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은 자유를 얻어내기 위한 독일인의 끊임없는 노력과 용기 때문에 가능했다. 통일을 위해 자유를 버려선 안 된다.”
박성조(79) 베를린자유대 종신교수가 13일 독일 정부로부터 ‘대십자 공로훈장’을 받았다. 대십자 공로훈장은 독일 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으로, 지금껏 국내 인사 중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수환 전 추기경, 정몽준 의원, 김황식 전 국무총리 등이 수상했다. 박 교수는 한·독 공동 연구와 출판물 발간 등 양국 학술교류와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게 됐다.
훈장 수여식에 때맞춰 ‘한반도 통일의 미래와 통합’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13일 서울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 교수는 통일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자유’를 강조하며 “그동안 한국의 통일 정책은 동족주의(同族主義)에 기초를 뒀지만 통일을 위해 한국이 고군분투해 가며 쟁취한 자유를 포기해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남북 고위급 접촉이 성사되는 등 최근 남북관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시기에 독일에서 50년 이상 거주하며 독일 통일을 목격한 박 교수의 통일관은 어떤 시사점을 줄까. 그를 만나 의견을 들었다.
-왜 통일보다 자유가 앞서야 한다고 역설하는가.
“통일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 민족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앞세우다 자칫 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현재의 세계를 보라. 한국인이 미국인과 교류한다. 유럽 사람과 비즈니스하며 일본인과 협력한다. 국경이 없는 세상이다. 이게 어디서 온 것인가. 모두 자유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런데 통일이란 화두에 매몰되다 보면 자칫 성역처럼 여겨 그 어떤 것도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되고, 민족을 중심으로 한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통일론만 득세하게 된다. 통일 지상주의가 갖는 위험성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독일 통일은 어떠했나.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우선 경제력이다. 돈이 있어야 뭐든 가능하지 않나. 서독의 꾸준한 경제성장이 밑거름이었다. 둘째는 주변 여건이다. 미국의 적극적인 협조와 소련의 고르바초프 개방 정책이 통일을 유도하고 성숙시켰다. 셋째는 위대한 지도자다. 1970년대 초반 빌리 브란트(1969∼74 재임) 서독 총리부터 시작돼 이후 헬무트 슈미트(1974∼82)와 헬무트 콜(1990∼98)에 이르기까지 흔들리지 않는 리더십이 통일의 기반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간과해선 안 되는 게 있다. 이들 지도자의 철학이 통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앞세운 건 바로 ‘유럽의 평화 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독일 통일까지 이를 수 있었다.”
-통일이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좀 더 설명해 달라.
“독일 지도자들은 독일이란 나라를 하나 딱 떼어놓은 게 아니라 ‘유럽의 평화와 통합’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움직였다. 통합과 평화를 위해선 어떠해야 하나. 전쟁의 위험 요소를 제거해야 하지 않은가. 그러려면 전쟁 가능성을 갖고 있는 분단된 국가를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논의가 옮겨갈 수 있게 된다. 여타의 유럽 국가가 독일 통일을 적극 지지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적극 반대는 하지 않게끔 만들었다는 점에서 독일 지도자의 정책 방향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 그런 측면에서 자유를 더 강조하는 것인가.
“그렇다. 자유를 방기하고 민족을 강조하면 자칫 주변의 반발을 살 수 있다. 과연 우리의 주변 강대국이, 미국과 러시아는 물론 중국·일본이 한반도의 통일을 진정으로 원할까.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민족을 앞세우는 건 정밀하지 못한 전략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북한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현재 상태에서 통일을 했다간 어떤 후유증을 겪을지 아무도 모른다. 예멘을 보라. 북예멘과 남예멘이 전쟁까지 치러가며 통일을 이뤘지만 아직도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지 않은가. 표면적으로 통일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자유라는 가치관을 공유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 접점이 생겨 통일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 깃발 아래 통일을 할 순 없지 않은가. 자유는 통일보다 앞서는 가치다. 통일의 대가가 자유를 버리는 것이라면 그런 통일, 집어치워라.”
부산 출신인 박 교수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59년 독일로 건너가 73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독일 대학 정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보훔대 동양학부 학장, 베를린자유대 사회과학부 학장을 역임했고 베를린자유대 한국학센터 설립을 주도해 독일 내 한국학 연구의 기반을 닦았다. 최근에는 중국 옌볜(延邊) 과기대와 세르비아 메가트렌드대 총장을 지냈고, 서울대 행정대학원 초빙교수를 지냈다.
-자유주의를 북한에 전파시킬 수 있는 복안이 있다면.
“결국은 교육이다. 지금도 독일엔 북한 유학생이 20명가량 있다. 그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배우고 느끼고 돌아가겠는가. 해외에서 맘껏 호흡할 수 있는 학생이 결국 북한으로 돌아가 자유주의를 전파하는 미세혈관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으로 난 믿는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자유의 또 다른 얼굴은 책임이다. 한국 기업이 자유로 취득한 이윤을 북한 유학생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사회에 환원해 주길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물론 한국 기업을 전면에 내세우면 거부감이 들어 어렵겠지만, 해외 유수의 재단과 연결되면 세련된 방법으로 그들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단기 성과가 아닌 긴 호흡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발언이 화제다.
“어떤 뜻에서 나온 발언인지는 충분히 공감한다. 젊은 세대가 통일의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기에, 통일에 대한 전 국민적인 막연한 불안감이 있기에, 또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불식시켜야 한다는 측면에서 나왔을 것 같다. 하지만 대박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질 경우 근거 없는 기대감을 갖게 되는 건 아닌지 솔직히 걱정된다. 통일,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간다. 독일도 이미 통일을 이룩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정부의 재정지원이 계속돼야 한다. 한마디로 돈을 퍼붓는 꼴이다. 도로·항만·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에 들어가는 액수는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게다가 첨단 디지털 세상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북한을 중화학공업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겠다는 방안이 과연 현실적인지도 모르겠다. 통일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오랜 준비와 치밀한 검토가 절실하다.”
-한국 정계에선 요즘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대안으로 독일식 다당제와 분권형 리더십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독일에선 기민당·사민당·기사당·공산당·녹색당 등 4~5개의 정당이 경쟁한다. 하나의 정당이 과반수를 얻기 힘든 체제다. 그러니 정당끼리 합쳐야 하고, 그 안에서 협의하고 절충하는 문화가 싹트게 된다. 독일식 타협 정치는 그런 경험의 산물이다. 나라의 여건이 서로 다른 만큼 이런 풍토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시킬 순 없다. 하지만 선거 결과를 승복하지 못하는 지경이라면 그런 민주주의는 해선 안 된다. 그 원인이 권력을 독점하는 승자 독식주의에서 비롯됐고, 이로 인해 대결 구도가 심화돼 통치불능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면 이젠 대한민국도 진지하게 권력구조 변화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할 때다. 그 구체적 방안이 이원집정부제이든, 분권형 대통령제이든 집중화된 권력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