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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70주년, 재조명 받는 '사막의 여우' 롬멜/ 중앙일보

鶴山 徐 仁 2014. 11. 8. 23:18

서거 70주년, 재조명 받는 '사막의 여우' 롬멜

[중앙일보] 입력 2014.11.08 13:48 / 수정 2014.11.08 13:56

 

쌍안경을 들고 최전선을 시찰하는 로멜. 독일 군 수뇌부는 최전방에 깊숙이 들어가는 로멜의 행동을 위험하다고 비판하곤 했다.

 

올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이기도 하거니와, 이를 막을 수 없었던 나치독일의 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롬멜(1891. 11.15~1944.10.14) 원수의 서거 70주년이다. 그의 탄생일을 앞두고 독일을 비롯한 서구 언론들은 롬멜을 재조명하는 특집을 잇달아 내보내고 있다. 아마도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 장군의 이야기는 수많은 책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양하게 분석되고 평가돼 왔으나, 그럼 과연 그가 독일군 최고의 지휘관이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소 애매한 논란이 존재하고 있다.


군사전문적인 시각에서는 독일 국방군 최고의 두뇌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나 독일 장갑부대의 아버지이자 전격전의 창시자인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을 더 높이 평가하고는 있다. 그러나 영국의 처칠조차 존경해 마지 않았던 그의 능력이나, 그를 위해 목숨 바치기를 꺼리지 않았던 아프리카군단(DAK) 장병들의 겸허한 진술, 히틀러 암살 기도에 직접 간여하진 않았지만 나치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냈던 ‘착한 독일군’의 대표격이었던 롬멜에 대한 인상은, 그의 비극적 최후와 더불어 독일, 아니 2차 세계대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현상유지 지시 불구 대규모 공세로 승리

그가 직접 남긴 전사록은 영국의 군사평론가 리델 하트에 의해 『The Rommel Papers』라는 책자로 발간돼 세간에 알려졌다. 우리말로도 번역(『롬멜전사록』)된 이 책에는 마치 전투 현장을 영화로 보고 있는 듯한 사실적인 저술도 돋보이지만, 부하 장병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탁월한 지도력, 그리고 아내와 자식에 대한 자상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 그의 진정한 인간미를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다. 그가 단순히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비결을 아는 군인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독특한 자질,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정치적 식견, 한 가정을 지키는 남자로서의 복합적인 덕목을 고루 갖춘 훌륭한 지성인이었다는 점,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롬멜을 회상하는 가장 균형된 요인들이 아닌가 싶다.

그는 ‘사막의 여우’란 별칭이 붙었던 북아프리카 사막전 이전에 이미 독일군과 연합군 내에서 경악할 만한 전과를 기록했었다. 프랑스를 눈 깜짝할 새에 격파했던 서방전격전에서 제7 장갑사단을 지휘했던 그는 적군도 아군도 그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의 신출귀몰한 기동력을 발휘해 ‘유령사단’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미 이때 롬멜은 기존의 보수적 프로이센 육군의 전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혁명적 군사사상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1941년 2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북아프리카 땅으로 전출되자,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던 최신 기갑전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롬멜이 이룬 놀랄 만한 전과의 근본적 의의는 당시 파병 독일군이 영군 연합군에 비해 열악한 보급에 의존하면서도,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패퇴할 때까지 무려 1년 반 동안 공세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초 히틀러와 군 수뇌부는 북아프리카를 ‘사이드 쇼’(side show)에 가까운 부차적인 전장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지중해와 중근동을 잇는 석유라인을 확보함으로써 영연방 제국의 혈로를 끊는다는 대담한 구상은 전혀 시도해 본 바 없었다. 그들에겐 어디까지나 러시아가 주된 목표였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에게 있어서는 독일이 부차적이라 생각했던 북아프리카야말로 그들의 주전장이었던 탓에, 롬멜 한 사람에 의해 이 지역 전체가 유린당한다는 참기 힘든 수모를 오랜 기간 감당해야 했다.

41년 아프리카에 도착한 롬멜은 현상유지만을 지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독공세를 개시, 삽시간에 엘 아게일라를 점령했다. 그해 4월엔 토브룩 이외의 모든 영국군을 이집트로 몰아냈다. 이어 ‘배틀액스’ ‘크루세이더’ 작전으로 알려진 영국군의 공세 전환을 차례로 분쇄했다. 42년 초에는 가자라 지역으로 진출하여 6월 21일 끈질기게 버티던 토브룩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독일 최연소 원수에 등극한다. 이때가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 최절정기였다. 처칠 수상마저 "적장이지만 존경을 표한다"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던 바로 그 대목이다.

하나 그는 원수 계급장보다 좀 더 많은 전차와 연료를 공급해 주는 편이 낫다며 전쟁 기간 내내 보급문제에 시달렸던 독일군의 역경을 토로했었다. 결국 2차 대전 전체의 양상이 그러하듯, 연합군의 무제한 물량공세가 명품 전투기량으로 버텨온 독일군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양’이 ‘질’을 압도하는 명백한 구도를 보여준 엘 알라메인 전투는 북아프리카 전투의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서로 누가 이기고 있는지를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전장의 주도권은 몽고메리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이후 롬멜은 고달프지만 교묘한 지연술책으로 최소한의 피해만을 감당해 나가면서 독일군을 튀니지까지 무사히 철수시키는 또 하나의 위대한 퇴각작전을 지휘했다. 이 모든 결정은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 참모본부와는 상반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이때 롬멜은 히틀러의 총애를 받기는 해도 '가장 말 안 듣는 장군'으로 인식된다.

