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각수(鴨脚樹)와 금성단(錦城壇)
은행나무(銀杏-, Ginkgo biloba)는 중국 원산의 겉씨식물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공손수(公孫樹)·행자목(杏子木)·압각수(鴨脚樹) 등으로 불린다. 공손수(公孫樹)는 은행(銀杏) 씨[열매]를 손자 대에서나 얻을 수 있다 하여 부르는 이름이며, 압각수(鴨脚樹)는 은행나무 잎이 오리발[鴨脚]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그리고 은행(銀杏)은 ‘은빛 나는 살구’라는 뜻으로, 은행 씨가 살구와 비슷하고 표면에 은빛 가루가 덮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래서 영문 이름도 ‘Silver apricot(은빛 살구)’이다.
영주 순흥 금성단(錦城壇) 서북 쪽 내죽리 98번지에 있는 압각수(鴨脚樹)는 ‘충신수’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은행나무인데, 수령 1100년, 높이 30m, 밑둥치 둘레 5.5m로 경상북도보호수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순흥 압각수가 유명한 것은 1457년(세조 3) 정축지변(丁丑之變)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 현장을 지켜보며 순흥도호부와 함께 죽었다가 순흥도호부와 함께 다시 살아나 금성단과 더불어 역사(歷史)를 증언(證言)하며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1457년(세조 3) 정축지변(丁丑之變)으로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폐부(廢府)되자, 이 압각수도 밑동만 남고 불에 타 죽었다가, 1643년(인조 21) 나무에 새순이 돋아 가지가 자라고 잎이 피기 시작하더니, 1683년(숙종 9) 순흥도호부가 다시 설치되자 무성해졌다고 한다. 이는 1757년(영조 33) 부사 조덕상(趙德常)이 쓴 금성단(錦城壇)의 ‘흥주고부은행수기(興州故府銀杏樹記)’에도 어느 노인이 지나가다가 이르기를 “흥주(興州;지금의 순흥)가 폐해지면 은행나무가 죽고, 은행나무가 살면 흥주가 회복될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고 나와 있는데, 이처럼 압각수는 순흥도호부와 흥망성쇠를 함께한 신목(神木)인 셈이다.
정축지변(丁丑之變)은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지역 유림(儒林)과 영월에 유배된 단종 복위 운동(端宗復位運動)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실패로 끝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殺戮)당한 사건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세종(世宗)의 여섯째 아들로 이름은 유(瑜)이며, 단종의 숙부요 수양대군의 넷째 동생인데, 1455년(단종 3) 단종이 한명회·권람 등의 강요에 의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上王)이 된 후, 그 일파에 의해 모반의 누명을 쓰고 삭령(朔寧)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移配)되었다. 그런데 1456년(세조 2)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 사육신(死六臣)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모두 참혹하게 처형된 뒤, 그 일에 연루되었다 하여 금성대군은 다시 순흥으로 유배, 위리안치(圍籬安置;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러치고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심한 유배형)되었다. 그 이듬해인 1457년(세조 3)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淸泠浦)로 유배되자, 금성대군은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한 관노의 밀고로 거사(擧事)는 실패로 돌아가고, 순흥은 역모지(逆謀地)라 하여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는 폐부(廢府)되었다.
이때 수많은 순흥부민(順興府民)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살육되어,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竹溪川)을 흘러 10여 리나 떨어진 안정면 동촌 마을까지 흘렀다 해서 안정면 동촌리는 지금까지도 마을 이름이 '피끝'이라 불리고 있다 한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순흥의 관노(官奴)가 벽장에 숨어 역모(逆謀)를 엿듣고는 금성대군의 시녀 김련과 사귀어 격문을 훔친 후 한양에 알리러 가는데, 이를 눈치 챈 풍기현감 김효급(金孝給)이 뒤좇아 가 빼앗아 고(告)했다고 하나, 정사(正史)인 「세조실록」에는 거사(擧事)의 제보자가 순흥부사 이보흠으로 나오니 그 진위(眞僞)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아무튼 그 후 200여 년이 지나 1681년(숙종 7) 단종은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다가 1698년(숙종 24) 복위(復位)되고 묘호(廟號)가 단종으로 추증되었으며, 단종을 따르던 신하들과 함께 금성대군도 관작이 복구되어 시호가 내려졌고, 정조 때에는 그의 자손들도 종친으로써 대접을 받아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압각수(鴨脚樹)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70번지에 있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93호이던 금성단(錦城壇)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491호 '금성대군 신단'으로서, 1693년(숙종 19) 순흥부사 정중창(鄭重昌)이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당시 함께 순절(殉節)한 의사(義士)들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금성대군 위리안치 유허지(遺墟地)에 설치했던 단(壇)이나 제사(祭祀)가 이어지지 못해 폐허가 되었다.
금성단(錦城壇)에 걸린 현판 중 1720년(숙종 46) 이기륭(李基隆)이 쓴 ‘금성단기(錦城壇記)’에 의하면, 1719년(숙종 45) 제월교(霽月橋)를 지나다가 폐허가 된 금성대군 위리안치 유허지(遺墟地)를 보고 안타깝게 여겨 부사 이명희(李命熙)에게 건의하여 3층으로 단(壇)을 쌓고, 위층은 금성대군, 중간층은 이보흠(李甫欽), 아래층은 대군이 화를 당하던 당시에 처형된 여러 사람의 혼령을 위한 층으로 하여 융숭하게 향사(享祀)를 지내듯 단제(壇祭)를 지냈다고 한다.
그 후 1742년(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소청(疏請)하여 단소(壇所)를 정비하고, 상단에 금성대군, 좌단에 이보흠, 우단에 순절 의사들의 위(位)를 모신 뒤 순의비(殉義碑)를 세워 지금까지 춘추 제향(春秋祭享)을 올리고 있다 한다.
세조의 왕위 찬탈과 사육신의 처형, 단종의 유배, 정축지변 등 당시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증언(證言)하는 압각수(鴨脚樹)와 금성단(錦城壇)은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절명시(絶命詩)’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둥둥 북소리 이 목숨 재촉하는데(擊鼓催人命) / 돌아보니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었네(回頭日欲斜) / 황천 가는 길에는 주막도 없을 텐데(黃泉無一店) /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자고 가야 할고(今夜宿誰家)’
(시인, 예술촌 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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