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강 같이 외 6

鶴山 徐 仁 2017. 3. 10. 21:02
3월 10일 (금)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강 같이 (아모스5:18-27)
  
 

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25.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화 있을 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18절).
이것은 아모스 선지자가 선포한 여호와의 날을 조롱하며 감히 그 날에 도전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시여, 어디 한 번 그 최악의 재앙을 우리에게 내려줘 보시지요!>하며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그날이 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보다 안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뿐 아니라 종말이나 최후 심판을 조롱하며 비웃는 사람들도 널렸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종말을 실감하지 못하고 믿지 않음으로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는 심판을 내려 달라며 <그날을 사모하고> 희롱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마치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과도 같을 것>(19절)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끊임없는 추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의 심판을 피하면 또 다른 하나의 심판이 그들을 덮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따라서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절).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을 면하고 피하고 싶으면 그걸 부정하거나 비웃거나 조롱할 게 아니라 도리어 정의와 공의를 물 같이, 강 같이 도도히 흐르게 하라고 촉구하십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죄악은 바로 <성문>에서 자행된 그 정의와 공의의 유린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정의와 공의라는 사회적 덕목이 훼손되지 않고 그야말로 물 같이 강 같이 흘러야 그 사회 그 나라가 복되고 건강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장애와 걸림돌도 바로 정의와 공의의 실종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회생과 살 길도 바로 이 정의와 공의를 물 같이, 강 같이 흐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를 실현하고 관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사자를 피하다 곰을 만날 것이고,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꼴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세상 종말과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 자 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본문 21-22절에서 하나님이 왜 절기와 성회를 기뻐하시지 않고 번제, 소제, 화목제 등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의 정의와 공의 지수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으며 조롱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오늘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계시하신 대로 그들은 결국 사자를 피하다 곰을 만나듯 그렇게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과 진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저희는 더욱 근신하며 정의와 공의를 구현하고 실천하며 늘 역사의 종말과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예비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결혼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한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 안정감을 줄 수도 있지만 이런 관계를 평생 지속해나간다는 것은 커다란 ‘도전’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관계에 대한 헌신과 책임감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성장이며, 결혼에 대한 결심은 성장을 향한 도전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성장의 결실은 달지만 성장에 따르는 고통, 즉 성장통이 따르는 것이 결혼의 현실입니다. 안정만을 원하는 사람은 결혼이라는 도전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홍정길·박남숙의 [인생 12개 학교] 중에서-

 
   
 
  
 


인간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떠남의 모험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큰 도전입니다. 위험과 함께 열매도 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 사람이 하나됨을 통해 성장과 성숙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혼자서 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는 결혼입니다. 그래서 결혼이란 그리스도인 되어가는 훈련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사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in Christ Jesus our Lord.

 
    
 
  
 비전교회 윤여재 목사
 위태로운 날
  
  



3월 9일 (목)
성문에서 (아모스5:9-17)
  
 

9. 그가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르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11.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13.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14.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문에는 <성문에서>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성문에서 ...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10절).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12절).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15절).

<성문>이란 유대 사회의 한복판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어느 성읍이든 <성문> 앞에 광장을 조성하고 재판은 물론 군대의 출정식과 개선 행사며 시장까지도 다 여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유대 사회가 제대로 되려면 이 <성문> 앞 광장의 질서와 문화와 정의가 바르게 확립되고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7절) 내던졌습니다. 그들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했고, 힘없는 자를 밟고 부당한 세금을 거뒀고(11절), 의인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고 가난한 자들을 억울하게(12절) 했습니다. 성문에서 열린 법정에서 그만큼 부당한 재판을 많이 벌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사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11절)고 하셨고,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 울음꾼을 불러다 울게 할 것>(16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문>의 정의가 제대로 서야 그 사회가 건강할 뿐 아니라 망하지 않습니다. 성문의 법정에서 뇌물이 오가고, 억울한 자들이 양산되고, 성문의 시장에서 거짓과 사기와 온갖 협잡이 판을 치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사 모든 사람들이 그 광장에서,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하며 울게 하십니다.

나부터 정의를 세웁시다. 나부터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합시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14절)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고 응답하고 결단합시다.