최전선 시찰 때 기총사격 받고도 꼿꼿이 서

아프리카 전투 종료 이후 롬멜은 잠시 이탈리아 방위사령관으로 부임했다가 연합군의 프랑스 서해안 상륙에 대비한 서방총군 예하 B 집단군 사령관을 맡는다. 가장 중요한 러시아 전선으로 보내지 않은 것은 위대한 장군에게 더 이상의 패배를 안기기 싫다는 히틀러의 작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를 시기한 보수적인 독일 장군들의 견제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그는 연합군이 칼레가 아닌 노르망디로 침공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고, 상륙 즉시 해안에서 전세를 결정짓기 위해 모든 기갑부대를 해안선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했다. 그러나 결국 침공을 원천적으로 막지 못한 상태에서 병력과 화력집중에 실패한 독일군은 44년 6월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허용한다.

롬멜은 그해 7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른바 불고지죄를 적용받게 되자, 히틀러는 마침내 잔인한 결정을 내린다. 이 사건은 그가 과연 히틀러를 제거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나치당과 히틀러 반대세력 사이에 끼어 우유부단한 상태의 중립으로 인해 화를 자초했던 것인지, 여전히 미궁에 빠진 채 그의 서거 70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착한 독일군’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롬멜이 히틀러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점 때문에, 전쟁에서 살아남은 만슈타인이나 구데리안 장군보다 더 큰 존경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는 친위대가 전혀 간여하지 못했다. 롬멜의 부대는 모든 세부 전투에서 철저히 제네바협정을 준수한 결과, 러시아 전선에서와 같은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 전후 서독 정부는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 재향군인회의 모임만은 합법적으로 인정해 줄 정도였다. 아마도 그와 그의 부하들이 펼친 전투는, 치가 떨리는 살육장 속에서도 구(舊)세계의 마지막 남은 기사도 정신을 존중하던 낭만이 깃들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롬멜은 단순히 뛰어난 전략가나 전술가라는 군사적 평가를 넘어, 조국에 대한 애정과 부하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치열한 전장 가운데에서도 틈날 때마다 자신의 가족에게 보낸 진중한 서신을 통해 그가 얼마나 참된 인간상에 근접했는가를 조명할 때만이 그의 진면목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롬멜은 부하가 실수했을 때 지나치게 나무라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다. 필요 이상의 질타는 부하로 하여금 나중에 거짓보고를 하게 만들 우려가 있고, 그렇게 되면 지휘관은 상황판단을 흐리게 된다는 것이다.

롬멜은 그 누구보다도 최전방에 직접 나가 진두지휘하면서 전황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장군의 계급에 어울리지 않게 무수히 많은 부상을 당했으며 그의 이 같은 위험천만한 행동은 독일 수뇌부에서조차 군사교범을 어기는 일이라고 비판받은 바 있다. 롬멜의 기개와 강심장은 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에도 화제가 됐다. 위력정찰을 실시하던 영군 전투기가 해안을 시찰하던 롬멜 일행에게 기총사격을 가했을 때였다. 모든 부하들이 지면에 신속히 엎드렸지만 롬멜 혼자 꼿꼿하게 서서 전투기의 진행 방향을 응시했다고 한다. 적군에 대한 당당함은 나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치의 우편검열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음에도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구절을 남겼다. "아들아, 나치당이 쓸데없이 개최하는 집회에는 가지 말고 학교에서 하는 공부나 잘 하거라." 롬멜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매력있는 인간이었다.

롬멜 부인, 히틀러에게 "통곡하는 사자상 원한다"

이전에 독일에 거주할 때 슈투트가르트 시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바로 롬멜 장군의 아들 만프레드 롬멜이었다. 10대 때 나치에 의해 아버지를 여읜 기억을 자꾸 들추는 것이 예의바른 짓은 아니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롬멜에게 독약을 마시게 한 히틀러가 롬멜의 사망 소식을 롬멜 부인에게 전화로 전하면서, 베를린 광장에 롬멜 장군을 기리기 위해 사자상을 제작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히틀러는 도약하는 사자, 포효하는 사자, 잠자는 사자 중 어떤 디자인을 원하느냐고 물었던 모양이다. 그 때 롬멜의 부인이자 만프레드의 어머니는 "통곡하는 사자를 만들어 달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히틀러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고스란히 담긴 처절한 답변이었다. 히틀러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고, 이후 그에 대한 장엄한 국장은 치루어졌지만 결국 사자상은 세워지지 않았다.

전화 통화 내용으로 인해 롬멜 가족이 박해를 당하진 않았으나, 롬멜 부인은 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한 남편을 위해 목숨을 걸고 히틀러에게 대든 셈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가 찬양하고 존경해 마지 않는 위대한 군인이었지만, 억울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그의 죽음과 관련된 이 일화를 듣는 순간, 목이 매여 더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사진을 같이 찍자는 말도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만프레드 롬멜은 지난해 세상을 떠나 자상한 아버지와 용감한 어머니 곁으로 갔다.

허진 외무고시 출신의 외교관. 독일·헝가리·네덜란드 등에서 총영사·참사관으로 일했다. 2002년엔 월드컵 대표팀 언론담당관. 독일군 전사(戰史), 마카로니 웨스턴에 조예가 깊다. 한때 전문지에 축구칼럼을 연재한 ‘축구논객’이기도 하다. 현재 외교부 조정기획관.

허진 외교부 조정기획관 jhur87@mof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