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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향기] 이여영 기자의 `누구나 하는 `실수`, 그 후의 `처신`이 중요하다`

鶴山 徐 仁 2011. 4. 17. 20:07

누구나 하는 '실수', 그 후의 '처신'이 중요하다
이여영

1973년 11월 워터게이트 사건은 최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워싱턴 D.C 내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 사무실이 털린 지 1년 6개월여가 흐른 시점이었다. 나중에 확인됐지만, 당시 절도범 5명은 공화당 출신인 닉슨 대통령의 재선위원회 관계자들로부터 사주를 받았다. 그들의 절도 행각은 운 나쁘게도 순찰중인 경찰에 발각됐다. 게다가 그들의 특이한 이력 때문에 <워싱턴 포스트> 기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대통령과 절도범의 관계가 낱낱이 밝혀지기 시작하던 이 때, 닉슨 대통령은 이 위기를 정면 돌파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는 4백명의 기자들이 참석했고,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닉슨 대통령은 일부러 초조하고 힘없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는 집요할 정도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결코 공직을 통해 사적인 이익을 취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전 단 1센트도 스스로 벌었습니다. 공직 생활을 통틀어 저는 정의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사기꾼인지 아닌지 알아야 합니다.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은 제 스스로 번 것입니다.”

당장 이 장면은 설득력이 있었다. 이 기자회견으로 위기를 넘기게 될 것이라는 분석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말은 두고두고 닉슨 대통령에게 족쇄가 되고 말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칠수록 대통령이 사안의 일부 혹은 전부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 기자회견 8개월 후 닉슨은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다. 대통령이 임기중에 사임한 것은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핵심적 동기는, 최대한 큰 표 차이로 자신의 재선이 걸린 대선에서 이기겠다는 닉슨의 욕심이었다. 그 결과 그는 대선 선거인단 투표에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 후보를 상대로 520대 17이라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리를 거듭했다.

닉슨 대통령으로서는 당초의 실수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 문제였다. 워터게이트 사건 초기만 하더라도 하급자들의 실수를 인정함으로써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과 부하들의 실수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실수를 끝까지 부정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러나 언론의 집중적인 취재 결과, 자신과 부하들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부각되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닉슨 대통령은 실수보다 더 나쁜 것이, 실수 이후의 더 큰 실수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리차드 파인만의 독특한 거절

실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수 이후의 행동이다. 처음부터 실수를 인정하고, 이를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실수는 별 것이 아닌 일이 될 수도 있다. 널리 회자되는 예가 바로 리처드 파인만의 경우다. 리처드 파인만(1918~1988)은 20세기 후반의 천재 물리학자로 불린다. 동세기 전반기의 아인슈타인과 비교될 정도였다. 그만큼 빼어난 물리학자였다. 그 후로 스티븐 호킹처럼 유명세를 얻은 물리학자가 등장하기는 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나 그처럼 타고난 두뇌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낸 이는 없었다. 그는 양자 전기역학 분야에서의 공헌을 인정받아 196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파인만이 유명했던 것은 단지 학술적 기여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유분방한 기질과 예기치 않은 기행(奇行)으로 더 유명했다. 그는 내키는 대로 했고, 남들의 시선이나 입방아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그도 자신의 실수를 자인한 적이 있었다. 1951년 미국 뉴욕주의 코넬대에서 캘리포니아의 칼텍(캘리포니아 공과대학)으로 막 옮겼을 때였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스모그 현상으로 악명이 높았다. 스모그로 고통 받게 된 파인만은 다시 코넬대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양 대학에 통보를 모두 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결정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칼텍은 강의에 대한 부담 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별 수 없이 그는 양 대학에 정중히 사과하고, 복귀를 단념했다. 스스로는 죽을 때까지 학교를 옮기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그가 점차 명성을 얻어가자,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졌다. 한 번은 시카고 대학의 지인 두 명이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학교를 옮기라는 조언을 했다. 그들이 내건 조건은 엄청나게 좋았다. 파인만은 그들의 말을 묵묵히 다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연봉을 제시하는 것만큼 한사코 막았다.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물론이었다.

연봉에 대해서 입도 떼지 못하게 하고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문은 곧 시카고 대학측에도 퍼졌다. 그 대학의 지인 하나가 사석에서 파인만에게 항의를 해왔다. 어떻게 그런 후한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파인만이 답했다. “간단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제안이 어떤 건지를 아예 말하지 못하게 했으니까요.” 자신은 유혹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제안하는 연봉 액수 자체를 언급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 지인은 편지를 통해 다시 이직을 제안했다. 당시 제안하려던 연봉은 칼텍 교수 연봉의 서너배쯤 된다는 사실도 알려왔다. 파인만은 그 편지에 이렇게 답했다.

“당신을 통해 (시카고 대학이 제안한) 액수를 알게 된 후, 저는 제가 거절한 것이 잘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정도의 봉급이면 내가 항상 원해 왔던 것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여쁜 정부(情婦)를 얻고, 아파트를 얻어주고, 좋은 물건들을 사주고... 당신들이 제안한 봉급이면 실제로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여자를 걱정하고, 그 여자가 뭘 하고 있는지 항상 신경을 쓰겠지요. 집에 오면 늘 부부 싸움을 하겠죠.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불안하게 하고 불행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물리학에 전념하지 못할 것이고, 이것은 제게 엄청난 혼란일 따름입니다. 내가 항상 바라던 일은 나에게 나쁜 일이기 때문에 나는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는 이 솔직하면서도 우스운 편지로 상대방의 고집을 꺾을 수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스타일과 결심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일화 이후 그에게 섣불리 대학을 옮기라고 권하는 이들도 없었다. 그가 두 번째 실수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실수를 인정했고, 그것을 토대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다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연예계와 관료 사회, 정치권, 심지어 재계에서도 실수가 다시 실수를 부르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원정 도박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예인은 그 사실을 숨기려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0.045%의 확률로 병역에서 면제된 연예인은 억울한 심경만 토로하다 공분을 사는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욕은 욕대로 먹고 군대에 입대해야 할 처지다. 딸을 자신의 부처에 특채한 장관은 장관 딸이라서 더 엄격히 심사했다는 궤변만 늘어놓다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취중 성적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국회의원은 해당 기사를 쓴 언론을 고소했다 오히려 무고죄 혐의를 받고 있다. 한 때 친했던 관계였던 한 금융기관 경영진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덮으려는 과정에서 이전투구를 거듭하고 있지만, 동반퇴진할 가능성만 높아졌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실수 이후의 처신이다. 실수를 자인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다짐하고 궁리해야 한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