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선교자료

鶴山 徐 仁 2014. 4. 26. 13:04



신앙이란


신앙은 관념이 아니다. 신앙은 생활이다. 신앙생활이 도를 닦는 것이 아닌 이유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예수님은 진리다. 공개된 비밀이다. 이 비밀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다 공개되어 있다. 그저 성경을 펼치기만 해도 진리가 보인다. 보이는 것이 다 지혜와 지식이다.
-조현삼의 [삶을 찾아서] 중에서-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성경은 상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직접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 예수님을 통해,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우리의 권한이=틈求�
사도행전 1:6,7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So when they met together, they asked him, "Lord, are you at this time going to restore the kingdom to Israel?" He said to them: "It is not for you to know the times or dates the Father has set by his own authority.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울며 - 사 59:9-15
9.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10.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11.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12.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13.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14.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15.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죄는 회개하지 않으면서 단지 구원이 임하지 않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 하여 절망하며 곰 같이 무르짖고 비둘기 같이 슬피 울어봐야 그것은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11절).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다>(12절)는 말씀은 아직도 회개하므로 사함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죄악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한 아무리 곰 같이 부르짖어도, 비둘기 같이 슬피 울어도 기도 응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빛을 바라나 어둠 뿐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 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9절).
죄악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절망스럽고 흑암한 지를 극명하게 묘사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10절). 그야말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가장 딱하고 불쌍한 인생, 그가 바로 <심히 많은 죄와 허물>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디를 봐도 캄캄하고, 어디를 가도 두루 더듬어야 합니다. 성공을 기대하고 행복을 바라나 실패와 불행이 마치 온 대지에 황혼이 내리듯 그렇게 임합니다. 다윗이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하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죄책이 있습니다. 부인하거나 은폐하기에는 그 죄가 너무나 명백하고, 변명하고 둘러대기에는 그 허물이 너무도 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에 대한 공의로우신 증인이십니다. 이 고난주간 성금요일에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주님 십자가 아래 내려놓읍시다. 그것만이 우리가 다시 살 길이요 빛을 볼 수 있는 길임을 바르게 깨달읍시다.

여호와를 속이고 배반하고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13절).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처하는 자들의 죄악이 다른 이들보다 더 악독한 이유는 그게 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여호와를 속인 죄악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로서 그 모든 처신이 정의롭고 신실해야 함에도 거짓되고 포학했다면 그것은 사람 이전에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나님께 거짓된 자들이 사람에게 신실하지 못하고 악했다면 그 역시도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곧잘 거짓말을 내뱉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은 대개 먼저 마음 속에 어떤 악의를 잉태한 후 밖으로 발설합니다. 즉 거짓말은 단순한 실언이라기보다 마음에서 비롯된 계획적인 죄악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준엄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합시다. 나의 포학과 패역이 곧 여호와에 대한 배반과 속임이요 나의 거짓과 악한 말들이 다 마음의 부패에서 나오는 죄악임을 깊이 공감하며 진지하게 회개하시길 빕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가르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우리가 볼 수는 있으되 그 누구도 대신 질 수는 없는 십자가라는 점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져온다. 그의 고통은 우리를 구속하며, 우리의 고통은 이미 성취된 승리에 동참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삶은 여전히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온다.
마이클 호튼의 [약함의 자리] 중에서-

날마다 우리 앞에 놓인 십자가, 그것이 영광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십자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붙잡게 됩니다. 그것만이 나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이겨낸 평안을 주며, 죽음을 깨뜨린 생명을 줍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
데살로니가후서 1: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Therefore, among God's churches we boast about your perseverance and faith in all the persecutions and trials you are enduring.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리라 - 사 59:16-21
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17.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19. 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20절).
그리스도께서 구속자로 오시리라는 것은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모든 예언과 약속의 핵심입니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한다>는 말씀은 곧 <시온을 위하여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속자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공동체를 위해 임하십니다. <야곱의 자손>이라는 말씀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을 가리킵니다. <죄과를 떠나는 자> 역시 아예 죄를 짓지 않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지을지라도 회개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구속자가 어디, 어떤 자에게 임하시는지를 깊이 명심할 일입니다.

