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외 3

鶴山 徐 仁 2017. 1. 5. 11:27
1월 5일 (목)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호세아 11:8-12)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2.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8절).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혹독하게 심판하시기는 해도 결코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을 원수들의 손에 붙이실지언정 포기하시지는 않습니다. 그의 마음이 속에서 긍휼로 불타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자 사랑의 하나님이시잖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영원한 표상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므로 인류의 죄를 심판하셨고, 주님을 대속의 희생 제물로 삼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사 십자가를 통한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실현하셨습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불순종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함에도 잘한다거나 아무런 제재도 없이 그냥 지켜보고 계시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행한 대로 응징하십니다.

그러나 잘못하고 죄 지었다고 영영 버리시는 법은 없습니다. 다시금 사랑과 긍휼을 베푸사 구원하시고 새 출발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하며, 한 번 하나님의 자녀면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요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구원의 실패한 곧 하나님의 실패를 뜻하기 에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고 하신 겁니다.

때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더라도 체념하지 마십시오. 혹독한 시험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심판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8절).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 당할 때 함께 망한 도성(신 29:23)들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결코 이방 성읍들이 멸망한 것 같이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이십니다. 새해에는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더욱 담대하게, 더욱 씩씩하게 진군하는 그리스도의 용사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당신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란 말씀을 확신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이야 말로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본문 가운데서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9절)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 하나님은 결코 저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때로 벌하시고 징계하실지언정 결코 영영 저주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망한 아드마처럼, 스보임처럼 저희를 그냥 죽도록 내버리시지 않습니다. 진노하시는 중에도 그 속에서 긍휼이 불붙기 때문입니다. 저희들 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사랑하심을 더 깊이 깨닫고 체험하게 하사 새해에는 함부로 좌절하거나 지레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교회의 거룩성

현재 한국 교회는 ‘홍수’를 만난 비상상태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목사로서 교회가 많아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할 사람이 있을까. 교회가 많아져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것이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교회의 거룩성’이다. 교회의 거룩성이 담보되지 않은 교회가 아무리 많아진들 무엇이 좋겠는가. 기업화, 사유화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이 되어가는 교회가 많아진들 그것을 감히 ‘좋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김태현의 [세상에 없던 교회] 중에서-

 
   
 
  
 


하나님은 교회의 크고 작음에 관심 있지 않습니다. 다만 거룩함이 중요합니다. 작든지, 크든지 거룩한 교회여야 합니다. 세상속에 드러낼 수 있는 거룩성은 교회가 교회되게 지켜내는 비밀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기도를 얼마나 했는가?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가?에 관심 갖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우리 삶이 세상에서 어떻게 비춰지는지를 비판합니다. 세상속에 거룩함이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빛 된 자녀입니다.

 
   
    
 

 

오직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바위처럼 그렇게 든든하게 서 있으세요.
당신의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하선화 작가

 
    
 
  
 비젼교회 윤여재 목사
 내 편이 되시는 하나님
  
  



1월 4일 (수)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 (골로새서 3:15-17)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여러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계십니까? 제가 연말에 서점에서 가장 재미이게 읽은 책이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지은 저자는 감사하는 것을 먼저 해보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다가오는 해가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우리의 삶에 대한 자세가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올해도 달라지지 않고 내년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하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감사는 ‘제 2외국어’라는 사실입니다. 상황 속에서 우리의 마음에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불평’입니다. 감사의 삶을 알면서도 마치 제 2외국어가 어색한 것처럼 감사를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훈련’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감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라고 말씀합니다. 본질적으로 내 성품이 ‘감사’라는 것을 채워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확고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감사하는 사람은 그의 삶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무엇이 달라지는가?
삶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소유의 복보다 관계의 복이 훨씬 크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소유의 복을 말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의 팔복도 그 가치는 관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그의 삶의 변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관계의 회복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면 불행이 행복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사실 그 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불행이 있으면 그와 동일한 지점에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순간 우리는 불행 쪽이 아니라 행복 쪽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삶을 보면 가장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보면 불행의 쪽이지만 바울은 오히려 감사하며 고백합니다. “내가 오히려 생명을 얻었노라.” 모든 것을 잃었지만,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의 생명을 건져주셨기에, 보배를 그의 그릇에 담았기에 그는 감사합니다.
2017년은 감사로 시작해 봅시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의 눈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감사의 조건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감사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 것임을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을 감사의 관점을 바라보고 갑사로 고백해 봅시다.

 
  
  
 

주님! 새해에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의 조건을 찾는 자가 아니라 먼저 감사는 사람이 되어 모든 일을 감사로 고백하는 믿음의 삶이되기를 원합니다.

 
  
   
 

인내하라

주께서 나를 향해 정하신 온전한 목적은 반듯이 이루어진다. 당신이 시험 속을 지나고 견디기 힘든 인내의 강과 산을 넘고 또 넘어야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인내란 주께서 인내하게 하시는 인내를 따라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이다. 붙어 있기만 하라. 조금 후면, 얼마 후면, 당신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경건한 사람이 된다. 당신은 하나님의 풍요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저 주께서 주의 일을 다 하시도록 주께 붙어 있으라.

-채영삼의 [지붕없는 교회] 중에서-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많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 펼쳐집니다. 심지어 시험의 과정 속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변함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행하는 삶이 있어야 하나님의 약속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필요합니다. 당신의 인생이 시험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여호와로 인해 기뻐하며
여호와로 인해 달려갑니다.