 
  
  
 

-<성문>이란 어떤 곳일까요?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이 시대 우리 사회와 과거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의 <성문>을 냉정하게 비교해 보십시오.

 
  
  
 

주님, <성문>이란 곧 이스라엘의 적나라한 현실이었습니다. 모든 것의 현주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라>고 하셨는데,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말씀과 기대에 바르게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했습니다. 선을 구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구했습니다. 부디 오늘 저희들의 <성문>을 살피게 하사 저희부터 분부하신 정의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반역한 과거 이스라엘의 혹독한 심판을 기억하며 저희는 그런 화를 자초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가정과 교회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는 가정과 교회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인간이 임의대로 만든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건재했다면 교회는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정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창세부터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중요하고, 그만큼 사탄의 공격도 심합니다. 가정과 교회는 사탄의 집중 공격 대상입니다. 이 둘만 파괴하면 모두가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김남국의 [창세기 파헤치기] 중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최초의 공동체는 가정과 교회입니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시작이며 완성이기에, 사단의 공격은 더 큽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면 가정이 흔들립니다. 에덴동산으로 대표되는 가정과 교회를 사단은 공격합니다. 오늘날 가정이 무너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틈을 사단이 공격해 오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사랑으로 더욱 채워가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I die every day--I mean that, brothers--just as surely as I glory over you in Christ Jesus our Lord

 
    
 
  
 사랑과평안의교회 박상혁 목사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예수그리스도
  
  




3월 8일 (수)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마태복음9:9-17)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변화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면 엄청난 능력으로 세상의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내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실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안에 변화된다는 것은 그렇게 엄청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 가장 인정받지 못해서, 법정에 증인으로 서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세리인 마태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고 약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으로 변해야 합니다. 삭개오도, 바디메오도, “달리다굼!”라고 일으켜 세운 아이도 그렇구요, 예수님은 가장 약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눈에 그런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가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매일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린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진리의 길임을 믿기에 또 회개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살고 싶어서... 주님 때문에 그렇게 살기를 원해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절대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변화의 기쁨은 나 혼자 하나님의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통해 내가 순종함으로 작은 곳에서부터 평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는 ‘좋은 것이 좋은 거다’라는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죄를 미워하는 것이며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잘못된 것을 정죄하고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것의 책임을 예수님, 자신이 지심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 잘못된 것을 통회하시며 그 죄를 대신 지신 것이 평화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리에 가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삶으로 주님이 이끌어주시기를 기대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 내가 하나님의 평안을 누린다 하면서 내 주위의 사람들과 세상이 변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이켜 봅시다.
- 주님께 우리의 눈이 열려 세리와 창녀 같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이 우리의 눈에 보이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이 바라보시는 곳을 내가 바라보고 주님의 관심이 머무는 사람에게 나의 관심이 머물 수 있는 믿음의 시야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완전히 변화될 수 없다 하더라도, 내일 또 실패하더라도 주님의 말씀이 그러하기에 순종하며 기쁨으로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공동체의 실천

손대접은 공동체에 중요하다. 공동체가 외부인들에게 다가가고 내적 관계를 강화시키는 데 손대접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대접을 하는 데 있어 공동체 역시 중요하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사람들은 사역과 축복을 함께 나누는 친구들, 비전뿐 아니라 쉼과 회복의 기회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친구들을 공동체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나그네에게 정기적으로 손대접을 행할 때 우리는 다른 실천들의 중요성을 금새 깨닫는다.
-크리스틴 폴의 [공동체로 산다는 것] 중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함은 내 안에 채워진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손대접을 행할 때, 공동체와의 유기적 지지나 쉼은 너무 중요합니다. 공동체와의 연결이 없다면 쉽게 지치게 됩니다. 나그네를 품는 손대접은 우리가 나그네임을 인정하고, 공동체안에서 먼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손대접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공동체로부터 충분하게 받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참음과 약속

 

히브리서 6: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And so after waiting patiently, Abraham received what was promised.