공의를 갑옷으로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17절).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란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결정하는 본질이며 하나님의 고유한 본성을 뜻하는 절대적 속성입니다. 인간 구속의 방편인 주님의 십자가도 인간의 죄를 응징하셔야 했던 <공의>의 실현의 필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십자가에 달아 심판하시므로 인류의 죄악에 대한 당신의 공의를 완벽하게 관철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속자, 대속자이신 주님이야 말로 공의를 갑옷처럼 입으신 공의의 화신이셨습니다. 또한 구속자이신 주님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시므로 구원에 이른 우리들도 주님처럼 공의를 구현하며 살아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는>(4절) 극도로 불의한 시대입니다. 부디 구속자처럼 공의를 갑옷으로 삼아 날마다 정의를 실현하며 사십시오.

나의 영과 나의 말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1절).
그렇습니다. 공의롭게, 정의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면 절대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 네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하신 하나님의 다짐이요 맹세십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은 공의롭고도 정의로운 삶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우리가 성령으로 말씀으로 늘 충만해야 할 이유입니다. 인간적인 의지나 노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성령과 말씀의 역사를 힘입으면 능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구속자처럼 당신도 꼭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셔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당신 뿐 아니라 자녀들도 후손들도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하여 진정한 공의의 실현자들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은총의 힘을 보유하기


거룩하게 되기와 제자가 되는 근본적인 소명은 그저 예수에게 봉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에 의해 받은 섬김의 소명은 그의 은총의 보답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이웃들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을 그에게 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가 우리를 위해 그 자신 속에 입수해 온 모든 것을 우리가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예우하는 것입니다.
-스티브 힐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 중에서-

우리는 가끔 모든 출발을 나에게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불완전한 나로부터 시작되는 봉사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총 때문에 순종하는 봉사는 사람을 세우고 기쁨을 누립니다. 항상 ‘내 인생의 시작을 내가 할 것인지?’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실 것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살아가기 위해 선택해야 할 일입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여호와께서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
시편 94:17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Unless the LORD had given me help, I would soon have dwelt in the silence of death.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그리스도인의 역할(1) - 마태 5: 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13년 동안 감방에서 복역 후 복수를 꿈꾸는 금자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감방에서 기독교를 접하면서 종교적 구원이 아닌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복역 후 그녀를 찾아온 교회의 환영식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 하는데 "너나 잘하세요.."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신앙의 경건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거룩성과 경건성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구별됨과 깨끗함과 정직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변화된 그리스도인들로 세상의 빛 된 사명과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심은 세상이 그만큼 어둡다는 뜻일 것입니다. 시골에서 자란 분들은 호롱불을 켜고 살았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고 다음날 아침에 콧구멍이 새까맣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나마 기름이 아까워 일찍 끄고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빛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생물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빛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두움 공간이라도 등불을 켜는 순간 어두움은 다 물러가고 밝아집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거리마다 휘황찬란한 네온의 불빛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마치 불 꺼진 동네와 같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인 '디오게네스'가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 어두워 참 빛을 찾는다고 했답니다. 이 세상이 무화와 문명의 발달로 편리해 지지만, 문제는 점점 더 세상이 죄악으로 어두워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흑암을 밝혀줄 등불과 빛은 무엇일까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나는 세상의 빛이라'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오셔서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요8:12). 생명과 부활의 주님은 죽음과 어두움을 깨뜨리시고 생명의 빛으로, 부활의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 복음만이 죄악으로 어두워진 도성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은 생명의 빛으로 성도들에게 생명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 빛을 받아 이 빛이 내 안에 있는 자는 참으로 행복자입니다.
빛은 드러나게 비추어야 합니다(14-15). 산위의 동네는 모든 사람이 다 볼 수가 있습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불을 올려놓는 기구인 등경위에 두어서 온 집안이 환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남에게 본이 되고 덕이 되고 유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고 예수 믿는 것을 감추지 말고 착한 행실로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16). 빛 된 삶은 선하고 착하고 정직한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등불에는 반드시 심지와 기름이 있습니다. 그냥 빛이 발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 헌신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발적인 불편함을 선택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의 기름을 태우고 심지를 태워야 어두움을 밝힐 수 있습니다.

