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새벽종소리] 2012년04월14일 QT - 내려놓음 (도서/사진/말씀)

鶴山 徐 仁 2012. 4. 21. 01:13



내려놓음


올바로 균형잡힌 우선순위는 필수적이다. 우리들 중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느라 지쳐서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토미 테니의 [능력의 근원] 중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느 하나에 치우치는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치우쳐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균형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만 정작 그 안에 왕 되신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내 열정으로만 하는 일이 됩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어느 때까지 - 욥 7:19-21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19절).
이는 곧 <주께서 이 매운 회초리를 어느 때까지 내게서 떠나지 않게 하시고, 내가 침 삼킬 동안도 그 혹독한 회초리를 그치지 않으시기를 어느 때까지 계속 하시겠느냐>는 비탄의 물음입니다. 욥은 병이 목까지 차올라 이제는 거의 침조차 삼키기 어려운 상황이 된 듯합니다. 그래서 <나를 숨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나를 채우셨다>(9:18)고도 합니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까 …>(20절).
다윗도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 <마음의 비밀>(시 44:21)까지도 훤히 다 살피고 계십니다. 따라서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또 하나님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싫어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시며 지키시고 샅샅이 살피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시 7:9). 매순간 우리의 앉고 섬을 아시고 먼 데서도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더욱 당신의 생각과 행동을 삼가십시오.

어찌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20절).
과녁도 과녁 나름입니다. 우리나라 양궁선수들의 과녁이라면 얼마나 빛나고 영예롭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욥이 말하는 과녁이란 죽음 같은 고통의 과녁, 처절한 시험과 시련의 과녁입니다. 누구도 원치 않는 최악의 아픔의 과녁입니다. 그런데 욥은 왜 자기가 하필이면 그런 하나님의 모진 과녁이 되어 날카로운 화살촉에 꿰뚫리는 죽음 같은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욥의 이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셨나이까>하는 탄원은 마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하신 주님의 최후 탄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의 그 버림당하심을 통해 당신의 구속의 뜻을 이루셨듯 욥의 과녁 삼으심을 통해서도 당신의 고난의 경륜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이제 흙에 누우리라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21절).
욥이 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며 하나님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내게 은총을 베풀고 싶으셔도 더 이상 나를 찾으실 수 없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그토록 자신의 죄와 허물을 부정하며 자신의 죄인됨을 완강히 부인하던 그가 여기서는 <어찌하여 내 허물, 내 죄악을 사해 주지 않느냐>는 고백까지도 불사합니다. 즉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망라해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기억하십시오. 죽음은 머지않아 우리 모두를 흙에 누일 것입니다. 누구도 그 숙명으로부터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욥처럼 <내 허물, 내 죄악을 제거해 달라>는 사죄의 기도입니다. 죽음을 앞둔 존재의 가장 엄숙하고도 진지한 최후 기도는 보다 깊은 회개의 기도임을 명심하십시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