 
    
 
  
 명성엘림교회 김성환 목사
 광야 길을 걸어가게 하신 하나님
  
  




3월 7일 (화)
행복의 조건(2) (시편122:1-9)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하바드대학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행복의 조건’이란 책에서 하버드대학생 268명과 서민남성 456명, 여성천재 90명을 72년간 추적 연구한 후 ‘인생의 운명을 좌우한 것은 부와 학벌과 명예가 아니며,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이며 행복의 결국은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는 바른 예배자로 살아야 하며, 사람들과는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서 늘 자족하며 살아야 합니다(잠17:1). 바울은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자족하며 살았기에 항상 기뻐하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빌4:10-13). 이상의 세 가지 관계정립이 잘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 평안은 편안과는 다릅니다. 편안은 돈과 지위와 명예로 살수도 있고 잠간 누릴 수 있지만, 평안은 위로부터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얻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숙해 집니다. 성숙은 외적 성장이 아닌 내적 인격과 성품이 다듬어 지며 신앙적으로 그리스도처럼 자라나는 것입니다(엡4:13).

그리고 사명적 삶을 살아갑니다. 똑같이 가정과 직장과 사회활동을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확신으로 하니 보람되고 행복합니다. 이 행복은 교회를 통해서 누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크기나 구성원들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의 희망이며 대책입니다.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실현하는 공동체, 복음을 위해 핍박과 고난을 함께 나누는 그 공동체를 통해 이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1).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으로 어떤 기관과 단체도 사람의 영혼을 살릴 수 없습니다. 교회는 병든 영혼을 고치고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생명을 구원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4).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6). 교회는 축복의 근원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잘 섬기면 개인과 가정과 자손만대 복을 받게 됩니다. 교회를 통해 그 성읍과 도시가 평안하고 형통하게 됩니다(7). 행복은 보이는 것이나 물량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이 충만한 행복 마음껏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하나님을 향한 사명의 삶을 지향해야 하는데, 내가 추구하는 삶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 내 삶에 평안과 내적 성숙함이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 원인을 생각해 보십시다.
- 교회를 사랑하고,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거룩하신 주님, 주님과의 좋은 관계에서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소원을 이루어주심을 믿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백성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인종적으로 구별되나, 신약에서는 인종적으로 섞여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정치 체제를 지녔으나, 신약에서는 여러 민족의 통치자들 사이에서 살았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할례를 시행해야 하나, 신약에서는 모두 세례를 받아야 한다.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은 성전과 성전 제사장 직, 이스라엘 땅과 그 왕들 심지어 하나님 자녀로서의 이스라엘 민족, 그 모든 것의 완성이다.
-마크 데버의 [더처치] 중에서-

 
   
 
  
 


구약과 신약은 다양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과 성취의 개념으로 흐르는 통일성이 있습니다. 교회를 이해할 때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 구원을 얻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품으신 사랑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For he does not willingly bring affliction or grief to the children of men.

 
    
 
  
 김옥엽 시인
 형통하고 잘 될수록
  
  




3월 6일 (월)
행복의 조건(1) (야고보서3:1-12)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하시며 살아있음에서 오는 행복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심장이 뛰고 있고, 내일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다음 달에 할 것에 대해 계획을 잡아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현대인들의 관심의 중심은 행복이지만, 그 행복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돈과 명예만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확한 답이라 할 수 없습니다. 행복이란 ‘소유’보다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종적관계와 가족과 이웃과의 횡적관계를 바르게 하고 살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마22:37-39). 이러한 두 영역의 좋은 관계를 위해 인간에게만 언어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우선 언어부터 바꿔야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말을 많이 사용하십시오. 돌아보면 감사하다는 말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갔을 때가 행복했을 것입니다. 지금 불행하게 느껴진다면 언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불평하고 짜증스런 말을 많이 사용한다면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불평과 짜증스런 말보다는 감사하는 말을 많이 사용함으로 언어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엡5:4).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말은 버리고 감사의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에서부터 평안이 자리를 잡을 것이며 행복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또한 긍정적인 말만 하십시오. 말이 씨가 된다는 교훈처럼 말은 성취의 능력이 있습니다. 5절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온 산야를 다 태우는 것처럼,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말 한마디는 행복의 전당들을 숯덩이로 만들어 버리고 태워버리게 됩니다. 신앙인은 “할 수 없다”는 말 대신에 “주님 안에서 할 수 있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큰일’이 없습니다. 어려운 일을 통해서도 다듬으시고 준비해 가시는데 무슨 큰 일이 있겠습니까? 부정적이고 불평적인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무의식중에 던지는 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칭찬하는 말을 하십시오. 사람들은 칭찬 듣기를 원하는 강한 욕구가 있으며, 칭찬은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상대의 ‘장점’을 발견하는 사람들로 자신의 장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들을 긍정적인 눈으로 보고 그들을 칭찬해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말에 실수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고삐 없는 힘센 말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그 입에 재갈을 물려서 훈련하듯이 혀를 단속하고 절제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3). 그래도 어렵기에 생각과 말과 습관이 바뀌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성령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감사하는 말과 긍정적인 말과 격려하며 칭찬하는 말을 많이 사용함으로 행복한 인생이 되길 기원합니다.