-피가희 작가

 
    
 
  
 명성엘림교회 김성환 목사
 감사할 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1월 3일 (화)
행복, 그 위대한 여정1 (전도서 3: 11-13)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1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행복한 삶을 살도록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우울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한 일을 하고 많은 것을 가짐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데 있으니 생을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즐거움은 크게 두 가지로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입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일시적이고, 참된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어서 나중에는 그 욕망을 채울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는 즐거움으로는 일시적인 행복은 누릴지 몰라도 진정한 행복은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으로 구원받은 사람, 성령 충만함을 받은 자로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 사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이제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함으로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12). 선한 일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고 복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선한 일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가정에서 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13). 나에게 돈이 많고 적으냐의 문제가 아니고, 학벌이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며, 세상의 권세나 명예의 문제가 아니고 건강하며 장수하느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소유했어도 즐거움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솔로몬은 남자로서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보고 누려본 자로 고백하기를 "모든 것이 다 괴로움이요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전2:26)고 탄식하였습니다. 행복은 내가 속한 가정에서 먹고 마시고 자고 깨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애기하고 오손 도손 사는 것, 즉 평범한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무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소중히 여깁니다. 이 즐거움은 내게 주어진 일터에서 수고하며, 사명감으로 사는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14).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적존재입니다. 그래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해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신앙이 인간 행복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식이 없다면 모든 세상 즐거움이 구비되었다고 할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영혼의 즐거움이 진정한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 나는 지금 어떤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점검해 보십시다.
- 나는 선을 행함과 가정생활에서의 감사와 즐거움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봅시다.
- 신앙인으로 복음과 교회를 섬김으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다면 다시 기도하십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이제 저의 삶에서 불평불만을 거두어 주옵소서. 평범한 것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맡은 일들을 감당하게 하시고, 은혜 안에서 즐거운 생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두 마음을 품은 신앙

오늘날 종교간 화해라는 명목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경우들을 흔히 본다.
그러나 신앙의 중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어중간한 태도도 아니다.
신앙이란 우상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하는 것이다.
중간지대 즉 회색지대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양자를 다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위에서 하나님과 바알을 두고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18:21)라고 촉구했으며
또한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6:24)라고 하셨다.

-송재국 목사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에서-

 
   
 
  
 


하나님은 두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우상도 섬기지 않는 중용의 길이나,
혹은 둘 다 섬기는 종교적 혼합의 길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라고”
(고후6:14-16)

 
   
    
 

성령을 받으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성령을 사모합니다”

-변정희 작가

 
    
 
  
 서울이태원교회 지성호 목사
 말씀에 의지하는 것이 지혜다
  
  




1월 2일 (월)
사랑의 줄(호세아 11:1-7)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내가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다>(4절)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되 가축을 줄로 묶어 앞에서 끌 듯 그렇게 강제하셨습니다.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배반했습니다.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 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1-2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사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 40년을 친히 사랑의 줄로 이끄사 늘 <그 앞에 먹을 것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광야를 유랑하는 동안 누구도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거나 헐벗어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멀리했고 학대했고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바알에게 제사하며 분향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광야생활 중에도 그들은 늘 애굽을 그리워하며 동경했습니다. 종살이하고 혹사당했던 그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몸에 밴 노예근성 때문에 툭하면 애굽으로 복귀하자며 남을 선동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해 줬건만 그들은 다시 옛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러내심을 받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집니다.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가기보다 툭하면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욕 되게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가까이로 부를수록 멀리 달아나고 또 때로는 우상에게 곁눈질을 하거나 아예 따라가기도 합니다.
호세아 시대 북왕국 이스라엘을 반면교사로 삼읍시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그들을 불러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7절). 그래서 그들은 멸망했습니다.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6절) 패망하게 했습니다.

출애굽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올해도 여기까지, 이 한 해의 마지막 날까지 인도하시고 늘 우리 앞에 먹을 것을 두신 하나님의 축복에 진심으로 감사합시다. 주님의 <사랑의 줄>이 아니었다면 결코 오늘과 같은 송구영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깊이 감사하며 주의 성호를 높입시다.

-당신은 아직도 출애굽의 감격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당신은 올해도 주님의 <사랑의 줄>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십니까?
-당신은 과거 이스라엘처럼 옛 삶을 동경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주님,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40년 광야생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줄>로 그들을 강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베푸시면 베풀수록 더욱 바알에게로 다가가 제사하며 분향했습니다. 주님, 배은망덕했던 과거 이스라엘을 기억하며 저희는 결코 주님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올해도 주님의 사랑의 줄 덕분에 이 마지막 날까지 탈 없이 올 수 있었음을 고백하며 새해에는 더욱 힘껏 주님의 뒤를 따를 것을 결단하는 복된 송구영신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모습 사이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향하는 인간이다.
하나님의 형상도 모든 인간을 지향하고,
자기 비움이나 자기 낮춤도 동료 인간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손을 쭉 펼치는 것이다.
어떤 특정인이나 한 사람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거나
자기만을 위한 비움과 낮춤은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다.
나를 비운다고 하는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말한다.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워 겸손하게 됨으로써
더 큰 교만이 자기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이웃과 아픔을 함께 하고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이병일 목사의 ‘어떤 신을 섬길지’ 에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신앙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이웃을 어떻게 섬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흔히 발견하는 오해는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생각하다가 사람과의 관계를 잊는 일입니다.
매일매일 겸손으로 이웃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는 일은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한 일입니다.

인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겁낼 필요가 없었네요

-변정희 작가

신일교회 배석찬 목사
용서가 필요할 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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