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새벽종소리] 2011년11월10일 QT - 내어맡김 (도서/사진/말씀)

鶴山 徐 仁 2011. 11. 11. 08:20



내어맡김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도저히 살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나
사람들을 포기하라고,

다시 말해 물질이나, 직장이나, 승진이나
배우자나, 건강이나, 자녀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의 존중과 이해 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치료하는 강력한 해독제가 되며, 우리를 자유하게 하여
우리가 믿음과 내어맡김의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한다.


-낸시 레이드모스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의지 내어맡김’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사랑은
우리 안의 모든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조건과 환경을 넘어
선한 일을 이뤄가는 하나님의 방법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결단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아우성치듯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지금의 문제를 온전히 맡겨 드리십시오.

당신의 순종을 통해 주님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파라독스 - 전 7:5~8
5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6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7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로마제국의 가장 흉칙한 사형도구(십자가)가 오히려 구원의 중심 상징이 된 기독교야말로 정말 역설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파라독스한 논법들은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의 현실을 인정하고 합리화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신랄하게 부정하고 도전하는 책입니다. 성경의 역설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이제껏 믿었던 땅이 일순간 꺼지는 경험을 해야 하고, 또 그럼으로써만이 진정한 생명의 대지 위에 흔들림 없이 서 있을 수가 있게 됨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노래보다 책망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5절).
누구나 즐거운 노래를 원하지 책망을 좋아 할 사람은 없습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지자들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최후는 다 비참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납니다. 선지자들의 책망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늘 백성들을 추켜 세우고 비위를 맞추며 <평안하다! 평안하다!>는 노래로 그들을 잠재운 반면 참 선지자들은 늘 추상같은 책망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선포했기 때문에 그게 싫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톱으로 켜서 죽였고, 미가 선지자는 깊은 감옥에 가둬 굶겨서 죽였으며, 나봇과 사가랴 같은 선지자는 돌로 쳐 죽였습니다. 믿는 자들은 달콤한 노래보다도 아픈 책망을 용납할 줄 알아야 삽니다. 요즘은 세상 어디에서도 책망을 듣지 못합니다. 누구도 책망하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나 아부하고 아첨하며 오직 듣기 좋은 말만 합니다. 교회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더 이상 책망 들을 곳이 없습니다. 책망듣는 자가 복되며, 책망이 없으면 사생자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책망할 때 겸허하게 듣고 감사하며 아멘합시다.

시작보다 끝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8절).
우리나라 사람처럼 시작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없을 겁니다. 다 시작은 거창하고 요란하고 대단한데 문제는 끝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용두사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은 비록 겨자씨 한 톨만큼이나 미미하고 소박하고 보잘 것 없어도 나중에는 거기에 새가 깃들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시작보다는 끝을 책임지고, 끝에 더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믿는 자들입니다. 기독교를 종말론적 종교라 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마지막을 생각하고,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준비하며 사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독일말에 <Ende gut, alles gut>(끝이 좋으면 다 좋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보다 끝을 잘 관리하십시오. 시작은 볼품없어도 끝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교만한 마음보다 참는 마음
< …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8절).
세상에서는 참는 사람이 늘 바보가 됩니다. 참으면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불이익을 면치 못합니다. 반면 교만한 사람은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리더십이 있고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으로 통합니다. 그럼에도 현자는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고 합니다. 대단한 역설이고 동시에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몹시 거북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참음으로 손해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잘나고 능력 있는 교만한 사람보다 낫다니 그게 수용되십니까? 그러나 주님은 실제 그렇게 사셨습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유대인들에게 늘 당하시면서도 끝끝내 참으셨습니다. 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 하셨고, 베드로가 칼로 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고쳐 주시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대신 참고 비우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이십니다. 이런 파라독스한 메시지를 놓치면 곧 기독교 진리의 정수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오한 역설의 진리에 진심으로 아멘하면 우리의 믿음은 놀랍게 성장하며 또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