[적용]
- 나의 이웃들이 구별성과 정직함에 있어서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자신을 성찰해 보십시다.
- 나는 삶의 변화를 위해 얼마나 무엇을 노력하고 있나요? 최선을 다하지 못함을 회개하십시다.
- 빛의 기능을 정리해 보고 세상 속에서 역할을 감당키 위해 구체적으로 다짐해 봅시다.

[기도]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놀라우신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어두워져 가는 세상에서 빛 된 사명 잘 감당하길 원합니다. 빛 되신 주님께서 저를 다스려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며 살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나를 부인할 수 있는 강한 믿음과 담대한 용기로 헌신하게 하시옵소서.

글쓴이 : 윤영대 총신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실천신학 박사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행복누리교회(서울 잠실 소재) 담임목사


교회에게 던지는 질문


이 땅의 진정한 교회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한 공동체는 어떤 것입니까? 이 질문을 날마다 되물으며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우리 몸에 익은 본능의 패턴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집에 가면 부부싸움을 하고 직장에 가서는 동료들과 권력 다툼을 하며 교회에 와서도 힘겨루기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 위에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져본 적이 없다면, 십자가를 통과한 적이 없다면,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어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교회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조정민의 [왜 예수인가?] 중에서-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공동체입니다. 날마다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넓은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아래 모여 있는 죄인들이지만, 십자가를 맛보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셨던 걸음을 따라 갑니다. 교회는 십자가위에 세워진 공동체로 남아 있을 때 교회입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맡김>
우리는 세탁소에 옷세탁을 맡길 때 팔 한 쪽만 맡기지 않습니다. 통째로 믿고 맡깁니다. 그 부분에서 만큼은 세탁소 주인이 전문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보다도 나에 대해 더 잘 아시고 내 삶을 더 잘 아시는 그 분께, 내 삶의 전문가이신 그 분께 우리의 삶을 맡깁시다. 오늘 오후시간만 맡기거나, 20대의 삶만 맡기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온전히 통째로 하나님께 맡깁시다.
그 분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그리스도인의 역할(2) - 눅 14: 34 - 35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전라남도 신안군에는 마을마다 아름다운 교회당이 세워져 있고, 증도의 경우는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예수를 믿는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입니다. 신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을 나룻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끈질기게 주민들을 설득하고 먹이고 입히고 돌보면서 교회를 세운 섬마을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때문입니다. 그녀의 섬 주민을 향한 끈질긴 사랑과 눈물겨운 헌신과 순교의 피가 있었기에 오늘날 신안군과 증도가 복음화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고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명히 변화된 삶을 통하여 세상에서 영향을 주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도의 사명은 죄악되고 부패한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사명으로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성도는 너무 비관적이거나 긍정적으로만 보아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요3:16).
성도는 죄악된 세상이라고 해서 세상과 결별하고 은둔생활을 함으로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이며, 교육을 받고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제도가 바꾸면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비록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속에 빠지지 않고, 이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른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소금처럼 썩는 것을 막아 주어야 합니다. 즉 방부제의 역할입니다. 생선이나 채소에 소금을 뿌리면 썩지 않습니다. 소금은 썩는 일을 방지합니다. 이처럼 성도와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도 학원도 사회도 그 대로 놔두면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이 사회에서 썩는 것을 방지하는 소금처럼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소금이 하는 일은 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모든 음식은 좋은 소금으로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삶에 보람과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가정을 돌보든지 노동을 하든지, 공부하는 것과 사업을 경영하는 것에 있어서 소명의식을 부여해 줍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삶의 맛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역할을 감당하려면 자신이 녹아서 없어져야 합니다. 소금은 자기의 모습을 들어 내지 않고 녹아서 없어지고 맙니다. 없어진다는 것은 자기희생을 의미합니다. 일체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사람은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신안군의 복음화를 위해 문준경 전도사가 희생하였듯이 오늘도 이런 세상속에서의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썩는 것을 막고 있습니까? 함께 썩어져 가고 있습니까? 맛을 내고 있습니까? 오히려 맛이 없어지게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 없어지며 희생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며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까? 소금이 필요한 이 시대에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썩고 부패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적용]
- 나는 세상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 점검해 봅시다.
-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소명감이 있는지? 그리고 사명감으로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다.
- 소금의 기능을 정리해 보고 세상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역할을 감당키 위해 다짐해 봅시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저를 불러주시고 돌봐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역할을 잘 감당하길 원합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이 사명 감당케 하옵소서. 좀 더 희생하고 손해보며 주님의 영광만을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글쓴이 : 윤영대 총신대학교 대학원 석사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실천신학 박사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행복누리교회(서울 잠실 소재) 담임목사


