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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서원 답사기] 옥산서원(玉山書院)

鶴山 徐 仁 2014. 7. 13. 17:10

 

시니어 명예기자

[조선 서원 답사기] 옥산서원(玉山書院)

  • 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입력 : 2014.07.11 11:14

玉山書院(옥산서원)…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사적 제154호

1572년 文元公(문원공) 晦齋(회재) 李彦迪(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웠으며, 1574년 선조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에도 존치된 47개의 서원에 포함되며, 현재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9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또한,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도동서원과 함께 5대 서원으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원건축의 역사를 보면 옥산서원은 초기건축물에 해당하는데, 당시 지어진 서원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구성된 데 비하여 이 서원은 틀에 짠 듯 질서정연한 형식을 보인다고 평가된다.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으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구성에 정확하게 일치한다.


晦齋(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년) 

조선 중종 때의 문신, 東方五賢(동방오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종묘에 명종의 공신으로 모셔졌다. 경북 경주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이적(李迪)이었는데, 중종의 명령으로 '언(彦)'자를 덧붙여 '언적(彦迪)'이 되었으며,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이며, 성리학자로 이황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531년(중종 26)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세자의 사부라서 유배되지 않고, 파직만 당하였다. 이후 한양을 떠나 고향인 경주에 낙향하여 자옥산(紫玉山)에 올라 1532년 자옥산에 서실인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집중하였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동방 5현의 한 사람으로 지정되어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김종직과 이황 사이를 잇는 중요한 인물로 추대되었는데 이황은 이언적의 학통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지만, 이언적은 김종직의 적통으로 학문을 계승하였으므로 자신의 학문적 연원을 이언적에 연결했다. 이황 이후의 영남 사림에서는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김종직→손중돈→이언적→이황으로 연결하여 김종직으로 학문적 연원을 삼기도 했다.


東方五賢(동방오현)

성균관의 大成殿(대성전)에 가보면 孔子(문성왕)와 四聖(사성), 孔門十哲(공문십철), 宋朝六賢(송조육현)의 위패를 모셨는데 四聖(사성)은 공자의 수제자인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말하며 孔門十哲(공문십철)은 공자의 제자 중 학덕이 뛰어난 안연, 자공, 자로 등 10명을 말하고 宋朝六賢(송조육현)은 송나라의 여섯 名賢(명현)인 주돈이, 정이, 장재, 정호, 소홍, 주희를 말하는데 이렇게 21위가 대성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東國十八賢(동국 18현)을 올려 모두 39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東國 十八賢 (동국 18현)은 학덕이 높은 우리나라 인물 18인을 말하는데 시대별로

신라 : 설총, 최치원

고려 : 안향, 정몽주

조선 : 김굉필, 조광조, 이황, 정여창, 이언적,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김인후, 조헌, 김집을 말하며 東方 五賢(동방 5현)은 위 18인 중 조선 시대 성리학을 이끈 대유학자 5명, 즉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말한다. 이는 中國에서 5聖으로 孔子(공자), 顔子(안자), 曾子(증자), 子思(자사), 孟子(맹자)를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이 타계한 지 20년 후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서원을 창건하였으며 북으로 도덕산, 좌우로 자옥산과 화개산에 둘러싸인 채 맑고 아름다운 자계천이 흘러내리는 천변에 자리 잡고 있어 많은 사람이 여름철 무더위를 피하여 찾아오고는 있으나 서원의 상세한 내력과 역사적, 문화적 의의를 잘 모르는듯하여 안타깝다.

▲아름다운 자주빛 시냇물이라는 자계천이 서원 앞을 지난다.

 

▲옥산서원 전경. 윗쪽은 자계천에서 바라다 본 모습이고 아랫쪽은 입구쪽 모습이다.
▲외삼문. 역락문(亦樂門)이라고 하는데 중앙과 동쪽문에만 계단이 설치되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답답할만큼 비좁고 가깝게 누각인 무변루가 앞을 가로막는다. 대부분의 서원이 시원하게 사방이 트인 정자형태의 누각을 앞에 세우거나 외삼문 위에 얹어 놓았는데 옥산서원누각 무변루는 꽉 막혀보여 답답하다. 2층은 문짝을 활짝 개방하는 구조이지만 닫혀있어 그런가보다.
▲다행이도 그 사이에는 자계천을 끌어들인 맑은 물줄기가 인공수로를 타고 흘러 시원한 느낌을 준다. 작은 돌다리를 건넌다.

유생들의 휴식장소인 무변루를 들어서면 이곳은 전학후묘의 개념으로 앞쪽에 배치한 강학공간이다. 정면으로 강학당인 구인당이 보이고 좌우로는 동재 민구재와 서재 암수재가 마당을 가운데 놓고 대칭으로 놓여 있으며, 마당 한쪽으로는 밤에 필요하면 관솔불을 환히 밝히던 명료대(노주석)가 보인다.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무변루를 고개숙여 들어서면 한단 높은 마당 맞은편에 강학당인 구인당이다. 강학당의 구조는 중앙 세칸은 대청마루이며 좌, 우로 두칸짜리 온돌방이 있다. 각각 양진재, 해임재라고 씌어 있는데 교수들 공간이며 교무관련 일을 보는 곳이다.

처음에 말한대로 옥산서원은 서원의 이론에 맞게 매우 교리적으로 충실하게 지어졌다. 전학후묘에서 앞쪽에 ㅁ자형태의 강학공간은 단순명료하다. 그 뒷쪽이 제향공간인셈인데 이 역시 매우 간단한 구성이나 다만 왼쪽 옆으로 이언적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서 있다.

