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文學산책 마당

[스크랩] 구정의 궤적

鶴山 徐 仁 2011. 2. 9. 00:07

일간의 구정 연휴가 끝났다. 2.2-2.6가 구정 연휴였다.

컴퓨터 앞에 앉으니 지난 6일간의 행적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지난 6일간의 행적을 간단히 정리하여 남김으로써 훗날 참고로 하고자 한다.

 

구정 전날인 2월 2일에는 옛 은사 두분에게 구정 선물을 보냈다. 좋은 선물을 고르려고 했으나 찾지를 못해, 연세 높은 분들이지만 자셔 보시라고 문배주 세트를 보냈다. 한 분은 나를 대학선생으로 뽑아주신 분이고, 한분은 지방 대학에 있던 나를 서울로 데려오신 분이다. 두분다 연세가 높아서 기동이 불편하시다.(한 분은 81세, 한분을 79세이시다.)

수퍼에 가서 제사거리를 샀다.

선물을 보내준 제자를 불러 점심을 같이 했다. 이번에 전임강사가 되신 분이다. 소르본느에서 7년간 공부했으나, 10년간 강사를 하셨다. 마흔 전에 대학에 전임이 되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러다보니 혼기를 노쳐 또 다른 걱정거리였다.

 

2월 3일, 설날이다.

새벽에 제사를 지냈다. 목욕제계하고 참선을 하였다. 아들 녀석도 따라했다.

녀석은 뉴욕주립대학 석사를 하고, 연세대학박사과정 3학기에 편입하였다. 자식도 다 성장하니 내 자식같이 않다. 그의 운명은 그가 개척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언젠가 내 곁을 떠나가겠지.

미국에서 근 6년을 지내는 사이 녀석은 지독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지내기는 하지만, 지방을 쓰거나 재배를 하지는 않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했다. 우리 부부만 지방 대신 두분 사전을 모셔놓고 큰절을 올렸다.

척박한 시기에 태어나셔서 지독한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진 두분을 생각하니 눈물이 돌았다. 맏아들 내외가 똑똑한 직업을 가져서 큰 기대를 가지셨으나, 아버님은 결국 자기소유의 집에서 운명하시지 못하셨다.

9시에 서울역에서 동대구행 ktx를 탔다.

한시간 50분이 걸려 동대구역에 닿았다.

작년 년말에 결혼을 한 조카 녀석이 차를 몰고 데리려 나와 있었다.

동생 집으로가 가서 동생집안 사람들의 세배를 받았다. 조카 며느리가 인상이 맑고 아름다웠다.

하나뿐인 조카이고보니, 하나뿐인 조카며느리이다.

내딴에는 큰 마음을 먹고 새뱃돈을 각각 5만원씩을 주었더니, 감사하는 눈치였다.

대학교 접장 5만원은 사장 50만원에 해당한다나...

신장염을 앓고 있는 동생녀석은, 구정이 끝나면 복막투석을 시작할 것이란 말을 했다. 외아들을 장가보내고 좋은 며느리를 얻었으나 몸이 아파 집안에 그늘이 짙었다. 부모님 묘소 참배에 그녀석은 결국 불참했다.

아직도 장가 안간 동생녀석에게는 장가 안간 죄가 크다 하여 삼만원을 주었더니 염치도 없이 넙죽 받았다.

나와 둘째 동생, 그리고 며느리 두 사람, 아들, 조카내외, 질녀가 묘소 참배에 나섰다.

제네시스와 신형 소나타가 고향의 교외를 달렸다.

우리 부부는 제수씨가 운전하는 제네새스를 탔고, 젊은이들은 소나타를 탔다.

사업에 성공한 녀석이 이런 좋은 차와 아름다운 며느리를 두고 몸이 저리 아파서야...

두 분 무덤앞에 일렬로 늘어서 한국식 제사와 기독교식 제사를 혼합하여 예를 치뤘다.

그리고 기념촬영하였다.

인생의 황혼에 서보니, 모든 것이 무상하게 느껴져 왔다.

너무 오랫동안 신작소설을 발표하지 못한 내가 한스러웠다. 지금 집필중인 장편을 어서 완성해야 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러웠다.

