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큐티] 두려움으로 사는 것, 믿음으로 사는 것 (도서/사진/말씀)

鶴山 徐 仁 2013. 5. 30. 14:12


두려움으로 사는 것, 믿음으로 사는 것


캐나다에는 세인트 로렌스라는 강이 있다.
어느 겨울, 한 사람이 강을 건너기 위해 얼어붙은
그 강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걸어서 강을 건너는 것이 가능한지 확신이 안 서
무릎을 꿇고 기어가다시피 하며 건너기 시작했다.
벌벌 떨면서 얼어붙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두 마리의 말이 마차를 끌고 그 사람 곁을 획 지나가 버렸다.
그는 순간 두려움과 믿음을 생각했다.
-김원태의 ‘청년아 영적부흥을 꿈꾸라’에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고 초조한 인생을 살지만,
믿음의 사람은 용기 있고 확신 있는 인생을 삽니다.
우리가 두려움보다 믿음을 가지고 살면
사는 것이 정말 신날 것입니다.
세상을 이끌고 세상을 바꾼 자들은 믿음이 큰 자들이었습니다.
내 안에 두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산다면
우리 인생은 힘 있고 든든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당신 뜻대로 살게 해주세요.
주님
제 생각대로 살지 않게 해주세요.
일이 제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실은 주님 뜻대로 풀리고 있음을 알게 해주세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당신 뜻대로 살게 해주세요.
글쓴이 : 김나현
영화연출
근심과 슬픔의 날 - 사 17:7-11
7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8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9 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10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
11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그님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11절).
수확의 때는 당연히 기뻐하고 즐거운 날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도리어 슬픔과 고통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확량이 기대치에 못 미친다거나 누가 곡식을 몽땅 베어갔다거나 무자비한 적군들이 다 탈취해 간 경우라면 오히려 그 날이 큰 고통과 슬픔의 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보화를 이 땅 말고 저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이 땅에 쌓아둔 보화는 언제든 약탈당할 수 있지만 하늘에 쌓아둔 보화는 누구도 결코 빼앗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세라와 태양상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8절).
추수 날 슬퍼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자기의 손으로 만든 우상의 제단을 허물어야 하고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와 태양상> 같은 우상을 부숴버려야 합니다. 아세라와 태양상은 이스라엘의 가장 오래된 우상들이고 또 가장 유력한 우상들이었습니다(신 4:19, 욥 31:26). 당신의 우상, 당신이 만든 우상의 제단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나 그 사람만의 은밀한, 비밀한 우상이 있고 또 제단이 있습니다. 올해도 당신이 풍성한 수확과 기쁨의 추수를 기대한다면 단호히 그 모든 나만의 제단, 나만의 비밀스런 우상을 다 소탕해야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나 명예나 외모나 이성이든 내 안의 우상을 모조리 타파해야만 비로소 추수의 때가 슬픔의 날이 아닌 기쁨과 보람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방의 나뭇가지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뭇가지도 이종하는도다>(10절).
그 땅에 자생하는 나무들로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이웃나라에 사람들을 보내 진귀한 묘목들을 비싼 값에 사들이고 그것으로 접붙임을 하는 등 온갖 고상한 취미와 사치로 온실을 지어 오직 그들만이 이국적인 꽃과 식물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연을 가꾸고 화원을 꾸미는 일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지나치게 그 일에 탐닉하여 도를 넘는 일은 분명 어리석습니다. 더구나 가난한 사람들이 여전한 사회에서 소수의 부자나 권력가들만이 사치한 문화를 즐기며 고상한 취미생활로 위화감을 조장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곧 더불어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현대사회는 삶을 즐길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다 구비했습니다. 그럼에도 도통 감격과 환희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더불어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소유한 풍요 속에서 삶을 즐기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원성이 너무 큽니다. 그들의 불행이 나의 삶을 침범해서 길게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잘 사는 것은 반드시 더불어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더불어 살고자 하는 개인과 사회를 축복하시고 격려하십니다. 나 홀로 부와 특권을 즐기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심판 받습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