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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함은 구원의 빛
우리나라는 국사교육을 공통사회과목에 편입시켰습니다. 그리고 사법시험에도 국사 과목을 빼버렸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역사의식이 사라져가고, 독도 사건을 당하고 나서야 다시 국사과목을 부활시킨다고 하고 있습니다. 독립기념관만해도 일제의 만행과 우리가 당한 수치를 더 살려놔야 합니다. 그리고 생체실험관, 정신대관 ,언어말살관 등이 더 지어져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박물관 2층 동판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망각은 포로 상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억함은 구원의 빛이다.’ -소강석 목사의 ‘믿음을 자손대대로 전수하라’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고난의 역사교육을 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책임지는 믿음의 자녀를 만들기 위해서. 자녀에게 예수 만 잘 믿게 하면 되지 무슨 고난 받은 역사교육이 필요하냐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큰 인물,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은 분명한 역사관을 가지고 준비해야하므로 달갑지 않을지라도 부끄러운 과거사를 기억하고 바로 알도록 가르쳐 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수치와 고난을 당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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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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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斷想] - 669 |
노랑 가을 빨강 가을 파랑 가을
그리고 붉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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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민수 현)백석대학원 미술학과 박사과정 현)기독교 대안학교 그레이스 아카데미 자문위원/미술강사 현)스타선교회 홍보사역 현)크로스인 대표/디자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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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높이 계시고 권능으로 역사하신다 - 욥 36:17-23 |
17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그대에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정의가 그대를 잡았나니 18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많은 뇌물이 그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까 조심하라 19 그대의 부르짖음이나 그대의 능력이 어찌 능히 그대가 곤고한 가운데에서 그대를 유익하게 하겠느냐 20 그대는 밤을 사모하지 말라 인생들이 밤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끌려 가리라 21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그대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 22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높이 계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23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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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의 욥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고도 예리합니다. 욥이 실제 어떤 인물이건 간에 환난 가운데서 보인 그의 태도만큼은 악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악인처럼 말하고 행동했으며 악인들을 즐겁게 하고 악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악인들의 이익에 일조하려는 듯 그들과 한 통속이 되어 그들을 부추겼기 때문에 지금 그가 악인이 받을 심판과 정의에 붙잡혔다(17절)는 얘깁니다.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많은 뇌물이 그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까 조심하라>(18절). 열띤 논쟁에 빠지면 누구나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거론하며 노골적으로 상대를 위협하기 쉽습니다.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19:29). 그러나 여기에서의 엘리후의 경고와 주의는 욥에게 현실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선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진노가 지닌 두려움을 상기하므로써 자신의 본분을 점검해 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꼭 있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지혜롭고 선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에서 열외 될 만큼 선량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면 누구도 감히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돈을 이용해서 빠져 나올 수도 없고, 금이나 은 같은 것으로도 죄 사함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심판하실 때는 <아무리 많은 속전도 그를 구해내지 못한다>(시 49:7-8)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재물로도 하나님의 진노는 막을 수 없습니다.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니라>(잠 11:4).
밤을 사모하지 말라 <그대는 밤을 사모하지 말라 인생들이 밤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끌려가리라>(20절). 밤은 흔히 전쟁에서 패한 군대가 퇴각하는 시각입니다. 어두움이 그 모든 것을 은폐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흑암이 결코 숨기지 못하기>(시 139:11-12) 때문입니다.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34:2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밤에는 모두가 자기 처소로 돌아가 침상에 눕기 때문에 남에게 발각되지 않고 피해가기 쉽듯이 하나님도 자기 처소로 돌아가셔서 나를 보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눈을 뜨시고 인생들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반석이나 산들도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숨겨줄 수 없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여기 나오는 밤을 <죽음의 밤>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죽으면 모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도 명백한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가 죽은 밤에도 여전히 그를 추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그대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21절). 이것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섭리와의 말도 안 되는 싸움을 계속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욥은 사실 진작 자신의 그 환난에 승복해야 옳았음에도 지금까지 그 무모한 싸움을 고집해 온 것입니다. 즉 자신의 교만을 죽이고 하나님께 순복하며 그 징계를 달게 받기 보다는 자신의 의로움과 주장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과 다투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엘리후가 이런 경계와 충고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환난보다 죄악을 택하는 자들은 어리석습니다. 죄악을 통해 자신의 근심을 없애려거나 죄악을 통해 자신의 재물을 늘리려거나 죄악을 이용해 환난을 피해 보려는 것은 다 장차 후회하게 될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죄라할지라도 환난보다 더 큰 재앙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는 온통 재앙만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 맞서려는 짓은 스스로 재앙을 부르고 화를 자초하는 행위에 다름 아님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처분은 무조건 선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은혜로우신 것입니다. 거기에 기꺼이 승복하고 자신을 성찰하며 회개하는 사람이 정말 복된 인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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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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