역사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과


두 사람이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경험한 결과
하나님에 대해서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무엇이 이런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게 했을까?
이유는, 한 사람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했다.
무신론자들은 망원경으로 신을 보지 못하고
현미경으로 영혼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영혼의 존재도 믿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역사의 커튼 뒤를 보기 위해서
망원경이나 현미경에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정현 목사의 ‘희망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본 사람은 구원의 편에 섰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의 길을 달려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의 눈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내 영혼과 이 민족이 역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 붙들릴 수 있도록 눈물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이 민족이 하나님과 영혼의 존재를 보는
눈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그가 나를=泳浩譏� 그가=�이름을=횰�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Because he loves me," says the LORD, "I will rescue him; I will protect him, for he acknowledges my name.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 창세기 40장 16 - 41장 13절
16.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17.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18.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19.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20.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21.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23.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1.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2.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3.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4.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5.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6.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7.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8.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9.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10.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11.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12.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13.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요셉은 술 맡은 자의 꿈을 해석했던 것처럼, 떡 굽는 자의 꿈도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 해석은 술 맡은 자와 달리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오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셉은 그가 사흘 후에 나무에 달리고 새들이 그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요셉의 해석처럼 술 맡은 자는 바로 왕에게 다시 부르심을 받아서 직업이 회복되었고, 떡 굽는 자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은 자신이 바로의 궁전에서 다시 일하게 되었지만 요셉의 간절한 요청을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이처럼 자신이 필요할 때는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려운 일이 지나가면 은혜를 입은 일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의지했다가 실망한 적이 어디 한 두 번입니까? 그런대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들 일을 겪게 되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먼저 달려갑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믿고 있지만, 내 삶의 자리에게 구체적으로 역사하시고, 나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대화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삶에 오늘도 동행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에게 요청하지만,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이런 경험들이 결국 형들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이유가 된 것이 아닐까요?

오늘 술 맡은 자가 자신의 편안한 삶 때문에 잊어버렸던 요셉에 대한 기억을 언제 다시 기억하게 됩니까? 그것은 이 년 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 바로 왕이 꿈을 꾸었을 때입니다. 자신이 모시는 왕이 꿈을 꾸고서 그 꿈에 대한 해석을 요청하자, 술 맡은 관원장의 머리에 요셉에 대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그는 그 때서야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요셉을 잊고 살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회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으셨고, 늘 그의 삶에서 동행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서 눈에 보이고, 우리를 도울 것 같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글쓴이 : 전기철 서울신학대학,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보스톤 조직신학 석사(S.T.M)/연세대학교 박사학위(Ph.D)
강남새사람교회 담임목사