 
  
  
 

- 하나님의 자녀인 나의 감사의 조건은 무엇이 기준입니까?
- 나의 생각과 말이 하나님의 능력을 종종 부정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 언어의 변화를 위해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다.

 
  
  
 

주 하나님, 나의 언어생활의 부족함이 많으니 하나님의 자녀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나의 인격의 변화를 통해서 말이 바뀔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감사를 통해서 행복의 조건들이 삶에서 나타나게 하옵소서.

 
  
   
 

마음의 가난

훌륭한 주인을 만들어주는 것은 마음의 가난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기에 다른 사람의 체험을 우리에게 주는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온 역사는 우리의 역사와 창조적으로 연결되며 그들의 삶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고 그들이 느끼는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는 하나님에게 서로를 드러내면서 대화합니다.
-헨리 나우웬의 [영적 발돋움] 중에서-

 
   
 
  
 


마음의 가난은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게 합니다. 마음의 가난이 있을 때 누군가의 삶을 진실로 바라보게 됩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스스로 마음의 가난에 처하는 삶은 더 많은 생명을 얻는 도구입니다. 그 안에 계신 주님의 풍성한 은혜 때문입니다.

 
   
    
 

 

오직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바위처럼 그렇게 든든하게 서 있으세요.
당신의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FIM국제선교회 유해석 선교사
 5분칼럼(유해석선교사)
  
  




3월 4일 (토)
이 말을 들으라 (아모스 5:1-8)
  
 

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2.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3.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7.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본문도 앞의 3, 4장 말씀처럼 <... 이 말을 들으라>(1절)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자주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마 11:15, 13:9, 막 4:9, 23, 눅 14:3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게 무엇이든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와서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 5:3).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4, 7, 10).

본문에는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는 말씀도 반복됩니다.(4, 6절). 이것도 <내 말을 들으라>는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그분을 찾아 그의 면전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고 공의를 땅에 던지며>(7절) 산 사람들이라 해도 하나님을 찾아 그의 말씀을 들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고>(8절)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이 <벧엘을 찾지 말고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의 유수한 그런 성지들이 여로보암 I세 이후에는 다 우상의 제단으로, 거짓 신들의 성지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상을 찾아 그 사제들의 거짓된 말을 듣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되살아나라는 간절한 당부십니다.

내일이 벌서 경칩입니다. 만물이 생명의 기지개를 켜는 봄의 길목, 여호와를 찾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므로 더욱 생기와 활력에 넘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기원합니다.

 
  
  
 

-왜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살까요?
-왜 본문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성지인 벧엘, 길갈, 브엘세바를 찾지 말라(5절)고 했을까요?
-<묘성과 삼성>(8절)은 어떤 별들일까요?

 
  
  
 

주님, 저희 인생의 사는 길은 부단히 여호와를 찾고 또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골짜기가득 흩어진 마른 뼈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 뼈 저 뼈가 들어맞고 서로 연결되어 극히 큰 여호와의 군대가 된다고 했습니다. 비록 늘 정의와 공의를 저버리며 사는 저희들이지만 은혜를 베푸사 더욱 여호와를 찾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심령들이 되게 하사 그 영혼이 살아나게 하시옵소서. 만물이 동면에서 깨어나듯 저희도 다 그렇게 되살아나게 하시옵소서.