시간의 무상을 잠시나마 잊게해 줄 수 있는 것은 소설집필뿐이다.

봄날처럼 날이 다사롭고 포근했다. 그리고 햇살이 찬란하였다.

무덤 가에 앉아 고인을 마음 속으로 추모하였다.

사람이 태어나 살다가 죽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배가 끝나고 젊은이들은 신혼집으로 가고, 우리들은 나의 요청으로 나의 고교 모교로 차를 몰았다.

옛 대구사범인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가 나의 모교이다.

수년 전 이 학교에 초청되어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공식적인 행사라 모교의 옛 모습을 찬찬히 뜯어볼 수 없었다.

모든 교실 동은 다 헐려 버렸고, 다만 강당과 옛 대구사범 본관건물만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었다. 본관 건물 앞에 서 있는 박정희학생의 기념탑과 재학생들이 참여한 항일유적 탑이 발길을 끌었다.

다시 동생집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곤 동대구역으로 왔다.

그 사이 동생의 사돈집에서 사위에게 보내는 선물이 와서 공개하는데, 저으기 놀라시 않을 수 없었다. 사위의 롤렉스 시계값이라고 천삼백만원의 수표가 와 있었다. 어딘가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저 돈이 시계 하나 값이라니. 그런 시계를 차야만 시간이 맞는가. 현실과의 사이에서 뭔가 뛰어넘을 수 없는 괴리감이 있어서 가슴을 누질러왔다.

나도 며느리를 볼 때 저렇게 해야 하나...참으로 걱정이 앞섰다.

서울 옥수동 집에 도착하니 밤 열한시였다.

 

2월 4일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365일 매일 하나씩 읽는 사랑이야기> 라는 책을 읽었다. 흔히 하는 사람의 본질을 상당한 혜안으로 설파한 책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 주제의 심화에 도움이 될 듯했다.

점심 때 처가에 가서 올해 90세에 드신 장모님에게 세배를 드렸다.

장모님은 아들 여섯과 딸을 셋을 두셨다. 그래서 차가에 가면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댄다.

동생들이 다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맏딸인 집사람 부부에게 노모에게 새배드릴 첫번째 순서를 양보하기 위해서 였다.

내가 죽지 않으니 맏사위가 어느새 노인이 되었구나 하시면서 장모님은 새배를 받으셨다.

지난해 년말에 친정 어머니를  딸 삼형제가 교육문화회관호텔로 모셔서 이틀밤을 그야말로 엄마와 딸들로 돌아가 시간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퇴계의 직손이신 장모는, 높은 연세에도 꼿꼿한 자세와 품격을 지니고 있다. 구순의 언세에도 정신이나 몸에 흐트려짐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장모님에게 흰봉투를 드렸고, 장모님은 새뱃돈으로 십만원을 주셨다. 나의 봉투가 새뱃돈보다 더 두텁지 않은 듯했다.

처가에서 물러나와 이재철 교수님이 들어가 계시는 성북노인요양원으로 갔다.

나의 고교시절 2학년 담임선생님이시다.

2년 전에 상처하시고, 혼자 사시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으셔서, 노인 요양원에 들어오셨다.

아들마저 이혼을 하니, 어디 밥 얻어 먹을 데라고 없었다고 했다.

앏은 흰봉투를 올렸더니 감사하셨다.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아내를 앞세우지 말고, 자네가 순서를 먼저 하라고 당부 아닌 당부를 했다.

명절연휴의 행사가 끝이 난 것이다.

인사치를 어른과 고인들을 다 찾아뵈었으나 마음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집사람의 표정도 밝지 못했다.

집 가까이 있는 대한극장으로 가서 <평양성>이란 영화를 보고 와서 잤다.

 

2월 5일, 오전 내내 집필과 독서를 하다가 오후에 삼청동길로 산보를 나섰다.

그리고 광화문으로 나갔다. 내가 고향에 가서 고교모교를 찾는 것을 본 탓이었을까, 집 사람은 자신이 다녔던 중고교가 있는 광화문통에 가기를 좋아한다. 자신은 광화문소녀라고 한다. 학교의 흔적은 없고, 거대한 빌딩들이 들어차 있을 뿐이다.