나 혼자의 힘으로는


남북전쟁 때 한 노인이 백악관 앞에서 울고 있었다.
노인은 탈주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의 구명을 위해 링컨대통령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보초병들은 백악관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소년이 노인에게 “할아버지 나를 따라 오세요”
하고 곧장 백악관으로 달려갔다.
노인은 소년을 따라 백악관으로 들어섰다.
노인을 붙잡는 보초병에게 소년은 “이 분은 우리 할아버지예요”
보초병들은 더 이상 노인을 붙잡을 수 없었다.
노인은 대통령을 만나 하소연했고 아들은 사형을 면했다.
소년은 링컨대통령의 아들이었다.
-임한창 목사의 ‘링컨 대통령의 아들’에서-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것으로 인해
하늘의 문을 무사통과하고.
죽음대신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천국을 소망하십니까?
천국은 백악관 앞에서 눈물 흘리는 노인처럼
나 혼자의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안내자가 되어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의인은 고난이=뮌립�
시편 34:19,20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A righteous man may have many troubles, but the LORD delivers him from them all; he protects all his bones, not one of them will be broken.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일어나라! - 사 60:1-9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6.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7.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8. 저 구름 같이,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
9.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
슬픔과 절망에 빠진 이 나라를 향해 부활하신 주님이 외치십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1절). 주님은 <참 빛>(요1:9)이십니다. 따라서 지금은 <어둠이 온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고>(2절) 있지만 이제 곧 밝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해서도 <세상의 빛>(마5:14)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빛 그 자체는 아니지만 분명 우리는 주님의 빛을 전달하는 반사체들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빛의 자녀들답게 주님의 밝은 빛을 세상을 향해 반사하라는 뜻입니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3절).
세상 사람들이 믿는 자들이나 교회에 대해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것은 다 교회가 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마 5:13)이듯 빛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어나 빛을 발하며 힘껏 주위를 밝히면 모두가 다시 그 광명으로 나아옵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갈수록 빛을 잃어가고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를 다시 돋우고 그걸 등경 위에 올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두움을 몰아내고 다시금 세상에 광명을 비춰야 합니다. 그러면 나라들도, 왕들도 다 그 빛 앞으로 나아올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네 아들 네 딸들이 돌아 올 것이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4절).
꺼져가는 빛을 되살리고 참 빛이신 주님의 빛을 제대로 반사하기만 하면 전쟁통에 흩어지고 잃어버렸던 아들 딸들도 다 되돌아 온다고 합니다. 침몰한 세월호에 갇혀 아직도 구조되지 못하고 있는 어린 아들 딸들의 생환 소식이 너무도 절실한 하루하루입니다. 이 부활주간 내내 제대로 꽃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차가운 바닷속에 갇혀버린 실종자들의 귀환을 기도하고 있는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이 아들 딸 모두를 품에 고이 안아 무사히 귀환하게 하시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길 빕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능히 우리로 하여금 <기쁜 빛을 내며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게>(5절)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아들 딸들 뿐 아니라 <바다의 부와 이방나라들의 재물>(5절)도 돌아온다고 합니다. 허다한 낙타, 금과 유향, 숫양도 주어지고,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9절)고도 하십니다. 부디 일어나 빛을 발하시므로 이런 모든 은혜와 축복이 이 절망의 땅 대한민국에 하루 속히 임하길 진심으로 빕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사랑스런 눈,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고 싶으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오드리 햅번의 ‘아들에게 들려준 시’에서-

나의 손길이 필요하다면 결코 누구도 버리지 말고.
사람들을 상처로부터 복구시키고 병으로부터 회복되도록
고통으로부터 구원받도록 도와야합니다.
이러한 자녀 교육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귀한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지혜와 사랑을 가지고
귀중한 교훈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신과 이웃을 돕는 것 이상으로 선한 마음으로 살도록
올바른 정신과 자세를 심어주십시오,
믿음의 부모, 사랑의 부모님이라면.




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너희는 내=注恬�� 들으라>
예레미야 7:23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but I gave them this command: Obey me, and I will be your God and you will be my people. Walk in all the ways I command you, that it may go well with you.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너를 불쌍히 여기노라 - 사 60:10-14
10.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11.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12.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
13. 레바논의 영광 곧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이 함께 네게 이르러 내 거룩한 곳을 아름답게 할 것이며 내가 나의 발 둘 곳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14. 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동양적인 신관으로 보면 하늘이란 자고로 늘 초연해야 합니다. 인간의 슬픔이나 기쁨, 패배나 승리 따위에 영향을 받는 존재라면 더 이상 신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끝끝내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여간 범속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그 범속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의 그 범속성이 곧 인간과 더불어 산다는 증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마치 어린 자식을 키우는 엄마와도 같습니다. 품어 주고 울면 달래고 끝끝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버려 두거나 때려주고 그러다가도 다시 끌어 안는 엄마! 그런 엄마가 변덕스럽다면 그것은 어린 자식을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오는 변덕입니다.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10절).

왕들이 너를 섬기리라
<…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10절).
언제는 이방의 왕들에게 끌려가 노예살이 종살이를 하게 하시더니만 이제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쌓고 그들의 왕들이 유다를 섬기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 올 것이므로 성문을 항상 열어두어야 할 것이니라>(11절)고 하십니다. 이것은 바사 왕의 명령으로 속주의 총독들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할 때 도움으로써 실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이방인들을 동원하셔서라도 기어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십니다.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을 통해서라도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내 거룩한 곳을 아름답게 할 것이며 내가 나의 발 둘 곳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13절)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 스스로, 주님 자신이 끝까지 지키사 그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드러내신다는 약속이십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주님이 친히 지키사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에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더 하십니다.