▲밖에 걸린 현판은 추사 김정희 친필이며, 안쪽에 걸린 구인당 현판은 한석봉 글씨이다.
▲안쪽에 바깥현판과 마주걸린 또하나의 옥산서원 현판은 영의정 이산해 글씨로 최초 사액현판이지만 현종 5년(1839년) 화재후 구인당을 다시 지으면서 받은 새로운 사액현판을 밖에 걸었다고 한다.
▲구인당의 뒷모습. 활주를 세운 팔작지붕에 정면 다섯칸, 측면 두칸의 건물이며 왼쪽편으로 개흘레를 내단 모습이다.
▲유생들 기숙사인 동재는 민구재. 서재는 암수재라 하며 좌우대칭 구조로 되어 있고 동쪽에 선배들이 기거하였다.
▲구인당 마루에서 내려다 본 마당. 정면이 누각인 무변루이며 좌우측이 동재, 서재이다. 마당 한쪽에 명료대가 보인다.

그의 묘소는 현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에 모셔졌으며, 신도비는 기대승의 글을 1577년(선조 10년)에 영의정 이산해 글씨로 써서 비석에 새겨 넣었으나 후에 망실되었다. 1586년(선조 10년) 손엽이 다시 신도비를 쓴 것이 현재까지 전한다.

▲회재 이언적 신도비. 한번 망실된터라 훼손을 막으려고 서원안으로 옮겼다고 한다. 3m가 넘는 큰 비석이다.

 

▲이수와 비신. 귀부를 갖춘 모습이나 비신을 꽂는 비좌 없이 바로 거북등에 홈을 파고 끼웠다.
▲제향공간은 내삼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러 신성한 구역임을 나타내고 사람이 들어가고 나오는 동, 서문에만 계단을 놓았다.
▲삼문 안으로는 위패를 모신 體仁廟(체인묘)와 제사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典祀廳(전사청)이 있다.
▲전사청 바깥쪽에는 經閣(경각)이다. 각종 어필이나 어서, 내사본등을 보관하고 있다.
▲어각 앞쪽, 강학공간의 동편 공간은 고직사이며 현재 관리동으로 사람이 기거하고 있어 동측문을 이용한다.

옥산서원은 이밖에도 보물인 삼국사기 완본과 이언적의 기록물등이 있는데 이런 각종 자료들과 역사를 정리, 전시하는 공간을 초입에 별도로 마련하여 방문객들로 하여금 살펴볼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서원을 답사차 방문한다면 역사자료관도 살펴보면 좋을것이며, 서원내 여러곳에 걸린 현판들이 누구의 친필인지? 그 명칭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새겨보는것도 또하나의 즐거운 숙제가 될 듯하다.

▲외곽 초입에 새롭게 세운 옥산서원 역사자료관.

獨樂堂(독락당)

회재 이언적은 함양박씨와 결혼했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어 사촌 동생의 아들 (5촌 조카 이응인)을 양자로 삼았으며, 파직후 고향에 돌아왔을때 자신의 행보가 여강(여주)이씨 전체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부친인 성균 생원 이번(李蕃)이 살던 집인 무첨당(無添堂)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락당에서 거주했으며, 여기서 얻은 측실에게서 서자 이전인(李全仁)을 얻게 된다.

그의 소실은 늙으신 부모를 성심껏 공양했는데, 회재는 첩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후일 사람들은 이응인을 본가로 돌려보내고 서자인 이전인을 적자로 올리라고 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주자가례를 고집, 가산과 학문은 양자 이응인에게 물려주었다.

서자 이전인은 뛰어난 학행과 효심이 남달랐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이언적의 대를 잇지 못했으며 이때 나라에서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주장(율곡 이이)이 있었으나 태종의 유언을 빌미로 반대하는 양반의 벽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납속 허통주장은 서얼허통의 물꼬가 되었으며 바로 이 때 이언적의 서손자이자 이전인의 아들인 이준도 납속허통을 받아 자신과 후손들의 과거 응시 길을 열었다.

▲독락당 솟을대문. 밖과 안쪽 모습이다.
▲독락당은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어 무시로 드나들수가 없다. 바깥에서만 볼 수 밖에 없다. 담장너머로 본 옥산정사는 보물 제413호.
▲맑은 시냇가 정자라 溪亭(계정)인가? 한석봉 글씨이다. 한쪽면을 자계천을 연하여 개방한 구조가 시원스럽다.

그리하여 서자 신분으로 부사직을 역임하고 은퇴 후 고향으로 되돌아갔으나 서얼차대가 유독 심한 지역 양반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면서 서얼들의 유향소나 서원 가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정에서의 허통은 이루어졌지만 삶의 기반인 지역 사회에서는 거부당한 이준은 71세의 나이에 다시 청원서를 올렸지만 그의 절절한 호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독락당은 이언적의 서자 이전인, 서손 이준으로 이어지는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맹자의 진심장구 상에 나오는 "옛날 어진 선비만이 어찌 홀로(獨)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의 도를 즐겼고(樂)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는데서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獨樂堂(독락당)은 옥산서원에서 자계천 상류쪽으로 1Km 못미처에 있다. 이언적의 본가 無添堂(무첨당)은 멀지않은 양동마을에 있는데 나중에 별도로 답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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