 
  
   
 

천상의 지혜와 신앙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

신앙은 미지의 세계인 복지(福地)를 향해 떠나는
모험이자 여행이고
예수의 상징인 의의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비상이다.
물질주의의 노예가 되어 안일한 욕심을 제일로 아는
마이더스의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고상한 품격과 형상을 잃어버리고
사소한 일에 얽매이는 소인배가 되어가고 있다.
천상의 지혜와 신앙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
설레며 탐색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런 모험과 도전을 기피하지 말라
이것은 어리석은 바보들의 망상이 아니다.
한 단계 더 오르는 신앙의 비상이다.
-조신권 박사의‘ 명문에로의 초대’에서-

 
   
 
  
 


현대 교회가 앓고 있는 신앙의 병폐는
순수한 믿음의 열정은 사라지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물질과 영광에만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 기복적으로 변하면서
심령에 병이 드니 영의 건강은 사라지고
낙원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욕망을 마음껏 실현하며 살아가십시오.
참 기쁨과 행복은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신성한 바람과 소원을 믿음 안에서 발산하는 것입니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며
여호와로 인해 달려갑니다.

 
    
 
  
 서울이태원교회 지성호 목사
 지혜의 삶 40-말이 곧 지혜다
  
  




3월 3일 (금)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아모스 4:9-13)
  
 

9. 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인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13.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이 4장에는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6,8, 9,11절).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절절한 사랑과 안타까운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왜요? 그래야 우리의 영혼이 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 55:3).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그럼에도 당시 이스라엘은 힘없는 자,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 학대하고 착취한 부로 향락하느라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하고 어리석었는지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해 비를 멈추게 하사 극심한 가뭄을 당케 하시고,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 팥중이 재앙 등으로 치셔도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전염병을 보내기도 하시고 코를 찌르는 악취와 청년들의 죽음, 성읍 무너뜨리기 등의 화를 당하게도 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촉구하십니다. <...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12절). 어째서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살까요? 왜 하나님만일까요? 그 물음에 대한 정답이 바로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십시오. <너희가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는 하나님의 탄식이 더는 이어지지 않게 하십시오.

 
  
  
 

-여러 차례 반복된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였느니라>는 말씀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배신감과 비애감을 느껴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돌이키시기 위해 내리셨던 재앙들을 한번 짚어 보십시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주님, 후렴처럼 반복된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읽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늘 저희를 기다리십니다. 때로는 깨달음을 위해 징계의 매를 드시기도 하지만 그것조차도 다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시는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부디 저희들 더는 외면하거나 고집부리지 말고 속히 하나님을 만나고 돌이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옵소서.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살고 아버지 집으로 복귀해야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결단하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인간에게는 번민과 회의가 있지만

물론 청년에게는 노년에게 없는 특권이 있다.
바로 꿈이 많다는 것이고 함께 회의와 번민도 많다는 뜻이다.
젊음의 때에 고생과 고뇌가 없다면
그 젊음은 흙덩어리 같은 하등 동물의 생과 같을 것이다.
환락만을 추구하는 인생은
인간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한 것이므로 미생물과 다를 바 없다.
배부른 새에게는 번민이 없고 포식한 짐승에게 회의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영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번민과 회의가 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그런 고통과 어려움을 뚫고 전진하는데 인생의 가치가 있다.
-조신권 박사의 ‘랍비 벤 에즈라‘에서-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무엇인가 찾고 구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어 실패라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 전체에서 보면 때론 실패도 성공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생플랜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과 겸손이 있는 사람은
산 물고기처럼 높은 이상과 큰 꿈을 향하여
용감하게 탁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성령을 사모합니다”

 
    
 
  
 주는교회 강성현 목사
 예방접종
  
  


'Faith - Hy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의 길을 묻는 이에게   (0) 2017.03.14
오, 놀라운 은혜 외 1  (0) 2017.03.13
바산의 암소   (0) 2017.03.03
복된 삶, 단순한 삶  (0) 2017.02.28
인생추수의 법칙   (0) 2017.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