너를 멸시하던 자들이 네 발 아래 엎드리라
<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14절).
실로 통쾌한 반전입니다. <너를 괴롭히고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리게> 하신다고 합니다. 시편 23편도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 내 잔이 넘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을 멸시한 자들로 하여금 되려 멸시당하게 하십니다. 사기를 꺾고 비천하게 하사 그들이 그토록 무시하던 하나님 백성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여호와의 성읍과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시인하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지금 세상 사람들의 무자비한 교회 공격이나 모욕과 폄하에 너무 괴로워하거나 분노하지 마십시오. 결국은 하나님이 멋진 반전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시고 역전시키실 것입니다. 조만간 허락하실 그 아름다운 승리를 기대하시며 더욱 인내하시고 자제하시고 담대하시길 빕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더 강하신 분을 인하여


마귀를 결코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종종 마귀에 대하여
한가로이 농담을 할 수 있는데
사실상 그것은 하나의 큰 죄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죄수란 평소에 검사와 교수대를 우습게 여기던 사람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옥과 마귀에 대해서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은
마음속이 악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탄보다 더 강하신 분이 있음을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죄인들의 친구,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송태승 목사의 ‘마귀를 이기는 예수’에서-

마귀를 얕잡아 보아서도 안 되지만
십자가 위에서 개가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정복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마귀도 강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더 강하시기 때문에
그의 손아귀로부터 포로들을 빼앗아
그들을 묶고 있는 쇠고랑을 풀어주실 수 있습니다.
오늘도 마귀를 멸하시는 예수님의 권능아래 거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시는 날이 되실 것입니다.





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주의 귀를=뺐� 기울이사>
시편 102:2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Do not hide your face from me when I am in distress. Turn your ear to me; when I call, answer me quickly.
글쓴이 : 안유미
프리랜서 시각편집디자이너
영원한 아름다움이 되게 하리라 - 사 60:15-22
15. 전에는 네가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16. 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17. 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18.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국경 안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부를 것이라
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20.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21.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이 본문은 교회가 누릴 복되고 영광스러운 비전을 예언하는 대목인데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한동안 누렸던 외적 평화를 모형삼아 궁극적으로 이 시대 교회가 누릴 영적인 평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네가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15절). 회복된 이스라엘, 즉 교회는 그야말로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왕의 젖을 빨리라
<네가 이방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16절).
그동안 예루살렘은 미움과 멸시를 받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원수들은 예루살렘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 황량한 성읍을 지나가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사람들은 그 애처로운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어 그 길로 지나가기를 피했습니다. 그러나 놀램과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그곳이 이제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여 영원한 아름다움을 갖춘 여호와의 성읍이 될 것이고 대대로 모든 선한 자들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들의 사랑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더없이 부해져서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할 것>이고, 사회도 안정되어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을 것>(17절)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는 강포한 일, 황폐와 파멸이 네 국경 안에 다시 없을 것>(18절)이라고 하십니다. <성벽을 구원이라 성문을 찬송이라>(18절) 할 것이라는 것은 그만큼 안전과 안녕을 보장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네 빛이 되리라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20절).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서 행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을 비롯해 이 세상의 빛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물리적인 빛들이 다 사라진다고 해도 그들은 여호와의 빛 안에서 평안히 행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는 해나 달이 필요없습니다. 마치 햇빛 앞에서 촛불이 무색하듯 하나님의 광명 앞에서의 햇빛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빛으로 삼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충족하고도 영원한 해와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네 모든 슬픔이 끝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그늘진 땅,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납덩이처럼 깊은 심연에 가라앉아 버린 이 나라 온 국민들의 가슴에 다시금 희망의 빛이신 여호와의 생명의 빛이 비치길 바랍니다. 여호와의 치료하는 광선으로 모두가 기운을 차리고 새 출발할 수 있기를 빕니다. 사망자 유족들, 실종자 가족들 모두도 그 슬픔이 하루 속히 가시고 소망의 빛을 보게 되길 기원합니다. 세상 빛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나 하나님의 빛이 임하시면 반드시 그런 놀라운 변화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날 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21-22절).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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