술교육과 교수를 지낸 조용진 소장은 국내를 대표하는 미술해부학 권위자다. 조 소장은 "대조영의 실제 생김새가 전해지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대조영 후손들의 얼굴 특성을 분석해 표준영정을 만들었다"면서 "태씨 집안 남성 후손들의 얼굴을 종합 분석한 뒤 민두상을 만들고 그걸 기초로 권희연 숙명여대 교수가 영정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대조영 표준영정은 현재 정부 표준영정 제86호로 지정돼 있다. 조 소장은 "용모를 만드는 유전자는 그 수가 적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잘 물려진다"며 "이런 방식으로 얼굴을 만들면 그 가문 사람들도 대부분 수긍한다"고 말했다.
발해마을 주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태형준(22)씨는 "마을 주민 모두가 발해의 옛 전통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발해마을은 앞으로 대조영 왕릉을 마을 안에 재현할 계획이다. 태 회장은 "대조영 황제의 왕릉을 재현해 능 안에 중국 발해왕궁터에서 갖고 온 흙을 넣어 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3년 5월 2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발해왕궁이 있던 자리에서 흙을 한 되 퍼와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태 회장은 "몇 해 전 대조영 황제 추모 향사를 지낼 때 한 유림이 '영정이 좁은 건물 안에 갇혀 제삿상 위로도 못 올라가고 있으니 국가 기운이 떨어져 온갖 악재가 생긴 것'이라고 하더라"며 "앞으로 대조영 황제가 좋은 곳으로 모셔져 이 나라에도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산=김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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