서울에 살면서 좋은 찻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젊은이들이 둘러앉은 찻집의 분위기는 언제나 소란스럽기 마련이다.

우리는 하는 수없이 택시를 불러타고 하이야트로 와서 허브차를 시켜마시며 서울의 밤하늘에 들이워진 어둠의 장막을 음미하였다.

몇살까지 살 수 있으며 장편소설을 몇편 더 쓸 수 있을까, 나는 줄곳 이런 생각을 했다.

올 년초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있었던 모교 총동창회 신년 하례식에서 나는 헤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길녀 경원대 총장에게 인사를 했다. 언제부터, 한 십년은 더 되게 총장님과 나는 이런 인사를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수십년 전에 우리 마로니에회가 총동창회 최우수 동창회로 뽑혀 상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 총장님께서 나를 부르시어, 자신은 의대 졸업이지만 문리대를 특히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정 교수, 소설 안쓰는거야!" 

나의 인사를 받으신 총장님은 이런 반말 투로 그러나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저으기 놀랐다. 총장님은 나에게 언제나 깎듯한 존대어를 쓰셨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발표하지 않는 내가 안스러우신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무러워서 그러신지도 모른다.

그날 그런일이 있고 난 후 나는 3,4년간 신작을 발표하지 못한 나 자신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의 소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새삼스런 자아의식이 나의 폐부를 뚫고 들어왔다.

정년을 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하는 통에 그 세월이 정신없이 흘러간 것이다.

집에와서 광윤에게 전화를 해서 밥을 좀 사라고 했더니, 안그래도 오래 얼굴을 보지 못해, 마로니에 산우회 회원들이 내일 모이기로 했다며 반겼다. 광윤은 자기 식당의 밥을 내면서도 데스크에 전표를 끊는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밥을 사라고 한다.

 

2월 6일, 연휴의 마지막날이다. 즉 일요일이다.

<사랑>이야기 책을 3독을 했다. 별것도 아닌 책이지만, 지금 쓰고 있는 소설과 연관을 지우니 좀더 깊이 음미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사랑은 사람을 한없이 기쁘게도 하지만, 한없이 슬프게도 한다. 사랑은 나를 점처럼 작은 공간 속에 처박기도 하지만 한없이 넓은 공간 속으로 흩뿌리기도 한다. 사랑만이 소설의 영원한 주제이다. 사랑을 주제로 하지 않는 소설은 결국 사라지고 만다.

하늘이 대단히 흐렸다.

대구 누님 댁에서 전화가 왔다. 대구에 와서 자기집에 들르지 않아 너무나 섭섭하시다고 했다. 일정이 너무 빡빡했고, 당일 치기라 어쩔 수 없었다고 했지만, 이제 상노인이 되신 누님에게 못할 짓을 한 것같아 송구스러웠다.

대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신의 정년 기념 자리에 대해 상의하였다.

나는 대구에 가서까지 계속 동기생 여러분들에게 전화를 해서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한 스무 분은 오실 것 같다는 말을 했더니 대렬 기뻐하였다. 소년처럼 맑은 표정과 영혼을 가진 대렬, 그날 한껏 행복했으면 좋겠다.

저녁에 광윤의 식당으로 갔다.

나는 웬지 모르게 울적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막걸리잔을 계속 기우렸다.

엎에 앉았던 집사람 나의 잔을 빼앗어 치워버렸다. 당신 또 한번 당하고 싶어요 했다.

계속 마시다가는 그 간절한 집필에의 욕망도 꺾고 무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사역에서 전철을 내려 가로수길로 가서 분위기 좋은 찾집에서 차를 마셨다. 요사이는 어느 찻집에 가도 커피보다가는, 곁드려 먹는 케익값이 더 비싸다. 그래도 마시는 사람이 좋아하는데야 어쩌겠는가. 집 사람이 기분 좋게 차를 마시고 케익을 짤라 먹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는 조금 위안이 된다.

어서 봄이 와서 저 앙상한 가로수들이 푸른 잎을 매달았으면 좋겠다.

 

 

 

 

불효자식을 용서하옵소서...

 

 

 문화유산으로 공식적으로 지정된 구 대구사범 강당,필자재학중의 강당

 구 대구사범의 본관건물, 지금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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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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